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한반도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은 가짜 소정방비 - 최초주장

윤여동 2019. 12. 14. 20:42

윤여동설 - 한반도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은 가짜 소정방비 - 최초주장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 예전에는 평제탑(平濟塔)이라고 불렀었다]

 

             

                                 [정림사지5층석탑에 새겨진 大唐平百濟國碑銘(대당평백제국비명) 명문]

 

 

 

      

                                  [현경 5년인 서기 660년 경신년 8월 15일에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공주목 부여현 고적 조를 보면,

반월성(半月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36척으로서 곧 옛 백제의 도성이다. 부소산을 안고 두 머리가 백마강에 닿았는데 그 형상이 반달 같기 때문에 반월성이라 이름한 것이다. 지금 현의 치소가 그 안에 있다.

소정방비(蘇定方碑) :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당나라 고종이 소정방을 보내어 신라의 김유신과 함께 백제를 쳐서 이를 멸망시키고 이곳에 돌을 세워 그 공적을 기록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 계백장군(階伯將軍)의 계백(階伯)이란 이름이 아니라 군사들의 우두머리란 의미로서 병관좌평(지금의 국방부장관에 해당) 바로 아래 직급인 달솔로서 지금의 참모총장 쯤에 해당하는 직위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계백장군의 실제 이름은 부여승(扶餘升)”으로서, 백제의 왕족이었으나 그의 신상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이름이 바뀌어 반월성을 부소산성이라 하고 있고, 돌을 세워 소정방의 공적을 기록했다는 소정방비인 대당평백제국비명이 새겨져 있는 곳은 비석형태가 아니라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이고, 또한 부소산성의 서쪽이 아닌 남쪽에 위치해 있어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어떻게 된 일일까?

  진짜 소정방비는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과는 별개로 부소산 서쪽에 비석형태로 따로 있었던 것일까?

  정림사지5층석탑을 언젠가 부소산의 서쪽으로부터 남쪽으로 장소를 옮겨 다시 세웠을까?

  아니면 후대 누군가가 불탑에 소정방의 공적을 새긴 가짜인가?

  어느 몰상식한 사람이 이렇듯 신성한 불탑의 사면에 불교와 관련도 없는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내용의 글씨를 빼곡히 새겨 놓았는지 매우 한심한 짓을 했다.

  그런데 지금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에 새겨져 있는 대당평백제국비명의 내용을 보면, 찬자인 능주장사 판병조 하수량이 비문의 맨 마지막에 이 보찰을 깎아 특별한 공을 기록하니 천관을 막아서 영원히 견고하고, 지축을 가로질러서 끝이 없기를 바란다라고 써 놓았는데,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소정방은 애초부터 불탑에 비문을 새길 목적을 가지고 이러한 비문을 짓게 했다는 말이 된다. 이리하여 지금 이 비문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별생각 없이 당나라의 소정방이 서기 660년에 서해바다를 건너 한반도 충남 부여까지 와서 백제를 멸망시킨 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현경5(A.D.660) 815(顯慶五年季歲在庚申八月己巳朔十五日癸未建)에 탑을 세우고 공적을 새겨 놓았다고 인식하게 되었을 것인데, 필자는 불교를 매우 숭상했던 당나라 때 소정방이 이러한 몰상식한 짓을 했을 리는 만무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만약 이러한 만행이 황제에게 보고되었다가는 당나라의 대장군이 부처를 능멸함으로써 국격을 손상시키고 황제의 치세를 욕보인 죄로 탄핵 당할 수도 있는데, 세상물정 훤히 꿰뚫고 있었을 소정방이 이런 위험천만하고 무모한 짓을 했을 리가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차라리 큰 돌을 구하여 네모반듯하게 다듬어 그곳에 공적을 새겨 세우면 탄핵당할 염려도 없고, 누가 뭐라고 할 리도 없으며, 작업하기에도 편하고, 보기에도 훨씬 좋다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부여 석조, 이곳에도 대당평백제국비명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대당평백제국비명은 정림사지5층석탑 뿐 만 아니라 자세히 보면 부여석조에도 동일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넓직한 면이 있는 곳곳에 비명을 새겼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러한 것들은 불교를 배척했던 조선시대에 이르러 누군가가, 어떠한 목적이 있어 이러한 졸렬한 짓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충남 부여에는 백제 멸망 시 참전했던 당나라 장수의 공을 기록한 유인원기공비라는 커다란 옛 비석도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부여현 고적조에는 소정방비에 대해서는 기록해 놓았으나 이 유인원기공비에 대한 기록은 없으니 매우 이상하고 헷갈린다.

