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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실직국(悉直國)과 음즙벌국(音汁伐國)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서 국경을 다투었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18. 8. 19. 21:00

윤여동설 - 실직국(悉直國)과 음즙벌국(音汁伐國)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서 국경을 다투었을까?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왕 23(A.D.102) 조를 보면,

  “가을8월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 : 悉直國)이 국경을 두고 서로 다투다가 (파사)왕에게 와서 판결을 청하였다. 이에 왕이 난처하여 생각하기를, 금관국(金官國) 수로왕(首露王)이 나이도 많고, 지혜롭고 지식도 많아 불러 물었더니 수로가 의견을 내어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붙이도록 하였다.

  이에 왕이 6부에 명하여 함께 수로왕을 위해 연회를 베풀게 하였는데, 5부는 모두 이찬을 접대 책임자로 삼았으나 오직 한기부 만이 미천한 자를 책임자로 삼았다.

  수로가 노하여 종 탐하리를 시켜 한기부의 책임자 보제를 죽이고는 돌아갔다.

  그 종(탐하리)은 도망하여 읍즙벌주(音汁伐主) 타추간(陁鄒干)의 집에 의탁하였다.

  (파사)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 노비를 찾았지만 타추가 보내지 아니하였다.

  이에 왕이 노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음즙벌국을 치니, 그 우두머리가 스스로 무리와 함께 항복하였다.

실직(悉直)과 압독(押督) 두 나라 왕도 와서 항복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실직국과 음즙벌국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었길래 두 나라 사이에 국경문제로 다투었던 것일까?

 

  실직국은 삼국사기 지리지 명주(溟州) 조의 삼척군은 원래 실직국으로서 파사왕 때 항복해 왔는데, 지증왕 6년에 주()를 설치하고 이사부(異斯夫)로서 군주(軍主)를 삼았다라는 기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삼척도호부의 건치연혁에 본래 실직국이다. 신라 파사왕 때 항복해 왔고, 지증왕 6년에 실직주를 설치하고 군주를 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실직국의 본래 위치를 강원도 삼척 일대로 볼 수 있고,

  음즙벌국은 삼국사기지리지 양주(良州) 의창군 조를 보면, “의창군은 원래의 퇴화군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흥해군이다...........음즙화현은 파사왕 때에 음즙벌국을 빼앗아 현을 만든 것인데, 지금은 안강현에 병합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 속현 조를 보면, “안강현(安康縣)은 경주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본래 신라 비화현이었는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의창군의 영현으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음즙벌국의 본래위치를 경주 북쪽 경상도 안강 일대에 비정할 수 있을 것인데,

  문제는 신라의 서라벌(금성)이 지금의 한반도 경주가 아니라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라는데 있고, 또 금관가야의 도읍 금관성도 지금의 한반도 김해가 아니라 요녕성 흥성(興城)이라는데 있다.

  따라서 실직국과 읍즙벌국 역시 한반도가 아닌 지금은 중국 땅이 되어버린 발해 북쪽 그 부근에서 찾아야 하는 것인데,

  실직국은 지금의 요녕성 부신(阜新) 부근으로 비정해 볼 수 있고,

  음즙벌국은 그 서남쪽 청하문(淸河門) 부근으로 비정해 볼 수 있다.

  옛날 실직국과 음즙벌국은 지금의 발해 북쪽에서 국경을 다투었는데, 지금 우리는 그 기록을 한반도로 가져와 해석하고 있으니 한반도 삼척에서 실직국의 흔적을 찾지 못하는 것이고, 안강에서 음즙벌국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5(A.D.104)조를 보면, “가을7월에 실직이 배반하매 군사로서 토벌하여 평정하고 그 남은 무리를 남쪽 변경으로 옮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앞서 실직국이 신라에 복속했으나 2년 뒤 실직국의 일부세력이 반란을 도모했던 듯하다. 그렇지만 신라에서는 반란 세력만 평정한 뒤 실직국을 없애지 않고, 자주성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가 400년 뒤인 지증왕 6(A.D.505)에 이르러서야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로서 군주를 삼았다고 하였으니 실직국은 이때에 이르러서야 자주성을 완전히 상실했을 것이다.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생각을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우리 고대 역사는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맨 날 제자리걸음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차분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우리 고대 역사에서 확실한 것이 하나라도 있는지..........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가정이고, 추정뿐이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