윤여동설 - 신라 진흥왕은 지금의 어디까지 강역을 확장했던 것일까? - 최초주장
정복군주 신라 제24대 진흥왕은 7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리하여 진흥왕이 성인이 될 때까지 어머니인 태후가 섭정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재위 9년(A.D.548) 봄2월에 고구려(양원왕)가 예인(穢人:濊人)들과 함께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침공해오자 백제(성왕)에서 신라에 구원을 청하였고, 신라 진흥왕은 장군 주령(백제본기에는 주진)으로 하여금 군사 3천을 거느리고 가서 돕도록 하였는데, 이때 고구려군을 죽이고 빼앗은 것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이때는 신라와 백제가 나제동맹을 맺고 있을 때였는데, 이때까지는 태후가 섭정했던 듯하다.
그런데 진흥왕이 성인이 되어 직접 정치를 챙겼을 것으로 생각되는 재위 11년(A.D.550)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와 백제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두고 뺐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펼치자 그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진흥왕은 고구려 군사들과 백제 군사들이 모두 기진맥진 상태가 되기를 기다려 그 두 성을 모두 빼앗아버리라 명령하게 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록을 보면 “11년(A.D.550) 봄 정월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쳐서 함락 시키고, 3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왕이 두 나라 군사들이 피로한 틈을 타서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병시켜 쳐서 두 성을 빼앗아 성을 증축하고 군사 1천을 머물게 하여 그곳을 지켰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부터 나제동맹은 깨어지게 되고, 진흥왕은 독자적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강역확장에 나서게 된다. 이때 진흥왕은 연호도 “개국(開國)”으로 고쳐 나라를 새로 건국하듯 강역을 넓혀 가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다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는 그 다음해인 재위 12년(A.D.551)에 이르러 고구려가 돌궐의 침공을 받아 신성과 백암성에서 전투를 벌이자 진흥왕은 그 틈을 타 거칠부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여 승리한 후 10개 고을을 빼앗게 되고,
재위 14년(A.D.553) 7월에는 백제를 침공하여 백제의 동북변경 지역을 빼앗아 그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을 군주로 임명한다.
그러자 재위 15년(A.D.554) 7월에 이르러 백제의 성왕이 가량(加良)의 군사와 연합하여 신라가 차지하고 있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해 온다.
☆ 신주(新州)는 우수주(우두주) 즉 지금의 능원(凌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설치했을 것이고, 관산성도 우수주 부근에 위치한 성이었다.
이때 백제의 성왕은 전 해에 신라에게 빼앗긴 동북변경 지역을 다시 탈환할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신라의 관산성 군주였던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가 이를 맞받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는데, 신주(新州)의 군주 김무력이 군사들을 이끌고 달려와 지원하자 전세는 역전되었고, 그 기회를 틈타 김무력의 비장인 삼년산군 고간 도도(都刀)가 빠르게 몰아쳐 백제 성왕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게 된다. 신라의 완벽한 승리였는데, 이때 백제군은 왕도 죽고, 좌평 4인과 장병 29,600명이 전멸하게 되어, 말 한필도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때 대백제전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둔 신라는 백제로부터 북한산 부근까지의 땅을 전리품으로 챙겼던 듯한데 이는 재위 16년(A.D.555) 10월 조에 진흥왕이 북한산(北漢山)을 순행하고 국경을 넓혀서 정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어디에도 이때 진흥왕이 북한산순수비를 세웠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고, 또 황초령순수비나 마운령순수비, 창녕순수비를 세웠다는 기록 역시 발견된 예가 없다.
그리고는 진흥왕은 재위 17년(A.D.556)에 이르러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하고 사찬 성종으로 군주를 삼는데, 이때 신라가 비열홀주를 설치했다는 것은 진흥왕 때 신라가 북쪽의 하슬라(명주)를 지나 서북쪽으로 강역을 더 많이 넓혔다는 말이 된다.
☆ 신라 지증왕 13년(A.D.512) 조를 보면 우산국(于山國) 정벌기사가 보이는데, 우산국은 명주(溟州)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 울릉도라고도 한다. 땅 둘레가 1백리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신라가 하슬라(명주)까지를 차지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고, 또 15년(A.D.514)조에는 신라 최초의 소경인 아시촌소경(阿尸村小京 : 위치 불명)을 설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명주는 지금의 내몽골 고륜기(庫倫旗) 부근으로 비정된다. 따라서 이때 신라 진흥왕이 비열홀주를 설치했다는 것은 하슬라에서 나아가 강역을 많이 넓혔다는 의미가 된다. 비열홀주는 함경도 안변의 옛 이름으로서 지금의 내몽골 나만기(奈曼旗) 부근으로 비정된다.
그리고 진흥왕은 국원(國原)을 소경(小京)으로 만들게 되고, 사벌주(沙伐州)를 폐지하고 감문주(甘文州)를 설치하여 사찬 기종으로 군주를 삼고, 또 신주(新州)를 폐지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했다고 하는데, 이때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 사이에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매우 치열했던 듯하다.