 

[지금 부여박물관에 서 있는 높이가 3m가 넘는 유인원기공비인데, 소정방도 공적을 새겨 비를 세웠다면 바로 이러한 형태의 비석을 세웠을 것이다]

 

 

[번역문]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당 현경(顯慶) 5(A.D.660) 815일 세우고, 하남 낙주(洛州)의 권회소(權懷素)가 쓰다.

 

대저 천자(天子)가 만국(萬國)에게서 조회를 받고 백령(百靈)을 지배하는 까닭은 해외(海外)맑게 해서 천유(天維)를 일으키고 환중(寰中)에 자리를 잡아서 지락(地絡)을 넓힘으로써, 칠덕(七德)을 드날려 먼 오랑캐의 땅을 어거하고 오병(五兵)을 빛내 변방을 고요하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비록 질()과 문()이 궤()를 달리하고, 걷는 것과 달리는 것이 길을 달리한다 해도 읍양(揖讓)의 전쟁에 대해서와, 수종(受終)의 혁명(革命)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전쟁과 혁명은) 모두 헛되이 뛰어난 무용(武勇)만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요, 훌륭한 병사를 거두지 않는 것이다. 이것으로 흉수(汹水)에서 재앙을 당기다가 구영(九嬰)이 마침내 주륙되고, 동정호(洞庭湖)에서 역모를 꾀하다가 삼묘(三苗)가 이미 주륙되었음을 알겠다. 이에 천년을 본보기로 삼고 천착하며, 만고(萬古)를 생각하니 출세해서 한나라를 대신하고, 사마(司馬) 벼슬을 맡아 조정을 계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은 착문(鑿門 : 문 뚫는 것 ?)을 중히 여기고 예()는 추곡(推轂)을 높이 여기기도 하니 마복파(馬伏波)는 교지(交阯())에서 동()을 주조하고 두거기(竇車騎)는 연연(燕然)에서 돌에 (공을) 새겼으나 끝내 제해(鯷海)의 분경(奔鯨)을 뒤집어 엎거나 낭산(狼山)의 봉시(封豕)를 끊어버릴 수는 없었다. 하물며 산의 나무가 다 닳아 없어지고 소리 지르던 사슴이 고요해지며 단정(丹鼎)도 전해지지 않고 방서(方書)도 기록되지 않음에랴!

준동하는 이 오랑캐들이 도주(島洲 : )에서 목숨을 훔치며, 요해처에 있는 구이(九夷)는 만리에 뚝 떨어져 있어서 이 지세가 험함을 믿고 감히 천륜(天倫)을 어지럽혀 동쪽으로는 가까운 이웃을 쳐서 가까이 중국의 (밝은) 조칙(詔勅)을 어기며, 북쪽으로는 역수(逆豎)와 연계되어 멀리 효성(梟聲)에 응한다. 하물며 밖으로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안으로 요망한 계집을 믿어 오직 충성되고 어진 사람한테만 형벌이 미치며 아첨하고 간사한 사람이 먼저 총애와 신임을 받아 표매(標梅)에 원망을 품고 저축(杼軸)에 슬픔을 머금는다.

우리 황제께서는 두 가지 것을() 체득해서 높은 자리에 있으시고 세 가지 일에 통달하신 것이 매우 뛰어나시며, 성현(聖賢)의 용모는 경사를 만들고 귀인(貴人)의 상()은 빛을 드날리셨다. 오서(五瑞)에 읍()하여서 백신(百神)을 조회하고, 만물을 신묘하게 해서 육변(六辯)을 꾀하여 서북쪽에서는 하늘의 기둥을 바르게 하고 동남쪽에서는 지뉴(地紐)를 돌리셨다.

