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예(濊)와 동예(東濊)의 위치가 서로 다른 것을 몰랐던 김부식과 삼국사기 찬자들 - 최초주장

윤여동 2019. 2. 10. 22:06

윤여동설 - ()와 동예(東濊)의 위치가 서로 다른 것을 몰랐던 김부식과 삼국사기 찬자들 - 최초주장

 

 

   삼국사기 권제35잡지 제4명주(溟州) 조를 보면,

  “명주는 본래 고구려의 하서량(하슬라라고도 한다)이었는데, 후에 신라에 속하였다. 가탐의 고금군국지에 이르기를, ‘지금 신라의 북쪽 경계에 있는 명주는 대개 예()의 옛 땅이라 하였으니 이전 사서에 부여를 예의 땅이라고 한 것은 잘못인 듯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삼국사기 찬자들은 부여(동부여)가 예의 땅을 차지했다는 후한서 부여국전이나 삼국지 부여전의 기록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했는데, 이로 미루어보면 김부식과 삼국사기 찬자들은 예와 동예의 위치변동에 대하여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는 예가 원래부터 신라의 북쪽 명주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런데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원래의 예(濊國 : 蒼海郡, 滄海郡)와 그 도읍 예성(濊城 : 南閭城이라고도 한다)은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비해, 동예(東濊)는 지금의 칠로도산 동쪽 내몽골 고륜기(庫倫旗) 일원을 말하는 것으로서 신라의 도읍 서라벌(금성)로 비정되는 요녕성 금주시(錦州)의 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난다.

 

 [원래의 예성(濊城 : 일명 南閭城(남려성)이라고도 불렀던 듯하다)으로 추정되는 내몽골 정람기 고성터(가로세로 각2.3km, 동경11611분 북위4221)로서 후일에는 동부여의 도읍성이 되었던 듯한데, 지금 중국에서는 이 고성터를 원 상도성터라고 하고 있다]

 

[내몽골 정람기에는 사랑성(四郞城)이라는 또 다른 고성터도 있다(가로세로 각 약 1km, 동경11558분 북위4216)]

 

  전한서 권6 무제기 제6을 보면,

  “원삭원년(B.C.128) 동이 예군 남려 등이 28만구를 이끌고 투항하여 와서 창해군으로 만들었다(元朔 元年(B.C.128) 東夷 薉君南閭等 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

  원삭3(B.C.126) 봄 창해군을 파했다(元朔 三年 春 罷蒼海郡)" 라고 기록되어 있고,

  후한서 예전에도,

  “원삭 원년(B.C.128)에 예군(穢君 : 예왕) 남려(南閭) 등이 우거(필자주 : 위만조선의 3대왕)를 배반하고 28만구를 이끌고 요동(遼東 : 요동군)으로 내속하였으므로 한()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 : 滄海郡)으로 만들었다가 수년 후에 폐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후한서 부여국전을 보면,

  “부여국(필자주 : 동부여를 말함)은 현토(필자주 : 요동군의 서북쪽으로 옮긴 현토군을 말한다)의 북쪽 1천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숙신, 물길, 말갈), 서쪽은 선비와 접하였고,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그 땅이 2천리인데 본래는 예()의 땅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한 삼국지 부여전에도,

  “그 나라 노인들은 자기들이 옛날에 다른 곳으로부터 망명해온 사람들이라 한다” “그 나라의 옥새에 예왕지인(濊王之印)이란 글자가 있고, 나라 가운데에 예성(濊城)이라 부르는 옛 성이 있으니 아마 이곳이 본래는 예()의 땅이었으나 부여(동부여)가 그곳을 차지하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자기들 스스로 망명해 온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원래의 예국(濊國)이 그 땅을 동부여에게 빼앗겼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삼국지 예전을 보면,

  “예는 남쪽으로는 진한, 북쪽으로는 고구려, 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았다. 지금 조선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백성이 2만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기록들을 비교해 보면, 원래의 예()가 고구려와 현토군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비해, 후일의 (동예)는 조선 동쪽, 고구려, 옥저(동옥저)의 남쪽, 진한의 북쪽으로 나타나 그 위치가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강릉대도호부 건치연혁을 보면,

  “본래 예국(일운 鐵國, 일운 蘂國)이다. () 무제가 원봉2년에 장수를 보내 우거를 토벌하고 4군을 정했을 때 임둔(臨屯)이 되었다. 고구려에서는 하서량(일운 하슬라주)이라 불렀고, 신라 선덕여왕 때는 소경(小京)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군명(郡名)을 보면, 강릉지역을 예국, 임둔, 하슬라, 하서량, 명주..........”등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강릉이 본래부터 예국이었다는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강릉은 한사군 중 임둔군이었다가 소제 시원 5년인 기원전 82년경에 이르러서야 동예가 되었다. 임둔군 바로 이전에는 임둔국이었을 것인데, 그 이전에 鐵國(철국)이었는지, 蘂國(예국)이었는지는 아직 잘 알 수 없다.

 

  이를 보면, 김부식을 비롯한 삼국사기 찬자들은 예()가 원래 그들이 살던 땅을 동부여에게 빼앗기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임둔군 땅을 빼앗아 차지하고는 다시 예(동예)를 재건했음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지금 역사학자라는 사람들도 삼국사기 찬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필자가 그린 위 각 국의 위치와 사서의 기록들을 비교해 보면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려로부터 그 이전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사는 대륙역사였지 반도역사가 아니었다. 이것이 역사적 진실이었다.

  따라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우리 상고사와 고대사를 해석하려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인 것이다.

  생각을 바꾸지 않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한 천년이 지나도 우리 상고사와 고대사의 진실은 절대로 밝힐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참고]

 

 

규원사화 단군왕검 조를 보면, “이때 단군의 교화가 두루 미치게 되어 북쪽으로는 대황(大荒)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알유(猰貐)를 거느리고, 남쪽으로는 해대(海岱)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창해(蒼海? 대해의 오기일 것이다)에 닿았다............천하의 땅을 나누어 공적에 따라 땅을 나누어 주었다.

  치우씨의 후손들에게는 남서쪽의 땅을 주었는데, 들이 넓고 바다와 하늘이 푸르러 남국(藍國)이라 하고..........

  신시씨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을 주니 산하가 웅장하고 풍기가 굳세어 오진국(傲侲國)  또는 숙신(肅愼)이라 했으며...........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동남쪽의 땅을 주었는데 산하가 아름답고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靑丘國)이라 하였다..........

  주인씨의 후손에게는 개마국(蓋馬國)을 주고, 여수기는 예()의 임금을 삼았다.

  부소, 부우 그리고 막내 부여에게는 모두 서쪽 땅을 주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왕검조선(고조선)이 지금의 북경(필자주 : 옛 요동이다) 동북쪽 일원에 위치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원래의 ()가 단군왕검 때 여수기에게 주어진 봉국이었고, 수천년의 오랜 역사를 이어온 나라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