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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 문무왕 생전의 모습은 실제 어땠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 2019. 11. 16. 06:54

윤여동설 - 신라 문무왕 생전의 모습은 실제 어땠을까? - 최초공개

 

[죽어 용이 되었다고 전해져 오는 신라 문무왕 생전의 모습 : 진황도 산해관 해신묘의 해신상]

 

 

 [산해관 노룡두 해신묘 전경]

 

 

  삼국을 통일하여 신라의 강역을 넓혔던 신라 문무왕의 생전의 모습은 실제 어떠했을까?

  신라 문무왕의 이름은 김법민으로서 아버지는 태종무열왕 김춘추이고, 어머니는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명왕후 김문희이다.

  626년에 김춘추의 장자로 태어나 태종무열왕 2(A.D.655)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660년에 김유신을 이끌고, 당나라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다.

  6616월에 그 아버지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668년에 이르러서는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681년 재위 2171일에 죽었는데, 문무왕은 죽기 전에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열흘 후에 시신을 문 밖 뜰에 내 놓고 서국(인도) 법식에 따라 불로써 태워 장사지내라하였으므로 그 유언에 따라 시신을 불에 태워 그 유골을 동해구 큰 돌 위(東海口大石上)에 장사지냈는데, 속설에 전하기를 왕이 용이 되었다고 하고, 그 돌을 대왕석(大王石)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 아들인 신문왕 김정명이 그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가에 감은사를 세웠다고 한다.[절에 있는 옛 기록에는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이 절을 창건했는데, 미처 끝내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자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A.D.682)에 공사를 끝냈다. 금당 뜰아래에 동쪽을 향하여 구멍을 하나 뜷어 두었는데, 용이 절에 들어와서 쉬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하고, 대개 유언에 따라 유골을 간직해 둔 곳은 대왕암(大王岩)이고, 절 이름은 감은사이며, 후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했다]라고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신라 문무왕을 장사지냈다는 동해 바닷가의 대왕석(대왕암)을 확실하게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우리 역사학자들이 원래 우리의 신라가 위치하고 있던 지금의 발해 바닷가가 아닌 한반도 동해 바닷가에서 문무왕의 능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신라는 원래 지금의 발해 북쪽 중국 요녕성 금주(錦州)에 도읍하고 천년 왕조를 이어온 나라였고, 그 북쪽, 북서쪽, 서쪽, 서남쪽으로 강역을 넓혀 지금의 중국 북경 동쪽 조백하까지 차지했었다. 그리고 고대의 왜국은 하북성 진황도에서 마주 보이는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신라의 문무왕은 서남쪽의 백제를 병합한 후 지금의 진황도 산해관 노룡두 바닷가에 절을 지어 불법의 힘으로 왜병의 침공을 진압하고자 하였던 듯한데, 미처 완공하지 못하고 죽게 되자 그 아들인 신문왕은 그 아버지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유골을 대왕석(대왕암) 즉 지금의 진황도 산해관 노룡두 바닷가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지내고, (감은사)을 완공시켜 그 아버지 문무왕의 능을 수호하고, 극락왕생을 비는 원찰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명했을 것이다.

 

  지금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진황도 산해관 노룡두 해변에는 해신묘(海神廟)”라는 유명하고 경치 좋은 사당이 있고, 그곳에 해신(海神)의 상()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진짜 우리 신라 문무왕의 유골을 동해구 큰 돌 위에 장사지냈다는 문무왕릉이다. 따라서 그곳의 해신상(海神像)은 죽어 용이 되었다는 신라 문무왕의 생전의 모습인 것이다.

  또한 노룡두 해변 가까이에는 절도 있는데, 바로 그 부근이 옛 감은사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한반도 경주 통일전에 있는 신라 문무왕 표준영정.

 무엇을 근거로 그렸을까? 운보가 문무왕의 초상화나 소상을 본 적도 없었을텐데.......]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 표준영정.

 신라왕들에게 흉노족왕국의 왕관을 씌워도 되는겨?                                        

 두 왕의 표준영정이 아주 비슷해서 헷갈리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하나의 밑그림으로 두 영정을 그린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