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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 경애왕(景哀王)이 묻힌 남산 해목령(蟹目嶺)의 진짜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 2020. 5. 10. 09:15

윤여동설 - 신라 경애왕(景哀王)이 묻힌 남산 해목령(蟹目嶺)의 진짜위치 - 최초공개 

 

 

   삼국사기 신라본기 55대 경애왕 4(A.D.927) 조를 보면,

   강주(康州) 산하 돌산[突山, 필자주 :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부근] 4개 고을이 태조(필자주 : 고려태조 왕건)에게로 귀순하였다.

   가을9월 견훤이 고울부(高鬱府)의 우리 군사들을 침공하므로 왕이 태조(왕건)에게 구원을 청하니 태조가 장수에게 명하여 강한 군사 1만으로서 구원하게 하였다.

   이 구원병이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견훤이 겨울 11월에 신라의 왕경을 습격하여 왔다. 이때 왕이 비빈종척(妃嬪宗戚)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베풀고 오락을 즐기고 있어 적병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가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필자주 : 이 기록은 논란이 많아 아직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적군이 쳐들어와서, 스스로 방어할 힘이 없어 고려에 청병을 해 놓았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인데  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이고 오락을 즐겼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왕이 왕비와 함께 급히 후궁으로 들어가고, 종척과 공경대부 그리고 남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숨었다. 적에게 붙잡힌 자들은 귀천을 불문하고 모두 당황하여 진땀을 흘리면서 벌벌 떨며 노복이 되겠다고 빌었으나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견훤은 또한 군사들을 풀어 놓아 재물들을 거의 다 약탈하고 대궐에 들어앉아서 측근자들로 하여금 왕을 찾도록 하였다. 왕은 비첩 몇 사람과 함께 후궁에 있다가 군영으로 잡혀갔다. (견훤이) 왕을 협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왕비를 강간하고 그의 부하들을 풀어 비첩들을 강간하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한반도 경주 포석정]

 

   56대 경순왕 조에는, ”전 임금의 시신을 운반하여 서당(西堂 : 서쪽대청)에 빈소를 차리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시호를 경애(景哀)라 하고 남산(南山) 해목령(蟹目嶺)에 장사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혼란했던 상황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런데 오늘은 경애왕이 그 급박한 때에 왜 왕궁이 아닌 포석정에 가 있었는지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죽어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는 남산(南山) 해목령(蟹目嶺)의 위치를 찾아보려고 한다.

   해목(蟹目)게의 눈을 말하는 것이므로 해목령(蟹目嶺)”이란 그 능선이 마치 게의 눈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일 것이다.

   그런데 옛 신라의 천년도읍지 서라벌은 한반도의 경주가 아니라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를 말하는 것이고, 그곳 남쪽에는 지금도 남산(南山)이라는 산이 있다.

 

☆ 한반도에도 해목령이 있지만, 이는 착각이 빚어낸 결과이다.

 

   따라서 진짜 해목령(蟹目嶺)은 바로 지금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의 남산(南山) 부근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아래 그림에 신라 해목령의 추정위치를 표시해 놓았는데, 그 부근의 지형이 마치 게()의 눈() 형태처럼 생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옛 사람들이 그곳을 해목령(蟹目嶺)이라 이름 붙였을 것이다.

 

 ☆ 해목령의 추정위치를 아래 그림에 표시해 두었는데,

   이 글을 읽으시는 분중에 현재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에 사시거나 그곳에 갈 기회가 있으신 분들께서는 필자가 주장하는 위치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해목령(蟹目嶺)을 정확히 찾으면 그곳에서 신라 55대 경애왕릉(景哀王陵)도 찾을 수 있고, 또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신라 포석정(鮑石亭)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신라의 서라벌도 찾을 수 있고, 천년왕국 신라의 원래위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며, 더 나아가면 백제, 신라, 삼한, 고조선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