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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시사 - 급진개혁으로 멸망한 왕망의 신(新)나라

윤여동 2019. 10. 1. 05:13

윤여동시사 - 급진개혁으로 멸망한 왕망의 신()나라 

 

  왕망은 전한을 멸망사카고, 신()나라를 건국한 후,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기존질서를 부정하고 각종 제도 모두를 바꾸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왕망의 신나라는 현실을 무시하고 너무도 무리하게 급진적으로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함으로써 민심이 떠나가게 되었고,

  호족들로부터도 배척받게 되어 결국은 몇 년 못가 멸망하고 말았다. 

  자, 그렇다면 과연 지금의 대한민국은? 

 

 

                                       [왕망 때의 화폐인 화천(貨泉) : 한반도에서도 많이 출토된다]

 

 

  신()나라를 세운 왕망의 급진적인 개혁 왕망의 신나라 개창

 

  왕망이 실권을 장악한 시기는 전한이 망국의 길로 접어들고 민심이 악화된 때였다.

  이에 반해 왕망은 솔선수범하여 자산을 내놓고 이재민을 돕는 등 백성의 인심을 얻어 명성이 날로 커졌고,

  마침내 스스로 황제가 되어 새 왕조 신(新)나라를 개창하기에 이른다.

  왕망은 전한의 사회 제도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토지개혁, 노비매매금지, 화폐개혁 등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개혁의 내용과 방법이 매우 급진적이고 현실성이 없어 사회를 더욱 혼란시켰고, 이는 신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왕망은 전한(前漢)11대 황제 원제(元帝, 재위 기원전 49~기원전 33)의 황후 왕씨의 조카이다.

  원제 사망 후 왕 황후의 아들 유오(劉鰲)가 제위에 올라 성제(成帝, 재위 기원전 32기원전 7)가 되자 황후는 황태후가 되었고, 그녀의 일족 왕씨는 외척으로서 조정의 중요한 직책을 차지하게 되었다.

  우선 황태후의 오빠 왕봉(王鳳)은 대사마장군에 임명되었고, 왕상(王商)과 왕근(王根) 10여 명의 일족들은 제후왕으로 봉해져 세력을 휘둘렀다.

  이러한 왕씨 일족이 휘두른 권세의 정점을 넘어 새 왕조 신()나라를 개창한 인물이 왕망(王莽)이었다.

  왕망의 어린 시절은 조정의 대권을 장악한 다른 외척 왕씨들과는 달리 불우했다.

  어려서 아버지 왕만(王曼)을 여의고, 형 왕영(王永)마저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사촌들과 달리 가난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는 유학 연구에 전념하고, 어머니와 형수를 돌보면서 검소하게 생활했으며, 주위와 숙부들에게 예의바르게 행동해 칭송을 들었다.

  특히 왕망은 백부 왕봉이 병이 들었을 때 그를 극진히 보살핌으로써 그의 신망을 얻었다.

  왕망은 기원전 33년에 왕봉의 추천으로 황문랑(黃門郞)이 되어 입관했다.

  그는 여전히 주위 사람들을 잘 관리하여 평판을 잃지 않았고, 순조롭게 승진하여 기원전 16년에는 봉읍(封邑) 1,500호를 영유하는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기원전 8, 드디어 숙부 왕근이 사직하자 왕씨 일족과 고모 황태후의 후원으로 불과 38세의 나이에 대사마 자리에 올랐다.

  왕씨 일가에서 다섯 번째 대사마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7, 성제가 죽고 애제(哀帝, 재위 기원전 7~기원전 1)가 즉위하자 그는 새롭게 일어난 외척 부씨와 정씨의 압박을 피해 신도로 떠났다. 그러나 그의 은퇴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왕망이 은퇴한 지 6년이 지났을 즈음 애제가 갑작스럽게 붕어하자, 태황태후가 된 왕씨가 그를 불러 대사마의 자리에 앉혔기 때문이다.

  애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이는 평제(平帝, 재위 기원전 1~기원후 6) 유간(劉衎)이었다.

  그리고 왕망은 자신의 딸을 평제와 결혼시켜 정식으로 국장이 되었고, 조정의 권세는 다시 외척 왕씨에게로 돌아갔다.

  왕망이 실권을 장악한 시기는 전한이 망국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때였다.

  당시 전한의 운명에 먹구름이 드리운 가장 큰 이유는 원제부터 평제까지 약 50년 동안 왕망과 같은 외척들이 발호하고, 귀족들의 토지 겸병이 가속화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귀족의 토지 겸병으로 인해 농민들이 노비 혹은 유민으로 전락하여 국가 재정 상태를 악화시켰으며, 치안 유지를 어렵게 했다.

  그런데 이렇게 전한 후기의 사회가 불안정하고, 민심이 악화된 때에 왕망은 태황태후 왕씨가 하사한 256만의 토지를 사양했다.

  게다가 전역에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극성을 부려 이재민이 발생하자 그는 솔선수범하여 자산을 출연했으며, 관민들도 동참시켜 이재민을 구제했다. 또한 유학을 연구한 사람답게 태학을 확장해 유학자와 인재들을 1만 명까지 늘리고, 유학을 장려해 백성의 인심을 얻었다.

  민심이 왕망을 향하자 공경대부, 박사, 제후 등 9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의 덕을 칭송하는 상소를 평제에게 올리기까지 했다.

  이로써 그의 명성은 날로 커졌다.

  한편 오래전부터 있던 참위설도 왕망의 명성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민간에는 '안한공(安漢公)인 왕망이 왕이 된다'라고 적힌 흰 돌이 무공현에서 발견되었다는 소문과 황지국(현재 베트남)에서 진상한 코뿔소가 성천자의 출현이 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는 얘기가 떠돌았다.