대저 용도(龍圖)를 진열하고 봉기(鳳紀)를 모으며 금경(金鏡)을 매달고 옥촉(玉燭)을 가지런히 하셨도다. 학철(涸轍)에서 궁지에 몰린 고기를 빼내주고, 기울어진 새집에서 위태로운 새알을 건져 주시면서도 이 유민을 불쌍히 여기고 저 흉포한 무리를 분히 여겨 친히 조민벌죄(弔民罰罪)하지 않고 먼저 장군들에게 명하셨다.

사지절(使持節) 신구(神丘우이(嵎夷마한(馬韓웅진(熊津) 등 십사도(十四道) 대총관(大摠管) 우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상주국(上柱國) 형국공(邢國公) 소정방(蘇定方)은 증성(曾城)에서 여러 번 구함(構陷)을 당하고 위수(委水)에서 긴 파란을 일으켰으며, 뛰어난 계획은 무장(武帳)에서 맞추었고 빼어난 기개는 문창성(文昌星)에 나타냈으니 위곽(衛霍)을 능가하면서도 따라잡지 않으며, 팽한(彭韓)을 굽어보면서도 높게 여긴다. 조운(趙雲)은 일신(一身)의 담력으로 용맹이 삼군(三軍)의 으뜸이 되었고 관우(關羽)는 만인(萬人)을 대적할 만한 능력으로 명성이 백대(百代)에 떨쳤다. 자기 목숨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죽을 뜻을 가지고 유적(流鏑)을 무릅쓰면서도 더욱 더 견고해졌고 목숨을 가벼이 하고 의()를 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앞장을 섰어도 (마음을) 빼앗기 어려웠다. 마음은 빙경(氷鏡)에 드러나 있어 귀신도 그 형상을 감출 수 없고, 바탕은 송균(松筠)(절조 갖추기를) 힘써 바람과 서리도 그 색깔을 고칠 수 없었다. 사졸(士卒)을 길러 변방 오랑캐를 어루만짐에 이르러서는 사지(四知)를 삼가고 삼혹(三惑)을 제거하여, 빙천(氷泉)을 고요하게 해서 깨끗함을 드러내고 서리 맞은 잣나무를 품고서 정절을 굳게 하니 말하지 않아도 시경(詩經)·서경(書經)에 부합하고 행하지 않아도 법도(法度)에 들어맞는다.

흰 구름을 거느리고서 상쾌함을 함께 하고, 푸른 소나무와 더불어서 고고함을 다투면서도 멀리 앞사람을 생각하여 모두 덕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함이 있었다.

부대총관(副大摠管)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위장군(衛將軍) 상주국(上柱國) 하박공(下博公) 유백영(劉伯英)은 위로는 ▨▨▨ ▨▨풍운(風雲)으로 정치를 할 만한 재주를 가졌고 장상(將相)의 그릇을 품었다. 말은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고 행동은 군대의 법칙이 되었으며, 말씀()은 포백(布帛)을 따뜻하게 하고 향기는 연꽃과 난초의 향을 내었으며, 공적은 기상(旗常)드러나고 조리는 종률(鍾律)에 맞았다. 만년(晩年)의 절개보다 평생(平生)을 중히 여기고 짧은 시간보다 1척이나 되는 옥을 가벼이 여기며 매우 높은 공적도 항상 부족한 듯이 여겨 평책종책(平策縱策)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부대총관(副大摠管) 사지절(使持節) 농주제군사(隴州諸軍事) 농주자사(隴州刺史) 상주국(上柱國) 안이공(安夷公) 동보덕(董寶德)는 드날릴 것에 뜻을 두고 걸출함은 뛰어나게 설 것을 도모했으며, 재주는 삼략(三略)에 통하고 계책은 후()를 움직였다. ▨▨진매(眞梅)하여 능히 위()나라 군사로 하여금 목마름을 그치게 하고, 수고롭히지 않고도 솜옷을 채워 끝내 초()나라 병졸로 하여금 추위를 잊게 했다.

부대총관(副大摠管) 좌령군장군(佐領軍將軍) 김인문(金仁問)은 기량(氣量)이 온화하고 아담하며, 기국(器局)과 식견(識見)이 침착하고 굳세어서 소인배의 자잘한 행위는 없고 군자의 고매한 풍모만 있었으며, 그의 무()는 싸우지 않고도 드러났으며 문() 또한 부드럽고 원대했다.

