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에서 발견된 문무왕릉비라는 것이 과연 신라 문무왕릉비일까? - 최초주장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기록되어 있는 “당신라문무왕릉잔비” 조를 보면, “國新羅文武王陵之碑(국신라문무왕릉지비)”라고 기록되어 있어, 학자들은 이 명문을 보고 이 비석이 신라 30대 문무왕릉비라고 해석한다.
이 문장을 “國 ∨ 新羅 ∨ 文武王陵之碑(국 신라 문무왕릉지비)”로 띄어 읽은 결과일 것인데, 그렇다면 여기에서 앞의 “國(국)”이 무슨 의미인지 매우 아리송해 진다.
하동 쌍계사에 있는 진감선사대공탑비명을 보면, “有唐新羅國故知異山雙谿寺 敎諡眞鑑禪師碑銘 幷書(유당신라국고지리산쌍계사 교시진감선사비명 병서)”라고 새겨져 있고, 조선 시대의 묘비에는 대개 "有明朝鮮國(유명조선국)"이라고 새겨져 있다.
☆ "有唐新羅國(유당신라국)", "有明朝鮮國(유명조선국)" 등에 대하여 당시 사대주의 사상 때문에 비석에 이렇게 새겼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이는 사대주의라기 보다는 "당나라가 있을 때의 신라국" "명나라가 있을 때의 조선국"이라는 의미로서 신라국이나 조선국의 존재시기를 중국과 비교하기 쉽게 표현하는 수사일 뿐 사대와는 무관하다.
우리도 옛날에 단기(檀紀) 몇년이라고 쓴 적이 있다.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운 기원전 2333년을 원년으로 햇수를 헤아리기 위해서였고, 지금은 서기(西紀)를 쓰고 있다. 예수가 태어난 해를 원년으로 삼아 햇수를 헤아리는 서양식 방식인데, 이 역시 시기를 명확히 하기 위한 것일 뿐 사대주의와는 무관하다.
따라서 경주에서 발견되었다는 문무왕릉비라는 것이 진짜 신라 30대 문무왕릉에 세워졌던 비석이었다면, 비문의 첫 머리에 “有唐新羅國文武王陵碑銘 幷書(유당신라국문무왕릉비명 병서)” 또는 생전에 문무왕이 당나라로부터 받았던 작위인 “鷄林州大都督左衛大將軍開府儀同三司上柱國新羅文武王陵碑銘 幷書(계림주대도독좌위대장군개부의동삼사상주국신라문무왕릉비명 병서)”라고 새겼어야 당시의 예법에 맞다.
그런데 경주에서 발견된 문무왕릉비라는 비편에는 그렇게 새기지 않고, “國新羅文武王陵之碑(국신라문무왕릉지비)”라고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을 “國 ∨ 新羅 ∨ 文武王陵之碑(국 신라 문무왕릉지비)”라고 띄어 읽지 말고 “國新 ∨ 羅文 ∨ 武王陵之碑(국신 라문 무왕릉지비)”로 띄어서 해석해 보면, “나라를 새롭게 하였고, 학문을 널리 펼쳤던 무왕의 능비”라는 해석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國新(국신)”이란 “나라를 새롭게 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고,
“羅文(라문)”이란 “학문을 널리 펼쳤다” “학문을 널리 권장했다” 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문 중에는 “十五代祖 星漢王(15대조 성한왕)”이라는 기록도 보이는데, 과연 신라 문무왕이 경주김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김알지의 15세손일 수 있을까?