  5, 평제가 14살의 어린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다.

  왕망의 명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평제가 돌연사했기 때문에 평제의 죽음에 왕망이 간여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이는 확실하지 않다.

  공석이 된 황제의 자리에 왕망은 겨우 2살이었던 유영(劉嬰)을 앉히고, 자신은 서주 초에 주공이 어린 성왕을 섭정한 것을 빗대 가황제(假皇帝), 섭황제(攝皇帝)가 되었다. 왕망은 가황제로 황제와 다름없었으나 진정한 황제는 아니었다.

  이에 아직 민심을 잃지 않았던 왕망은 '가황제가 진짜 황제가 될 것이다', '한 고조 유방은 왕망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유언하셨다' 등의 공작을 통해 새로운 왕조 탄생 및 왕망의 황제 즉위 당위성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8, 왕망은 선양의 형식으로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며, ()이라는 국호를 버리고 신()이라는 새 왕조를 열었다.

  서기 8년에 개국한 왕망의 신나라는 그 역사가 15년으로 매우 짧다.

  신나라는 15년 동안 전한 사회의 제도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신나라의 개혁은 현실성 결여와 급진적인 진행으로 모두 실패했으며, 이는 결국 신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왕망은 전한 후기에 폐단을 일으켰던 귀족의 토지 겸병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토지 겸병에 대한 그의 생각은 한서에 잘 나타나 있다.

  진()나라는 무도하여 백성에게 세금을 무겁게 매겼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급급해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했다. 또한 주공의 제도를 파괴하고, 정전(井田)을 폐지했기 때문에 토지 겸병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위에 있는 자들은 가늠할 수 없는 양의 토지를 가지게 되었고, 힘없는 백성은 송곳조차 꽂을 만한 땅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왕망은 정전제를 부활시켜 전국의 토지를 왕전(王田)으로 규정하고, 개인 간의 토지 매매를 엄금했다.

  이를 왕전제라 일컬으며, 왕전제는 전국의 토지는 모두 국가가 주인이라는 전제하에 장정 8명 이하의 가구에 1, 900무까지 소유할 수 있도록 했다. 만약 그 이상일 경우 초과된 토지는 친족이나 마을에 토지가 없는 사람들에게 분급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왕전제는 시행 3년 만에 폐지되었다.

  토지 사유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던 당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 귀족과 대토지 소유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또한 관료들의 누적된 부패도 실패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와 함께 왕망은 노비 소유에 제한을 두었으며 매매를 금지시켰다. 또한 명칭도 사속(紗屬)으로 고쳤다. 하지만 노비는 토지 경작에 있어 핵심적인 노동력이었기 때문에 토지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만 했다. 왕망이 노비 매매를 법으로 금지시켰음에도 현실에서는 여전히 매매가 이루어졌으며, 토지 문제와 연관성이 큰 만큼 왕전제의 폐지와 함께 시행 3년 만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신나라 때는 오히려 노비가 급격히 늘어나 그 수가 10만에 가까웠는데, 이는 일반 백성이 법을 어겼을 경우 모두 노비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왕망은 경제에도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백성이 대상인과 고리대의 착취로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여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

  한 무제 이후로 사용이 정착된 오수전을 폐지하고, 대신 금, , , 거북, 조개, 베 등 무려 28종의 화폐를 제조, 발행했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화폐의 발행은 오히려 백성의 혼란을 초래했으며, 백성들은 익숙한 오수전을 계속 사용했다. 이에 왕망은 오수전을 사용하는 자들을 법으로 엄히 다스렸고, 이로써 백성의 상업 활동은 위축되었고 삶이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피폐해져만 갔다.

  그런데 이렇게 현실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신나라의 화폐 개혁은 15년간 다섯 번이나 실시되었다.

  또한 소금, , , 각종 자원 등을 국가가 전매해서 관리하여 물가를 조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또한 각지 호족의 이익과 상반되는 정책들로 호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이를 관리하는 관료들이 대상인으로 구성되면서, 재물이 관리 관료들에만 집중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왕망은 화폐 제도에도 개혁을 단행했다. , , 조개, 베 등 28종의 다양한 화폐를 제조했으나 이는 오히려 백성의 혼란을 초래했다.

  마지막으로 왕망은 모든 관직 및 군현의 명칭에 대해서도 개혁을 단행했다.

  유가 경전에 기초하여 주()의 정치제도를 본뜬 이상주의 국가를 실현하고자 했던 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이에 왕망은 주례에 따라 주 대의 3, 9, 27대부, 91원사에 맞추어 새로 관직을 만들었다.

  명칭 또한 대대적으로 수정하여 대사농(大司農)은 희화(羲和)와 납언(納言)으로, 소부(少府)는 공공(共工)으로, 태수(太守)는 대윤(大尹)으로, 현의 현령(縣令)과 현장(縣長)은 재()로 바꾸었다.

  또한 지금껏 왕으로 칭했던 주변국의 군주를 후()로 격하시켰으며, 흉노를 강노복자(降奴服子),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라고 불러 정세를 불안하게 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왕망은 신나라가 주나라를 본으로 삼은 유가적 이상 국가가 되길 원했다.

  따라서 그는 전한의 모든 제도와는 다른 새로운 체제를 완성하기 위해 많은 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왕망의 개혁은 전한의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는커녕 개혁의 내용과 방법이 매우 급진적이고 현실성 없어 사회를 더욱 혼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왕망의 실패한 개혁들은 초기의 명성과 민심을 잃게 했으며, 호족, 대상인 같은 지배층의 반감도 샀다.

  결국 왕망의 신나라는 백성 봉기와 각지 호족의 반란으로 건국 15년 만인 23년에 종말을 맞이했다.

[Daum백과] 왕망의 신나라 개창 중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홍문숙, 청아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