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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낙양 동북 3,600리에 위치했던 고대의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일원이 확실하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19. 10. 5. 13:36

윤여동설 - 낙양 동북 3,600리에 위치했던 고대의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일원이 확실하다 - 최초주장 

 

 

  전한서 권28하 지리지 제8하를 보면,

 

  "상곡군(上谷郡)은 진()나라가 설치했다.(필자 주 : 사실은 진나라 이전의 춘추전국시대 연나라가 최초로 설치했다) 왕망은 삭조라 했는데 유주에 속했다. 36,008호이고, 인구는 117,762명이다. 15개현인데 저양(沮陽), 천상(泉上), (), 군도(軍都), 거용(居庸), 구무(구무), 이여(夷輿), (), 창평(昌平), 광녕(廣寧), 탁록(涿鹿), 저거(), (), 여기(女祁), 하락(下落)이다.

 

  어양군(漁陽郡)은 진()나라가 설치했다. 왕망은 통로라 했는데 유주에 속했다. 68,802호이고, 인구는 264,116명이다. 12개현인데 어양(漁陽), 호노(狐奴), (), 옹노(雍奴), 천주(泉州), 평곡(平谷), 안락(安樂), 제해(厗奚), 광평(獷平), 요양(要陽), 백단(白檀), 골염(滑鹽)이다.

 

  우북평군(右北平郡)은 진()나라가 설치했다. 왕망은 북순(北順)이라 했는데 유주에 속했다. 66,689호이고, 인구는 320,780명이다. 16개현인데 평강(平剛), 무종(無終), 석성(石成), 정릉(廷陵), 준미(俊靡), (), 서무(徐無), (), 토은(土垠), 백랑(白狼), 석양(夕陽), 창성(昌城), 려성(驪成), 광성(廣成), 취양(聚陽), 평명(平明)이다.

 

  요서군(遼西郡)은 진()나라가 설치했다. 유주에 속했다. 72,654호이고, 인구는 352,325명이다. 14현인데 차려(且慮), 해양(海陽), 신안평(新安平), 유성(柳城), 영지(令支: 고죽성이 있다), 비여(肥如), 빈종(賓從), 교려(交黎), 양락(陽樂), 호소(狐蘇), 도하(徒河), 문성(文成), 임투(臨渝), ()이다.

 

  요동군(遼東郡)은 진()나라가 설치했다. 유주에 속했다. 59,972호이고, 인구는 272,539명이다. 18현인데 양평(襄平), 신창(新昌), 무려(無慮), 망평(望平), (), 후성(候城), 요대(遼隊), 요양(遼陽), 험독(險瀆), 거취(居就), 고현(高顯), 안시(安市), 무차(武次), 평곽(平郭), 서안평(西安平), (), 번한(番汗), 답씨(沓氏)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후한서 지제23 군국5를 보면, 낙양으로부터 동북쪽으로, 어양군 2000, 우북평군 2300, 상곡군 3200, 요서군 3300, 요동군 3600, 현토군 4000, 낙랑군 5000리 떨어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라 때의 1()은 약 23cm에 해당한다고 한다.

아마 애초에 성인남자(어느 왕의 한뼘 길이?)의 한 뼘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10척은 2.3m, 100척은 23m, 1,000척은 230m가 된다.

()나라 때 1,000(230m)1리로 삼았다 하므로, 10리는 10,000척으로서 2.3km가 된다.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가까운 곳으로부터 어양군, 우북평군, 상곡군, 요서군, 요동군 순으로 5군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고, 또 현토군, 낙랑군 순으로 위치했을 것이다.

 

 

 

  또한 후한서에는 또 요동동쪽 1000여리에 고구려가 위치했고, 현토 북쪽 1000여리에는 부여국(동부여)이 위치했으며 또 부여(동부여)의 동북쪽 1000여리에는 말갈이 위치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송서 백제국전에는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 동쪽 1천여 리에 위치하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백제의 동쪽, 고구려의 동남쪽에 신라가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북경까지의 고속도로 거리는 약 800km쯤 되는데, ()나라 때의 10리인 2.3km를 적용하여 환산해 보면, 3500리쯤 된다.

