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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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대의 태백산(太白山), 장백산(長白山)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 - 최초주장

윤여동 2018. 9. 29. 09:23

윤여동설 - 고대의 태백산(太白山), 장백산(長白山)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 - 최초주장 

 

 

 

 

  지금 북경 동북쪽 내몽골과 하북성의 경계에 위치한 칠로도산 산맥(필자주 : 홍산문화로 유명한 내몽골 적봉시의 서쪽에 위치)에는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 2,067m)이라는 높은 산이 있고, 그 정상부분은 나무가 크게 자라지 않는 고원지대가 형성되어 있고 큰 호수는 없다. 지금은 중국에서 그 고원 지역을 대단위 풍력발전단지로 조성하고 있는 중이다.

  필자가 왜 이 산을 언급하느냐 하면, 바로 이산이 산해경(山海經)의 대황북경에 大荒之中 有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대황 가운데 산이 있는데 이름하여 불함이다. 숙신씨의 나라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불함산(不咸山)이고,

  또한 환단고기 삼성기 전 상편에서 어느 날 동남동녀 800이 흑수(黑水), 백산(白山: 태백산)의 땅에 내려왔는데..........이를 환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환인(天帝桓因)이라 불렀다. 또한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했다. 환인은 7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기록 속의 백산(白山)이며,

  삼국유사 고조선 왕검조선 조에서 환웅(桓雄)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 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기록 속의 태백산(太伯山)이고,

  진서(晉書) 숙신씨 전의 불함산(不咸山), 수서(隋書) 말갈 전의 도태산(徒太山), 북사(北史) 물길 전의 종태산(從太山), 신당서(新唐書) 흑수말갈 전의 태백산(太白山)[도태산이라고도 부른다고 하였다], 신당서(新唐書) 발해 전의 태백산(太白山) 바로 이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을 말하는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려시대 초부터 우리 역사에 백두산(白頭山)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산꼭대기가 희게 보인다 하여 태백산을 그렇게 바꾸어 부른 것이라 하고, 여진족들은 금나라 초부터 그 산을 장백산(長白山)이라 부르게 된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금나라,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서자 명나라에서는 고려에게 철령 이북(쌍성총관부 지역)이 원나라에 속했던 땅이었으므로 요동에 속하게 하겠다고 통보하게 되고, 당시 고려에서는 그에 반발하여 요동을 정벌하려고 하다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조선은 건국 후 도읍을 대륙의 개경에서 한반도의 한양으로 옮기게 되어 우리 한민족의 한반도시대가 열리게 되고, 조선에서는 대륙의 지명을 한반도에 이치(교치) 시키게 된다.

  대륙의 지명을 한반도의 비슷한 위치에 그대로 옮기는 작업이었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이었다.

  그리하여 이때 백두산도 한반도 북쪽으로 옮겨지게 되어, 그때부터 백두산 꼭대기에 둘레가 80리에 이르는 못이 있다고 기록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신중동국여지승람 회령도호부 산천 조를 보면,

  “백두산(白頭山)은 곧 장백산(長白山)이다.

  부(회령도호부)에서 서쪽으로 7, 8일 걸리는 거리에 있다.

  산이 모두 3층으로 되어 있는데, 높이가 200리요, 가로는 천리에 뻗쳐 있다. 그 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옛 사서에는 한민족의 성산인 태백산 정상에 큰 못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데, 조선 초부터 그러한 기록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때쯤 대륙지명을 한반도로 이치(교치) 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백두산에 관한 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고의든 아니든 원래의 대륙 옛 장백산(옛 태백산)과 한반도 백두산을 동일한 산으로 착각하고 기록한 것임에 틀림없다.

 

 

 

지금 백두산 꼭대기에는 천지(天池)라고 이름 붙여진 수면의 둘레가 약 15km(필자주 : 주변 산 능선을 따라 재면 더 길어져 80리에 이를 수 있을 것임)에 이르는 큰 화산호가 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대동여지도에도 백두산과 호수를 표시하게 되었을 것인데, 호수는 천지가 아닌 대지(大池)라고 표시해 놓았으니 아마 지금 백두산의 화산호를 천지(天池)라고 부르게 된 것은 그리 멀지 않은 근래의 일로 추정된다.[필자주 : 1900년대 초라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비록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백두산과 장백산이 동일한 산이라고 기록해 놓긴 했어도 사람들 중에는 장백산과 백두산이 별개의 다른 산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듯하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한반도의 백두산이 옛 태백산, 옛 백두산, 옛 장백산과는 다른 산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잠곡 김육선생은 조경일록에서 지금의 중국 북경 동쪽에 위치한 하북성 당산의 경충산 정북쪽에 백두산이 위치하고 있다는 정확한 기록을 남겨 놓기도 하였는데, 잠곡 선생은 북경 동쪽 경충산 부근이 우리의 옛 땅이었음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조선시대와 청나라 때에 그려진 옛 지도들을 보면 대개 백두산과 장백산을 서로 다른 위치에 그려 놓았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장백산과 백두산이 서로 다른 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도에 그렇게 표시했을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백두산은 옛 불함산, 옛 백산, 옛 태백산, 옛 백두산, 옛 장백산이 아닌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그때부터 백두산이라는 이름만 붙여 불렀을 뿐이다.

  고려로부터 그 이전 우리 역사속의 진짜 불함산(不咸山), 진짜 태백산(太白山), 진짜 백두산(白頭山)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을 말하는 것이고, 여진족들은 그 산을 도태산(徒太山), 장백산(長白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한민족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대륙의 우리 옛 땅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한반도 북쪽의 백두산을 옛 태백산, 옛 장백산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역사학자들도 조선시대 사람들과 똑같이 잃어버린 우리의 대륙 옛 땅에서 찾아야 할 옛 지명을 한반도에서 찾고 있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고조선의 왕검성을 한반도 평양이라고 하는 것,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되었다고 하는 것,

  삼한과 삼국, 가야의 위치를 한반도라고 하는 것 등이 그러하고,

  고려의 도읍 개경을 한반도 개성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고려의 천리장성을 한반도에서 찾으려 하거나,

  고려의 동북9성을 한반도에서 찾으려 하는 것 그리고 쌍성총관부 등을 한반도에서 찾으려 하는 것 등이 그에 속하는 행위라고 할 것이다.

  한반도에 고려로부터 그 이전 진짜 우리의 고대 역사 속 옛 지명은 한 군데도 없다.

  조선시대에 단순히 그 지명만 따서 대륙으로부터 한반도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눈을 크게 뜨고 대륙을 바라 보라.

  그곳에 우리의 선조들이 살던 드넓은 옛 강역이 깨우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