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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의 건국지 검증 - 최초공개

윤여동 2019. 10. 1. 05:58

윤여동설 - 백제의 건국지 검증 - 최초공개

 

 

 

 

 

 

 

백제의 시국처(건국지)는 발해 서북쪽

 

백제의 건국지에 대해서는 현재 여러 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첫째는 마한동북(馬韓東北) 건국설

둘째는 한산부근(漢山附近) 건국설

셋째는 대방고지(帶方故地) 건국설

넷째는 진번지간(辰番之間) 건국설

다섯째는 패대지간(浿帶之間) 건국설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여러 설 중에서 과연 어느 설이 옳고, 어느 설이 잘못 전해진 것일까?

 

 

 

  마한동북(馬韓東北) 건국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24(A.D.6) 조에, “가을7월 왕이 웅천에 목책을 세웠더니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어 책망하여 이르기를 왕이 처음으로 강을 건너와서 발붙일 곳이 없을 때에 내가 동북방 1백리 땅을 나누어 주어 살도록 하였으니 내가 왕을 대우한 것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은혜를 갚을 것을 생각하지는 못할망정 이제 나라가 완전해지고 자기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생각하여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함으로써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니 이것을 어찌 의리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였다는 마한왕이 말한 마한 동북쪽 1백리 땅이 백제의 건국지였다는 설이다.

  마한왕이 직접 말한 내용이기 때문에 매우 정확하다고 판단되는데, 실제 필자의 연구결과와도 일치한다.

  백제의 초기강역으로 기록되고 있는 북쪽의 패수(浿水), 남쪽의 웅천(熊川), 동쪽의 주양(走壤), 서쪽의 대해(大海)”라는 곳이 곧 마한 동북쪽에 해당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산부근(漢山附近) 건국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주몽이 북쪽의 부여(동부여)에서 낳은 아들(유리)이 와서 태자가 되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드디어 오간, 마려 등 열 명의 신하들과 함께 남쪽지방으로 떠나니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 이리하여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만한 곳을 살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대두된 설인데, 앞의 마한동북 건국설과 결부시켜보면, 마한 동북쪽에 위치한 한산, 북한산 부근에서 백제가 건국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역시 필자의 연구결과와 일치한다.

 

  대방고지(帶方故地) 건국설은,

  주서 백제전, 수서 백제전, 북사 백제전에 한결같이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가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비로소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 중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대두된 설인데, 백제의 건국자는 소서노의 두 아들이었던 비류왕과 온조왕 형제이지 구태가 아니고 백제는 대방고지에서 건국되지 않았다. 또한 구태란 인물은 5대 초고왕의 동생으로서 백제 차자파의 중시조로 추앙되는 인물이다. 그의 직계 후손으로는 8대 고이왕, 9대 책계왕, 10대 분서왕, 12대 계왕이 있고, 후세의 24대 동성왕 이후 백제의 왕들이 모두 이 구태의 후손이었다.

  그렇다면 중국 사서들은 왜 구태를 백제의 건국시조라고 기록했고, 백제가 대방 옛 땅에서 건국되었다고 기록했던 것일까?

  이는 백제에 장자파와 차자파 간에 왕위찬탈전이 전개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즉 후일 장자파인 13대 근초고왕과 차자파인 구태의 후예인 무광왕(12대 계왕의 아들)이 왕위찬탈전을 벌일 때 무광왕은 대방고지를 근거지로 삼았던 것으로 보이고, 근초고왕은 남한성을 근거지로 삼았는데, 결국에는 무광왕이 패하여 한반도의 지모밀지로 도망쳐 한반도에 다시 백제(반도백제)를 세웠었고, 후대에 이르러 이 무광왕의 반도백제가 대륙백제를 흡수통합 함으로써 24대 동성왕으로부터 백제의 왕위가 모두 이 (부여)구태의 후손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중국의 사관들이 그 내막을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구태를 백제의 건국시조로 잘못 기록했고, 백제의 건국지를 대방고지라고 잘못 기록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진번지간(辰番之間) 건국설은,

  이맥(李陌)의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가 오면 마땅히 태자로 봉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움이 없음을 염려하여 기묘년(B.C.42) 3월에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번지간(辰番之間)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산지 10년 만에.........반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그 땅을 기반으로 백제를 건국했다고 하였기 때문에 대두된 설인데,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백제는 마한의 동북쪽 변경이며, 옛 진번군의 남쪽 지역인 북한산, 한산 일원에서 건국되었다. 백제의 건국지를 진번지간이라 한 의미가 진()이 진한(辰韓)을 말하는 것이고, ()이 진번(眞番)을 말하는 것이라면 틀렸다고 할 수 있고, ()이 마한을 말하는 것이라면 옳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패대지간(浿帶之間) 건국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주에 일설에는 시조 비류왕은 그 아버지가 우태이고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로서 처음 우태에게 시집와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는 비류요, 차자는 온조였다. 우태가 죽은 뒤 졸본에 살았는데 그 후 주몽이 부여(동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전한 건소 2년 봄 2월에 남쪽지방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으며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왕비로 삼았다. 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개척하며 왕업을 창시함에 있어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많았으므로 주몽이 소서노를 특별한 사랑으로 후하게 대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소생과 같이 여겼었다.

  그런데 주몽이 부여에서 낳았던 예씨의 아들 유류(유리)가 오게 되매 그를 세워 태자로 삼았고 그 후 주몽의 뒤를 잇게 되었다.

  이때에 비류가 아우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께서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에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털어서 나라의 위업을 성취하도록 도와주었으니 어머니의 성력과 공로가 많았었다. 그런데 대왕이 세상을 떠나게 되고 나라가 유류에게 귀속되니 우리들이 여기에서 군더더기 살처럼 침울하게 지내기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지방으로 가서 좋은 땅을 선택하여 따로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겠다하고는 드디어 그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대두된 설인데, 사실 이 기록 속에는 패수와 대수 사이(패대지간)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지 않았고, 패수와 대수를 건넌 곳에 위치한 미추홀에서 살았다고 했으므로 백제가 패대지간(패수와 대수 사이)의 땅에서 건국되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 전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