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신라 서라벌의 왕성(王城)을 찾아라 - 최초주장
[신라의 천년도읍지 서라벌로 추정되는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이곳에 금성, 월성, 명활성 등 신라왕성이 있었을 것인데, 천년 세월과 함께 옛 흔적들은 거의 파괴되고 사라졌다]
한반도 경주는 신라의 도읍지인 서라벌이 아니다.
경주는 대륙의 장안(지금의 서안)에서 왕망의 신(新)나라에 적극 협조했다가 신나라가 후한 광무제에게 멸망당하고, 후한이 서자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도망쳐 와서 다시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던 흉노족인 투후 김일제의 후예인 성한왕(星漢王) 김성(金星)이 세운 왕국의 도읍지였다.
한반도 경주에서 출토된 비편들에 새겨진 “태조성한왕(太祖星漢王)”은 흉노족인 김성(金星)을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한반도 경주에 있는 대형 고총들은 신라왕릉들이 아니라 흉노족왕국의 왕들이 죽어 묻힌 곳이다.
그리하여 한반도 경주의 고총들에서 유목민족인 흉노족의 문화 흔적들이 다수 출토되는 것이다.
우리의 신라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를 중심으로 천년왕국을 이었고, 그곳 금주시(錦州市)가 신라의 건국지이며, 도읍지인 서라벌이었다.
따라서 신라 왕성이었던 서라벌의 금성(金城), 월성(月城), 명활성(明活城) 등은 한반도 경주에서 찾으려고 할 일이 아니라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금성(金城)]
혁거세거서간 21년(B.C.37) 경성(京城)을 쌓고 이름을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성이 경주부의 동쪽 4리에 위치했고, 혁거세 때 흙으로 성을 쌓았으며, 둘레가 2,407척이라 하였다.
[월성(月城)]
5대 파사이사금 22년(A.D.101) 봄2월에 성을 쌓고 이름을 월성(月城)이라 하였다. 가을7월에 왕이 월성으로 옮겨 살았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월성이 경주부의 동남쪽 5리에 위치했고, 그 형태가 반달 같아서 월성이라 했고,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3,023척이라 하였다.
[명활성(明活城)]
20대 자비마립간 16년(A.D.473) 가을7월 명활성을 보수하였다. 18년(A.D.475) 봄 정월 왕이 명활성으로 옮겨 살았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18대 실성이사금 4년(A.D.405)조를 보면, “여름4월 왜병이 와서 명활성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명활성은 그 이전에 이미 축성되어 있었음은 알 수 있으나 정확히 언제 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눌지왕 15년(A.D.431)에 왜병이 이 명활성을 포위하였다가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갔다는 기록도 보이고, 진흥왕 15년(A.D.544)에 명활성을 수축하였다고 했으며, 진평왕 15년(A.D.593)에는 명활성을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3천보라 하였다.
그런데 이 명활성은 또 선덕여왕 때 비담과 염종 등이 이 성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김유신에게 평정당하기도 한 역사가 있고, 외적의 침공으로부터 도읍을 지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곳으로 생각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명활성이 월성의 동쪽에 위치했고,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7,818척이라 하였다. 돌로 쌓았으므로 매우 크고 웅장한 성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명활산이 경주부의 동쪽 11리에 위치한다고 하였는데, 경주부의 동북쪽 11리의 오기가 아닌가 싶다.
[월성(月城)]
21대 소지마립간 10년(A.D.488) 봄 정월 왕이 월성으로 옮겨 살았다.
명활성
[신라왕성 배치도]
경주부 동4리 금성
동
남
5 만월성
리
월성 명활성(?)
남산성
☆ 참고 : 만월성은 월성의 북쪽에 위치했고,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4,945척이라 하였고,
남산성은 월성의 남쪽에 위치했고,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7,544척이라 하였다.
이후의 신라왕들은 이 월성에서 살았던 듯한데, 경주부는 지금의 금주시 고탑구 부근, 금성은 능하구 일원으로 비정되고, 월성은 소릉하변에 위치한 동호삼림공원 부근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명활성은 명활산에 위치하여 외적의 침공으로부터 도읍인 서라벌을 보호하는 방어성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역사학자들조차 요녕성 금주시(錦州市)가 옛 신라의 서라벌이었음을 알지 못하고 있고, 그곳에는 옛 흔적들이 사라져버려 영화로웠을 옛 신라의 왕성이었던 금성, 월성, 명활성을 찾을 수가 없으니 이 안타까움을 무엇에 비해야 하며,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고탑구 부근의 성벽과 고탑 옛 사진(1932) : 9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듯 성벽이 건재했었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져 버렸고, 고탑 만은 수리되어 남아 있다]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고탑구 부근의 옛 시가지 사진(1932) : 지금은 사진 속 옛 시가지는 거의 모두 사라져버려 옛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왜 이렇듯 철저하게 파괴(재개발?)한 것일까? 중국은 그곳이 옛 신라의 서라벌이었던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요녕성 금주시 금주성(錦州城) 동문 옛 사진(1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