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백제의 웅천(熊川)과 웅진(熊津)의 지명 유래와 곰의 형상 - 최초공개

윤여동 2020. 2. 8. 04:06

윤여동설 - 백제의 웅천(熊川)과 웅진(熊津)의 지명 유래와 곰의 형상 - 최초공개 

 

[옛 웅진성으로 비정되는 진황도 노룡고성 서문]

 

[하북성 진황도 노룡현 부근의 지형 확대 : 한 마리의 곰 형상으로 보이시나요?]

 

 

 

 

 

백제의 웅천(熊川)은 지금의 하북성 청룡하(靑龍河), 웅진(熊津)은 진황도 노룡(盧龍) 

 

  백제 온조왕이 나라를 세우고 비류백제의 땅을 통합한 후 마한과 경계를 정할 때의 초기 강역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되어 전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B.C.6)조를 보면,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리고, 나라의 영역을 획정하니, 북(필자주 : 서쪽의 오기이다)으로는 패하(浿河 : 패수)에 이르렀고(北至浿河), 남쪽(필자주 : 동쪽의 오기이다)으로는 웅천(熊川)으로 한정했으며(南限熊川), 서쪽(필자주 : 남쪽의 오기이다)으로는 대해(大海)로 막혔고(西窮大海), 동쪽(필자주 : 북쪽의 오기이다)으로는 주양(走壤)이 끝이었다(東極走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백제 온조왕이 동쪽으로 웅천(熊川)까지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는데, 찾고 보니 웅천(熊川)은 지금 한반도의 금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북성 청룡하(靑龍河)를 말하는 것이었고, 백제의 도읍지 웅진(熊津)은 하북성 노룡(盧龍)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필자는 백제시대에 왜 이 강을 하필이면 곰[]과 연관시켜 웅천(熊川)이라 불렀는지 매우 궁금했었다.

   웅진(熊津)이야 웅천(熊川)을 건너는 나루라는 의미일 것이니 웅천이라 불리운 이유만 알면 웅진은 자연스레 풀리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었고, 다만 지금 한반도 충남 공주에 전해 내려오는 곰나루(또는 고마나루) 전설에 따라 신빙성은 없는 그렇고 그런 정도의 옛날이야기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륙백제의 옛 웅진(熊津)인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 노룡(盧龍) 부근에 혹시 곰[]과 관련 있는 어떠한 단서라도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 찾고 또 찾다가, 노룡 부근의 지형이 곰의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하! 이래서 곰[]과 연관시켜 웅천(熊川)이라 하였고, 웅천을 건너는 나루라 하여 웅진(熊津)이라는 지명이 생겨났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여러분들 눈에도 위 진황도 노룡 부근의 지형이 한 마리의 곰 형상으로 보이시나요?

 

[참고]

☆ 한반도 공주에 전해지고 있는 곰나루 전설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 일대에 전해 내려오는 곰나루의 지명 이야기이자 인간과 동물의 결연 이야기.

[개설]

「곰나루 전설」은 곰나루 지명을 구체적인 증거물로 제시하고 있는 지명 전설이자 인간과 곰이 결연하는 이물교혼담(異物交婚譚)이다.

공주시에서 서북쪽으로 십리 정도 가면, 공주를 싸고도는 금강 기슭에 곰나루라고 하는 나루터가 나온다. 이를 ‘고마나루터’, ‘웅진’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유형으로는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산학리의 「목거리 전설」이 있다.

[채록/수집상황]

1992년에 공주시·공주문화원에서 간행한 『공주의 맥』과 역시 같은 해 공주문화원에서 간행한 『공주민속』에 실려 있다. 전자에는 수집 상황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후자는 1965년에 발행된 『충청남도지』에서 옮겨놓은 것이다.

 

[내용]

아득한 옛날 지금의 곰나루 근처 연미산(燕尾山)에 큰 굴이 있었다.

이 굴에는 커다란 암 곰이 한 마리 살았다.

어느 날 잘생긴 사내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를 물어다 굴속에 가두었다.

곰은 사내를 굴에 가둬 놓고 숲으로 사냥을 나갔다. 그리고 짐승을 잡으면 굴속으로 가져와 사내와 함께 먹었다.

곰과 함께 굴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사내는 기회를 보아 도망치려 하였다.

하지만 곰이 밖으로 나갈 때에는 바위로 굴 입구를 막아놓아 하릴없이 굴속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이렇게 하루 이틀을 지나서 어느덧 이 년 동안 곰과 함께 살게 되자 사내는 곰과 정을 나누게 되고, 그 결과 곰이 새끼를 낳았다.

그로부터 또 일 년이 되어 둘째를 낳자 곰은 사내를 믿기 시작하였다.

사내가 새끼들과 어울려 즐겁게 노는 것을 보면서 더더욱 사내에 대한 믿음이 쌓여갔다.

그 날도 곰이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곰은 전과 달리 굴 입구를 막지 않았다. 자식이 둘이나 되는데 설마 도망가랴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사냥터에서 한참 사냥을 하고 있는데 멀리 사내가 강변 쪽으로 도망가는 것이 보였다.

곰은 서둘러 굴로 돌아와 두 새끼를 데리고 강변으로 달려갔다.

사내는 이미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곰은 강가에 다다라 사내를 향하여 돌아오라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사내는 곰의 애원을 외면하고 강을 건넜고, 그것을 보고 있던 곰은 새끼들과 함께 강물에 빠져 죽었다.

이후로 사람들은 사내가 건너온 나루를 고마나루 또는 곰나루[熊津]라고 불렀다 한다.

[디지털공주문화대전 곰나루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