  그런데 후한서에는 낙양에서 요동까지의 거리를 3600리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지금의 북경 부근이 한()나라 때의 요동군(遼東郡)임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요동군을 찾으면 그 부근 멀지 않은 곳에서 현토군을 찾을 수 있고,

  현토군을 찾으면 그 북쪽 1천여 리에서 동부여를 찾을 수 있으며,

  동부여를 찾으면 그 동북쪽 1천여 리에서 말갈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요동군을 찾으면 그 동쪽 1천여 리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찾을 수 있고, 고구려를 찾으면 왕검성, 평양성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남쪽에서 백제를, 고구려의 동남쪽에서 신라를 찾을 수 있고, 고구려의 동쪽에서 옥저(동옥저)와 예(동예)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사서들에는 부여(동부여)가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4000리에 위치한 현토군의 북쪽 1천여리쯤에 위치한다고 하였으므로 결국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동부여까지 5천리쯤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지금 낙양에서 태원, 대동, 장가구를 지나 동부여의 도읍으로 비정되는 내몽골 정람기까지 고속도로로 1,120km 정도의 거리이므로 한()때의 10리를 2.3km로 적용하여 환산하면 4,870리쯤이 되어 옛 도로의 굴곡지수를 감안하면 5천리라는 사서의 기록이 매우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말갈은 후한서에서 동부여의 동북쪽 1천여 리에 위치한다고 하였고, , 구당서에는 경사(장안)에서 동북쪽으로 6천여 리에 말갈이 위치한다고도 하였는데, 지금 동부여의 도읍으로 비정되는 정람기에서 동북쪽 1천리 방향은 대흥안령이다. 숙신, 읍루, 말갈, 여진의 중심 강역이 한반도 동북쪽 연해주가 아니라 지금의 대흥안령 부근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과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에 있는 피서산장(열하행궁)으로 비정되는데, 지금 북경에서 승덕시까지의 고속도로 거리가 230km쯤 된다. 10리를 2.3km로 환산하면 1000리쯤 되고, 백제의 남한성으로 비정되는 건창영까지도 약 240km정도가 되므로 역시 1000여리쯤 된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가 요동동쪽 1천여 리에 위치했다는 사서들의 기록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 태종이 645년에 고구려를 침공할 때 정주(定州)에서 출발하여 고구려를 향하여 오면서 도중에 위치한 갈석산(필자주 : 고대의 갈석산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에 있는 낭아산을 말한다)에 오르기도 하고, 고생 끝에 요택을 건너기도 하며, 요수(遼水 : 영정하)를 건너 요동성(북경)을 쳐서 함락시킨 후 평양성(승덕시 피서산장)을 향하여 진군하려 하였다.

  그런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위치하고 있던 안시성(安市城 : 발해진) 때문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안시성을 그대로 놓아두고 진군했다가는 고구려군이 보급로를 끊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당 태종은 반드시 그 안시성을 함락시키려고 안시성 동남쪽에 토산을 쌓아 함락을 시도했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군사를 되돌려 철군하고 말았고, 장안으로 돌아가서는 다시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고 유언하고 죽었다고 한다.

  위 그림은 지금의 북경을 낙양으로부터 3,600리 떨어져 있었다는 고대의 요동군으로 비정하고 요수, 안시성, 압록강, 살수, 패수, 평양성의 위치를 그린 것인데,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전쟁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모든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필자가 고대의 요동군이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던 것이고, 동부여는 내몽골 정람기 부근, 말갈은 대흥안령 부근임이 확실하다고 했던 것이며, 우리 상고사와 고대사의 중심 강역이 한반도가 아닌 북경 부근의 대륙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