또한 김알지는 나라를 건국한 인물도 아니고, 왕위에 오른 적도 없는데 과연 신라에서 그를 태조(太祖)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 "十五代祖 星漢王(십오대조 성한왕)"이라는 명문은 "二十五代祖 星漢王(이십오대조 성한왕)" 에서 "二(이)" 자가 탈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비문의 내용 중에 "당태종" "용삭 원년(A.D.661)" 등의 기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시 경주에서 발견된 흥덕왕릉비편이라는 것에서 “太祖星漢(태조성한)” ”二十四代孫(24대손)”이라는 명문도 발견되어 “성한왕(星漢王)”이라는 인물이 왕조를 개창한 건국시조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문무왕은 서기 626년에 출생하여 681년 7월 1일 56세의 나이로 죽었고, 김알지의 출생 시기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서기 65년으로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는 서기 60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김알지와 문무왕의 출생년도는 약 560년의 차이가 나므로 문무왕은 김알지의 22세손 또는 23세손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김알지가 문무왕의 15대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비편의 명문에 나타나는 “15대조 성한왕”이라는 인물이 경주김씨의 시조라는 김알지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말이 된다.
중국에서 왕망의 신(新)나라가 서기 23년경 멸망하고 후한이 세워지자 왕망의 신(新)나라에 적극 동조했던 흉노족인 투후 김일제의 후예인 김성(金星) 일파는 역적으로 몰려 잡히면 멸족 당할 위기에 처하자 대륙을 떠나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한반도 남부로 도망쳐 와서 다시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던 것으로 나타난다.
지금 한반도의 경주나 김해 등지에 조성되어 있는 대형 적석목곽분이 그 증거물이고, 그리하여 그곳에서 흉노문화의 유물들이 출토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김성(金星)이라는 사람이 바로 비문의 명문에 나타나는 성한왕(星漢王)으로 추정되는 인물인데, 그 15세손이라면 서기 400년경의 인물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 경주에서 발견되었다는 문무왕릉비의 주인공은 흉노족이 한반도로 도망쳐 와서 세운 왕국의 왕으로서, 나라를 새롭게 하였고, 학문도 널리 펼치다가 죽은 무왕(武王)의 능비로 볼 수 있는 것이지 신라 문무왕의 능비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우리의 신라는 원래 한반도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 속 신라는 발해 북쪽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에 도읍하고 천년왕조를 이은 나라였고, 신라의 왕들은 모두 그곳 서라벌(지금의 요녕성 금주시 일원)에서 살다 죽어 그 부근에 묻혔지 한사람도 한반도 경주에 묻힌 적이 없다.
따라서 지금 경주에 있는 대형 적석목곽분들은 모두 흉노족이 한반도 남부로 도망쳐 와서 세웠던 왕국의 왕릉들이지 신라 왕릉이 아닌 것이다.
한반도 경주에 진짜 신라 왕릉은 한 곳도 있을 수가 없다.
☆ 경주에서 발견된 흥덕왕릉비편이라는 곳에도 “太祖星漢(태조성한)”, “二十四代孫(24대손)”이라는 명문이 나타난다. 이를 보면 건국시조와 같은 의미인 태조(太祖)로 받들어지던 성한왕(星漢王)이라는 인물이 건국한 왕국이 최소한 600여년 이상 존속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해 지는데, 신라 흥덕왕은 826년에 왕위에 올라 836년 죽었다.
태조 성한왕이 그의 24대조라면 성한왕은 흥덕왕보다 약 600여년 전 인물이어야 한다. 따라서 역시 김알지는 성한왕이 될 수 없다. 경주에서 발견된 흥덕왕릉비라고 하는 것도 역시 신라 42대 흥덕왕릉비가 아니라 서기 600년대 흉노족 왕릉에 세워졌던 비편인 것이다. 그리고 필자의 주장대로 문무왕릉비라는 것이 성한왕의 15대손이 아니라 25대손의 왕릉에 세워졌던 비석이 맞다면, 이 흥덕왕릉비와 문무왕릉비의 주인공은 부자관계였을 가능성이 있다. 두 비는 600년대 후반경 세운 비석으로 생각되는데, 학자들이 뒤에 세운 것으로 보았던 흥덕왕릉비가 오히려 문무왕릉비보다 앞서 세운 비석일 가능성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