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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남평양(하평양)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 2019. 8. 3. 12:53

윤여동설 - 고구려 남평양(하평양)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삼국사기 권제37 잡지 제6 지리 백제 조를 보면,

  “온조가 전한 성제 홍가 3(B.C.18) 계묘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慰禮城)으로 가서 도읍을 세우고 왕을 칭했으며, (다시 도읍을 남한성으로 옮겼는데) 389년을 지나 13대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 고구려 남평양(南平壤)을 빼앗고 한성(漢城)에 도읍하여 105년을 지냈으며, 22대 문주왕 때에 이르러 도읍을 웅천(웅진성)으로 옮겨 63년을 지냈고, 26대 성왕 때에 이르러 도읍을 소부리(사비성)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고, 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2년을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 근초고왕 때 백제가 남평양(필자주 : 호태왕 비문에는 하평양이라 하였다)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았음을 알게 하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6(A.D.371) 조를 보면,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한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니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힘을 다하여 항전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으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도읍을 한산(한성)으로 옮겼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가 남평양(南平壤)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시기가 371년이었음을 알 수 있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원년(A.D.392) 조를 보면, "10월에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함락시켰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같은 책 백제본기 아신왕 2(A.D.393) 조를 보면, ”가을 8월 왕이 진무에게 말하기를 관미성은 우리나라 북쪽 변경의 요충인데, 그것이 지금 고구려의 소유로 되어 있다. 이를 과인이 통석(痛惜)하게 여기는 바이다’........“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관미성은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과 백제의 도읍 한성의 중간 지점쯤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호태왕비문 영락 6(A.D.396) 조를 보면, “영락 6년 병신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백제)을 토벌하였다........백잔주(필자주 : 백제 아신왕이다)가 태왕의 뜻에 불복하고 감히 나와 맞아 싸웠다. 왕이 노하여 아리수(필자주 : 한수)를 건너 빠르게 진군시켜 성에 육박하였다. 백잔병이 소굴로 돌아가므로 성을 포위했다. 백잔주가 곤경에 처해 남녀 1천명, 세포 1천필을 바치며 왕 앞에 무릎 꿇고 지금이후로 영원히 노객이 되어 따르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태왕이 은혜를 베풀어 용서하고 맹세한대로 앞으로 성의 있게 순종하는 지를 지켜보겠노라 하였다. 이때 58개성, 7백개촌, 장수와 백잔주의 동생 그리고 대신 10명을 얻었다. 개선하여 도읍으로 돌아왔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비문 영락 9(A.D.399) 조를 보면,

  “영락9년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왕이 하평양(下平壤 : 남평양)을 순수하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아뢰기를, 왜인이 그 나라의 국경에 많이 와서 성과 못을 파괴하고 백성들을 노비로 삼고 있으니 왕에게 귀의하여 명령을 청한다고 하였다. 왕이 은혜와 자비로서 그 충성심을 칭찬하고 특별히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밀계를 내렸다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고구려가 하평양(남평양)을 백제로부터 다시 탈환한 때가 영락 6년인 396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이때 호태왕은 비록 백제 아신왕으로부터 영원히 노객이 되어 따르겠습니다라는 맹세를 받아냈고 58개성과 7백개 촌 그리고 인질을 잡았지만 근초고왕이 371년에 남한성으로부터 옮긴 백제의 도읍 한성(漢城)은 빼앗지 않고 철군했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63(A.D.475) 조에 “9월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백제왕이 도읍한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그 왕 부여경(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왔다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한성은 371년부터 475년까지 백제의 도읍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곳 한성 부근의 면악 동남쪽은 후세 고려의 남경(南京)이 된다.

 

  그런데 399년에 호태왕이 하평양(남평양)을 순수하였다고 하였으니 남평양(하평양)이 한성(漢城)일리는 없는 것이다.

 

☆ 삼국사기 권35 잡지 제4 지리2를 보면, "한주(漢州)는 본래 고구려의 한산군을 신라가 빼앗은 것으로서  경덕왕이 한주로 개칭하였는바 지금의 광주(廣州)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한양군(漢陽郡)은 본래 고구려의 북한산군[평양이라고도 한다. 필자주 : 남평양의 오기인 듯하다]을 진흥왕이 주를 삼아 군주를 두었고,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 양주의 옛터(楊州舊墟)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남평양(하평양)은 고구려 평양성과 백제 한성의 중간 지점쯤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인데, 당시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을 말하는 것으로 밝혀졌고, 백제의 한성(漢城)은 하북성 도산(都山) 남쪽 초영자진(肖營子鎭) 부근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그 두 도읍의 중간 지점쯤에 위치한 지금의 하북성 승덕현(承德縣)”을 고구려의 남평양(하평양)으로 비정해 볼 수 있을 것인데, 공교롭게도 고구려의 평양성은 지금 하북성 승덕시(承德市)” 일원이고, 남평양(하평양)은 지금 하북성 승덕현(承德縣)”으로 비정되니 그곳에 승덕(承德)”이라는 동일한 지명을 붙인 것을 어찌 우연의 일치라고만 할 수 있을까?

  옛날 어떤 사람이 그곳이 평양성과 남평양이었음을 알고 같은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