일반적으로 주(州)나 현(縣)을 폐지했다는 것은 곧 그곳을 빼앗겼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 국원소경은 충주를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의 진황도 천마호 부근의 태영(台營)을 말하는 것이고, 사벌주는 상주(尙州)의 옛 지명이라 하는데, 삼국사기 잡지를 보면 왕성(금성) 동북쪽 당은포 방면에 상주(尙州)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따라서 한반도 경주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상주는 옛 상주라 할 수 없고, 북한산주는 진황도 도산(都山)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재위 23년(A.D.562) 조를 보면, 가을7월에 백제가 변경을 침략하여 약탈하므로 진흥왕이 군사를 발동시켜 대항하여 1천여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고 하고, 9월에는 가야가 배반하여 왕이 이사부를 시켜 평정하였다는 기록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아마 이때 백제는 신라의 서쪽 변경부근을 침공했던 듯하고, 가야는 대가야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때 대가야가 멸망했을 것인데, 재위 26년(A.D.565) 8월 조를 보면, 아찬 춘부에게 명하여 국원(국원소경)에 나가 지키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국원 지역이 접경지였음을 알게 하고, 9월 조를 보면, 완산주(完山州)를 폐지하고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였다라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의 역사상식처럼 완산주가 전주를 말하는 것이라면 이 기록은 매우 이상하다. 왜냐하면 이때 신라가 어떻게 백제 땅이었을 전주를 차지하고 완산주를 설치할 수 있었다는 말인지..............아마 잘못된 기록일 것이다.
그리고 진흥왕은 재위 29년(A.D.568)에 이르러 연호를 “대창(大昌)”으로 고치는데, 아마 이때 진흥왕은 자신이 목표로 했던 국토확장을 완수하자 나라가 크게 번창했다는 의미로 대창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을 것인데, 그 해 10월에 이르러서는 북한산주를 폐지하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하고, 비열홀주를 폐지하고 달홀주(達忽州)를 설치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때 신라가 북한산주와 비열홀주는 고구려에게 다시 빼앗긴 것이 아닌가 싶다.
☆ 북사 고구려전 건덕6년(A.D.577) 조를 보면, “도읍은 평양성(平壤城)으로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하는데, 동서가 6리로서 산의 굴곡을 따라 성곽을 쌓았고,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았다. 성안에는 오직 군량과 무기만을 저장하여 외적이 침입할 때를 대비하였다가 (외적이 침입하면) 곧 성안으로 들어가 단단히 지킨다. 왕은 그 한쪽에 궁실을 별도로 지어 놓았는데, 평상시에는 거처하지 않는다. 그 외에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이 있는데, 역시 별개의 도읍이다. 그 나라에서는 삼경(三京)이라 부른다. 또 요동, 현토 등 수십 성이 있는데 모두 관리를 두어 통치한다. 신라와는 매번 서로 침탈하는 전쟁으로 쉴 틈이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진흥왕은 재위 33년(A.D.572)에 이르자 연호를 “홍제(鴻濟)”라고 또 다시 고치는데, 이때쯤에는 진흥왕도 자신의 운명이 얼마 많이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팔관회를 열어 전쟁 중에 전사한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 준다.
그로부터 4년 뒤 신라를 강국으로 만들어 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아 놓은 진흥왕은 43세의 나이로 죽게 되고 그 뒤를 이어 25대 진지왕이 왕위를 잇는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그 땅을 나누어 9주를 설치하게 되는데, 삼국사기 권제34 잡지 제3 지리1을 보면, “본국(신라)지역 내에 3개주를 설치했는데, 왕성 동북쪽 당은포 방면을 상주(尙州)라 하고, 왕성 남쪽을 양주(良州)라 하고, (왕성의) 서쪽을 강주(康州)라 하였다. 이전의 백제 지역에 3개 주를 설치했는데, 백제의 옛 성(사비성) 북쪽 웅진구를 웅주(熊州)라 하고, 그 다음 서남쪽을 전주(全州)라 하고, 그 다음 남쪽을 무주(武州)라 하였으며, 이전의 고구려 남쪽 지역에 3개 주를 설치하였는데, 서쪽으로부터 첫째를 한주(漢州)라 하고, 그 다음 동쪽을 삭주(朔州)라 하고, 그 다음 동쪽을 명주(溟州)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를 알 수 있는데, 그 각각의 위치는 아래 그림과 같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고구려가 멸망하고 대조영이 발해국을 건국한 후 발해국은 옛 고구려 땅의 거의 전부를 다시 발해국의 강역에 포함시키게 되는데, 신라는 이때 진흥왕 때 넓혀 놓았던 강역의 대부분을 발해에게 다시 빼앗겼던 듯하다.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발해국은 부여(동부여), 옥저(동옥저), 예(濊)와 맥(貊) 그리고 조선(평양성부근) 등 발해 북쪽에 위치하고 있던 여러 나라의 땅을 거의 차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를 알 수 있고, 또 “숙신(말갈의 옛 이름)의 옛 땅으로 상경을 삼으니 용천부이며, 그 남부를 중경으로 삼으니 현덕부이고, 예와 맥의 옛 땅으로 동경을 삼으니 용원부이며, 옥저의 옛 땅으로 남경을 삼으니 남해부이며, 고구려의 옛 땅으로 서경을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용원(동경용원부)의 동남쪽 연해는 일본 가는 길이고, 남해(남경남해부)는 신라 가는 길이며, 압록(서경압록부)은 중국에 조공 가는 길이고, 장령부는 영주 가는 길이며, 부여부는 거란 가는 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를 알 수 있다.
위 지도와 기록을 꼼꼼히 비교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