행군장사(行軍長史) 중서사인(中書舍人) 양행의(梁行儀)는 구름 같은 머리꾸미개로 빼어남을 드러내고 해거울로 빛을 드날리며, 풍모는 진신(搢紳)보다 뛰어나고 도()는 아속(雅俗)을 빛내어 거울은 허곽(許郭)보다 맑고 덕망은 순배(荀裴)보다 중하였다. 분별 잘하는 것(辯箭)은 파도를 튀어 오르게 하여 배움의 바다에서 구류(九流)를 잡아당기고, 문장의 조리는 빼어남을 발하여 글 잘하는 사람에서 칠택(七澤)을 가리웠다. 태부(太傅)의 심오한 계책으로도 그의 말고삐 받드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였고 두진남(杜鎭南)의 원대한 계략으로도 그의 수레바퀴를 붙들 수 없었도다. 잠시 봉지(鳳池)에 있으면서(중서성(中書省)에 있으면서) (이번 원정을 도와) 경학(鯨壑)을 깨끗하게 하였다.

형국공(邢國公)은 비책(秘策)을 움직이고 용감하고 굳세게 행동하여, 음우(陰羽)는 언월(偃月)의 계획을 열고 양문(陽文)은 샛별의 기운을 머금었다. 용도(龍圖)와 표검(豹鈐)은 반드시 정원(情源)에 드러내고 현녀(玄女)와 황공(黃公)은 신용(神用)에 모두 모였다. 하물며 하늘 끝까지 개미처럼 모여들고 땅을 삥 둘러 벌떼처럼 날아드는 것이 단호(短狐)가 모래를 머금은 것과 유사하고 장사(長蛇)가 안개를 토해내는 것과 비슷하여 영()을 서로 합치면 시랑(豺狼)이 길에 꽉 차고 진()을 맺으면 효경(梟獍)이 산에 꽉 참에랴!

이 때문에 흉악한 무리들이 이 궁벽지고 험한 곳을 지키고서는 매달린 줄이 장차 끊어져서 대단히 무겁게 떨어지고, 쌓아올린 바둑돌이 먼저 위태로워 구정(九鼎)으로 누르게 될 줄은 알지 못한다. 이때 가을 풀이 시들어 가을 산이 맑아지고 서늘한 바람이 일어 추운 기운이 심해지며, 빠른 걸음과 재빨리 지나가는 번개가 다투어 날고 첩고(疊鼓)와 분뢰(奔雷)가 다투어 친다. (()에게 명하여 맨 뒤에 서게 하고 열결(列缺)에게 앞장서게 하며, 간사한 기운과 요망한 기운은 칼과 창으로 쓸어버리고 높은 담과 가파른 성가퀴는 충붕(衝棚)으로 부숴버린다.

좌장군(左將軍) 총관(摠管) 우둔위랑장(右屯衛郞將) 상주국(上柱國) 축아사(祝阿師)우일군총관(右一軍摠管) 사지절(使持節) 치주자사(淄州刺史) 상주국(上柱國) 우원사(于元嗣)지역은 관하(關河)를 차지하고 있고 재주는 문무(文武)를 아울렀으며 산서(山西)의 장엄한 기운을 끼고 기북(冀北)의 뜬 구름을 타고서 호흡을 하면 강과 바다가 파도를 멈추고 소리 내어 꾸짖으면 바람과 천둥이 소리를 끊는다.

우이도부총관(嵎夷道副摠管) 우무후(右武候) 중랑장(中郞將) 상주국(上柱國) 조계숙(曺繼叔)오랫동안 정치에 참여하여 일찍이 어렵고 험한 것을 맛본 것이 염파(廉頗)의 강반(强飯)과 다르고 나라를 위해 일하는 늙은 신하와 같다.

행군장사(行軍長史) 기주사마(岐州司馬) 두상(杜爽)은 바탕은 아름다운 봉우리를 빛내고 향기는 계수나무 밭에 흐른다. 바람을 따르고 번개를 밟아 서해(西海)에서 뛰어난 말을 달리며, 구름을 밀치고 물을 쳐 남해(南海)에서 굳센 깃촉을 잡으니 기족(驥足)이 이미 펴져서 봉지(鳳池 : 중서성 재상)를 가히 빼앗을 만하다.

