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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강역 서쪽변경의 신성(新城)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선화고성(宣化古城)이 확실 - 최초공개

윤여동 2020. 5. 31. 21:03

윤여동설 - 고구려 강역 서쪽변경의 신성(新城)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선화고성(宣化古城)이 확실 - 최초공개 

 

 

  우리 고대역사에서 아직까지 그 위치를 확실하게 비정하지 못하고 있는 곳 중의 하나가 고구려 신성(新城)”이다.

  고구려의 동북쪽이라고도 하고, 북쪽이라고도 하고, 서쪽이라고도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성(新城)은 고구려 13대 서천왕(재위 : 270-292) 대에 이미 축성되어 있던 성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서천왕은 2764월에 신성으로 가서 무려 4개월이나 머무르며 사냥을 하기도 했고, 288년에는 4월부터 11월까지 무려 7개월간이나 그곳 신성에 머무르다가 평양성으로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성은 왕이 수개월을 머무르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을 정도로 크고 잘 갖추어져 있는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 14대 봉상왕도 293년에 모용외의 침공을 받고 신성(新城)으로 가서 적을 피하려고(필자주 : 이 기록은 좀 이상하다. 모용외의 침공을 받았는데 왜 신성으로 피신하려 했다고 기록되어 있을까? 혹시 이때 봉상왕이 당시 도읍이었던 평양성을 떠나 옛 도읍 국내 가까이 위치한 고구려 왕들의 사냥터 질산(質山)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곡림(鵠林)까지 갔는데, 모용외가 뒤 쫓아와 자칫했으면 모용외에게 사로잡힐 뻔 했는데, 신성성주인 고노자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왕을 구원하여 주어 그의 직위를 대형으로 올려주고 그에게 곡림(鵠林)을 식읍으로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따라서 후대인 16대 고국원왕 5(A.D.335)나라 북쪽에 신성을 쌓았다(築國北新城)”는 기록은 이때 신성(新城)이라는 성을 처음 쌓았다는 말이 아니라 나라(고구려)의 북쪽에 새로운 성을 쌓았다고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옛날부터 축성되어 있던 고구려의 신성(新城)”은 도대체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던 성일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9대 광개토왕 9(A.D.400)조를 보면, “봄 정월에 왕이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 연나라 임금 성(모용성)이 우리 왕의 예절이 거만하다 하여 스스로 군사 3만을 이끌고 습격하여 왔는데, 표기대장군 모용희를 선봉으로 하여 신성(新城), 남소성(南蘇城, 필자주 : 한원 고구려편에는 고구려기의 기록을 인용하여 남소성이 신성 북쪽 70리에 있다고 하였다) 두 성을 함락시키고 7백여 리의 땅을 넓혀서 자기들의 백성 5천여 호를 옮겨 놓고 돌아갔다. 11(A.D.402) 왕이 군사를 보내어 연나라의 수비군을 치니 연나라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고구려가 연나라에 신성과 남소성 등 7백여 리 땅을 빼앗겼다가 2년 후에 다시 탈환했음을 알 수 있고,

   645년 당 태종이 손수 군사들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의 기록을 보면, 이세적이 통정(通定)으로부터 요수(遼水)를 건너 현토(玄菟)를 지나 신성(新城)에 이르렀다고 하였고, 그 후 당나라군이 요동성(遼東城)을 공격하기 위해 요동성으로 집결하자 고구려에서도 신성(新城)과 국내성(國內城)의 보기병 4만을 보내 지원하게 되는데, 이를 보면 고구려 신성(新城)과 국내성(國內城)은 남소성, 현토성, 요동성과 가까이 위치한 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26(A.D.667) 조를 보면, “가을9월에 이적이 신성(新城)을 함락하여 설필하력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처음에 이적이 요수(遼水)를 건너와서 모든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신성(新城)은 고구려 서쪽 변경의 요충이기 때문에 이를 먼저 빼앗지 않으면 다른 성들을 쉽게 빼앗을 수 없다’하고는 드디어 신성(新城)을 치니 신성사람 사부구 등이 성주를 결박하여 가지고 성문으로 나와서 항복하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요수(遼水)를 건너면 바로 신성(新城)이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전쟁의 총지휘관이었던 이적이 직접 한 말이므로 이는 매우 신빙성 있는 기록이라 할 수 있어 신성(新城)은 고구려의 서쪽 변경에 위치했던 성이 확실할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열전 개소문 전을 보면, “남건이 남생의 아들 헌충을 죽였다. 남생이 달아나서 국내성(國內城)에 웅거하며 자기의 군사와 거란, 말갈의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에 붙어 아들 헌성을 시켜 자기의 처지를 하소연하니 당 고종이 헌성을 우무위장군으로 임명하고 말이 끄는 여(輿 : 왕이 타는 수레)와 서금보도(瑞錦寶刀)를 주어 돌아가 보고하게 하였다. 그리고 고종이 또 설필하력에게 조서를 내려 군사를 거느리고 남생을 구원하게 하였으므로 남생이 고구려에서 죽음을 면하였다.

   고종이 남생을 평양도행군대총관겸지절안무대사의 관직에 임명하였다. 남생이 가물성(哥勿城), 남소성(南蘇城), 창암성(倉巖城) 등을 가지고 당나라에 항복하였다..................다음해에 남생을 불러들여 그에게 요동대도독현토군공으로 전직시키고 당나라 서울에 그의 관저를 주고 이어 조서를 내려 자기의 병영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 뒤에 남생이 이적과 함께 평양을 공격하여 궐내에 들어가서 국왕을 사로잡으니 황제가 태자를 요수(遼水)에 보내 남생을 위로하고 상품을 주었으며, 남생이 돌아오매 그에게 우위대장군변국공으로 진급시켰다. 남생은 나이 46세에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의 도읍 국내성과 가물성, 남소성, 창암성[필자주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남소성, 목저성, 창암성이라 했다] 등이 바로 인접한 성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따라서 고구려의 신성(新城)은 고구려의 서쪽 변경에 위치했던 성이 확실할 것이고, 그 가까이에 현토성, 국내성, 가물성, 목저성, 남소성, 창암성 등이 위치했었으며, 안시성(환도성), 요동성과도 그리 멀리 떨어진 성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고대의 요동군(遼東郡)은 지금의 북경(北京) 부근이고, 현토군(玄菟郡)은 하북성 장가구시 서남쪽 회안현(懷安縣) 부근이며, 고구려 국내성(國內城)은 북경 연경구 영녕진(永寧鎭)이고, 안시성(安市城, 필자주 : 고구려의 환도성이기도 하다)은 북경 회유구 발해진(渤海鎭)이며, 목저성(木底城)은 관청수고 부근에 위치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고구려의 신성(新城)은 고구려 국내성(영녕진)의 서쪽방향에 위치한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선화현에 있는 선화고성(宣化古城)이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 신성 추정지 선화고성 : 동경115도02분50초, 북위40도36분4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