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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죽령 서북쪽 500리 땅은 죽령(竹嶺)과 철령(鐵嶺) 사이의 땅 - 최초주장

윤여동 2019. 5. 26. 19:04

윤여동설 - 죽령 서북쪽 500리 땅은 죽령(竹嶺)과 철령(鐵嶺) 사이의 땅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여왕 조를 보면,

  “11년임인(A.D.642) 가을7월 백제왕 의자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나라 서쪽 지방의 40여개 성을 쳐서 빼앗아 갔다.

  8월에 또 고구려와 함께 당항성(党項城)을 빼앗아 당 나라로 가는 길을 끊으려고 도모하므로 왕이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어 태종에게 급한 사정을 보고하였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大耶城)을 쳐서 함락시키니 도독 이찬 품석과 사지 죽죽, 용석 등이 이 싸움에서 죽었다.

  겨울에 왕이 백제를 쳐서 대야성 전투의 보복을 하고자 즉시 이찬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에 대야성이 패하자 도독 품석의 아내가 여기서 죽으니 이는 춘추의 딸[필자주 : 김춘추와 첫부인 보라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 고타소를 말하는 것이다]이었다. 춘추가 이 소식을 듣고는 기둥에 기대어 서서 온종일 눈도 깜짝하지 않고 사람과 물건이 앞을 지나도 알아보지 못하더니 얼마 후에야 말하기를 '어허! 대장부가 어찌 백제 하나 삼키지 못할 것인가?' 하고는 즉시 왕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원하옵건대 사명을 받들고 고구려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원수를 갚겠나이다'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고구려왕 고장(보장왕)이 본래 춘추의 명성을 들었으므로 군사로서 호위를 단단히 한 뒤에 그를 만났다. 춘추가 말하기를 '지금 백제가 무도하여 뱀과 돼지처럼 탐욕스럽고 흉포하게도 우리 국토를 침범하므로 우리 임금이 귀국의 군사를 얻어 치욕을 씻고자 이렇게 저를 보내어 대왕에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고구려왕이 말하기를 '죽령(竹嶺)은 본시 우리 땅이다. 네가 만일 죽령 서북쪽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어줄 수 있다'고 하였다. 춘추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제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군사를 비는 터에 대왕은 환란을 구원하여 이웃나라와 친선할 뜻은 없고 남의 나라 특사를 위협하여 땅을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니 저는 죽음을 각오 할 뿐 다른 것은 저의 능력 밖입니다' 하였다. 고장이 그의 말이 공손하지 않은데 화가 나서 별관에 가두어 버렸다.

  춘추가 몰래 사람을 시켜 본국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이 대장군 김유신을 시켜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달려갔다.

유신이 군사를 몰아 한강(漢江)을 건너 고구려의 남쪽 변경으로 들어가니 고구려왕이 듣고 춘추를 놓아 돌려보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삼국사기 열전 개소문 전을 보면,

  “신라가 당나라에 가서 말하기를 백제가 우리의 40여성을 탈취하고 다시 고구려와 군사를 연합하여 입조하는 길을 끊으려고 꾀하므로 저의 나라가 부득이 군사들을 출사시킬 수밖에 없는데, 엎드려 바라옵건대 천자의 군사로서 구원하여 주시옵소서하였다.

  이에 태종이 사농승 상리현장으로 하여금 조서를 가지고 가서 고구려 왕에게 명하기를 신라는 우리와 우의가 도타운 나라로서 조공하는 도리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고구려와 백제는 각각 군사를 거두어야 할 것이다. 만일 다시 신라를 친다면 내년에는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하였다.

  처음 현장이 고구려 국경에 들어갔을 때에는 개소문이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치기 시작하였는데, 왕이 그를 불러 돌아왔다.

  현장이 당나라 황제의 칙지를 전하니 소문이 말하기를 전일에 수나라 군사가 우리나라를 침략했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우리의 성읍 5백리를 빼앗아 갔다. 그 때로부터 원수로 지낸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만일 그들이 우리의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전쟁을 멈출 수가 없을 것이다하였다.

  현장이 말하기를 이미 지난 일을 왜 재론하는가? 지금의 요동은 본래 모두 중국의 군현이었으나 중국에서도 이를 말하지 않는데, 어찌 고구려가 기어코 옛 땅을 찾으려 한단 말인가?’ 하였으나 소문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현장이 돌아가서 사실대로 보고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개소문이 제 임금을 죽이고 제 대신들을 살육하였으며, 백성들을 못살게 할 뿐만 아니라 이제 또 나의 명에 따르지 않으니 그를 치지 않을 수 없다하고 다시 사신으로 장엄을 보내 타일렀으나 소문이 끝까지 조서를 받들지 않고 도리어 무기로서 장엄을 위협하니 장엄이 굴하지 않으므로 드디어 그를 굴 속에 가두었다.

  이에 태종이 대군을 동원하여 몸소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이 사실은 고구려본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소문이 건봉 원년(666년)에 이르러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수전쟁의 기회를 틈타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죽령 서북쪽 500리 땅을 탈취하여 경략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결국 이 죽령 서북쪽 500리 땅이 단초가 되어 당 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침공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