우일군총관(右一軍摠管) 선위장군(宣威將軍) 행좌효위랑장(行左驍衛郞將) 상주국(上柱國) 유인원(劉仁願)은 효성을 바탕삼아 충성을 하고 집에서 비롯해서 나라를 이루어 일찌기 주공(周孔)의 가르침을 듣고, 나중에는 손오(孫吳)의 책을 익혔으며 이미 영용(英勇)한 재주를 띠고 아울러 문리(文吏)의 도()를 겸하였다.

형국공(邢國公)은 성지(聖旨)를 받들어 따르고 반조(斑條)를 위임받아 금()이 조와 같이 많아도 엿보지 않고 말이 양과 같이 순해도 조용하지 않게 하고자 했다.

우무위중랑장(右武衛中郞將) 김양도(金良圖), 좌일군총관(左一軍摠管) 사지절(使持節) 기주자사(沂州刺史) 상주국(上柱國) 마연경(馬延卿)은 모두 굳은 마음을 품고 각기 맹위를 떨치고자 힘써 삼하(三河)의 굳센 군사를 끼고 육군(六郡)의 지체 있는 집안을 거느렸다.

형국공(邢國公)은 위로 뛰어난 계략을 받들고 아래로 절도(節度)를 오로지 하여 혹은 중권(中權)으로 군대를 함락시키기도 하고 혹은 후경(後勁)으로 선봉이 되게 해서 하늘에서 솟아나고 땅으로 꺼지는 기이함으로 천번 만번 변화하며, 멀리까지 이르고 깊은 데까지 끌어당기는 기묘함으로 번개같이 일어나고 바람처럼 가서 성기(星紀)가 미처 옮겨지기도 전에 훌륭한 명성이 길에 가득 찼다.

형국공(邢國公)은 인()은 전선(轉扇)과 같고 은혜는 투료(投醪)보다 심하여 명을 거스르는 자는 추상(秋霜)과 같은 위엄으로 숙청하고, 귀순하는 자는 춘로(春露)와 같은 은택으로 적셔 주었다. 한 번 군대를 일으켜 구종(九種)을 평정하고 두 번 승전해서 삼한(三韓)을 평정하여 유홍(劉弘)의 간단한 글을 내리니 천성이 덕을 우러르고 노련(魯連)의 비전(飛箭)을 쏘니 만리(萬里)가 은혜를 머금었다.

그 왕() 부여의자(扶餘義慈) 및 태자(太子) () 이외 왕자(王子) () () 13인은 대수령(大首領) 대좌평(大佐平) 사탁천복(沙吒千福), 국변성(國辯成) 이하 700여 인과 함께 이미 궁궐에 들어가 있다가 모두 사로잡히니 말가죽을 버리게 하고 우거(牛車)에 실어다가 잠시 있다가 사훈(司勳)에 올리고 이에 청묘(淸廟)에 드렸다. 인하여 이 사나운 풍습을 바꾸어서 현묘한 꾀에 젖게끔 하였으니 면류관을 벗고 휘장을 걷음에는 먼저 충성되고 정성된 사람을 택하고, 생선을 삶고 비단을 만듦에는 반드시 현량한 사람을 선택해야 거의 부부(剖符)로 하여금 공적이 공황(龔黃)보다 뛰어나고 명현(鳴絃)으로 하여금 이름이 탁로(卓魯)보다 높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릇 5도독(都督) 37() 250()을 두고 호() 24, 620만을 각각 편호(編戶)로 정리하여 모두 오랑캐의 풍속을 바꾸게 했다.

대저 동관(東觀)에 기록하고 남궁(南宮)에 기록하는 것은 그 선행을 드러내기 위함이요, 이정(彛鼎)에 새기고 경종(景鍾)에 새기는 것은 그 공()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능주장사(陵州長史) 판병조(判兵曹) 하수량 (賀遂亮)이 외람되이 용렬한 재주를 가지고 잘못 문한(文翰)을 맡아 배움은 조두(俎豆)를 가벼이 여기고 기운은 풍운(風雲)을 중히 여기면서도 직책은 장군(將軍)이라 불리워 염파(廉頗)의 열()에 들기를 원하고 벼슬은 박사(博士)라 칭해져 가의(賈誼)와 함께 우열을 다투기를 바란다. 쇠약한 용모라 하지 않고 오히려 장엄한 절개를 품어 해외(海外)에서 무기를 들고 근소한 것이라도 본받기를 바라고, 여섯 번 적정(敵庭)에 실려 가고 아홉 번 달아나다가 잡혀 궁벽해서 돌아와 설 때도 뜻은 거중(居中)하고자 한다. 이에 남은 할 말을 안하고 삼가 직필을 휘둘러 다만 성사된 일만을 쓰고 부화(浮華)는 취하지 않아 저 바다가 변하여 뽕밭이 되어도 천지가 영구한 것과 같이 하고 모래톱이 우거진 섬으로 바뀌어도 일월(日月)과 더불어 길이 매달리게 하고자 한다.

그 명()에 이르기를,

아득히 먼 옛날, 아득한 그 처음에 인륜(人倫)은 아직 혼돈하여 어두웠으나 천지자연의 이치는 비롯되었다. 겨울에 보금자리를 지었다가 여름에는 방랑하며 껍질을 숨기고 순거(鶉居)하여 (집을) 맺기도 하고 새기기도 하며, 혹은 사냥, 혹은 고기잡이도 하니 청정한 근원이 이미 지나갔고 큰 도()가 빠져 없어졌다.

이에 삼황오제(三皇五帝)에 미쳐 대대로 한 주인이 아니어서 선양(禪讓)을 한 것은 당요(唐堯), 우순(虞舜)이요, 혁명(革命)을 한 것은 탕왕(湯王무왕(武王)이니 위로는 칠정(七政)을 가지런히 하고 아래로는 九州를 고르게 하며, 여러 번 무기를 소란케 하여 이에 천하를 맑게 하였으되 아직 서액(西掖)을 적시지도 못했으니 어찌 동호(東戶)에 미치겠는가?

! 우리 황제께서는 도()가 궁창(穹蒼)에 화합하고 영예(榮譽)는 천고에 거울이 되어 뭇왕을 통합하니 멀고 먼 변방과 아득히 먼 대황(大荒)이 모두 정삭(正朔)을 품부받고 아울러 봉강(封疆)에 참예하였다. 준동하는 이 구종(九種)이 홀로 삼광(三光)을 막아놓고서 은혜를 베푼 나라에 배반을 하고 수향(水鄕)을 침범하니 하늘이 비장(飛將)을 내리고 표범이 읍양(揖讓)을 성하게 하며 활은 달그림자를 머금고 칼은 별빛을 움직인다.

용맹스런 군대 백만이 번개처럼 일어나고 바람같이 드날려 앞에서는 반목(蟠木)을 베다가도, 물러나서는 부상(扶桑)을 베어버리며 얼음은 여름해에 녹여버리고 잎은 가을서리에 부서지게 한다. 굳센 오영(五營)과 밝고 밝은 삼령(三令)으로, 우러러서는 묘략(廟略)을 펴고 굽어서는 군정(軍政)을 가지런히 하여 바람은 풀잎이 시들 때보다 엄하고 태양은 강물이 맑을 때보다 차도다. 서리같이 매서운 창은 밤에 움직이고 구름그린 깃발은 새벽에 빛나 재잘거리며 전군(前軍)을 찌르고 큰소리치며 후비(後備)의 정병(精兵)을 잡아당기니 크고 교활한 놈이 머리를 바치고, 체포되어 주살될 놈이 목숨을 청한다.

위엄과 은혜가 ▨▨하여 변방 모퉁이가 이미 평정되고 아름다운 나무가 베어지지 않아 임금의 은혜를 읊고 화대(花臺)가 달을 바라보니 패전(貝殿)이 공중에 떠있고 그림을 새긴 종()이 밤에 울리니 맑고 맑은 깨끗함이 새벽에 통한다.

이 보찰(寶刹)을 깎아 특별한 공을 기록하니 천관(天關)을 막아서 영원히 견고하고 지축(地軸)을 가로질러서 끝이 없기를 바란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