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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가 점점 동쪽의 패수 옆으로 옮겼다는 삼국사기 기록의 진실여부 - 최초주장

윤여동 2020. 6. 7. 22:44

윤여동설 - 고구려가 점점 동쪽의 패수 옆으로 옮겼다는 삼국사기 기록의 진실여부 - 최초주장 

 

 

   삼국사기 권제37 잡지제6 지리4 고구려편을 보면,

   고구려가 처음에는 중국 북쪽 땅에서 살았으나 점점 동쪽의 패수 옆으로 옮겼다(高句麗始居中國北地 則漸東遷于浿水之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역사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 기록의 진실여부를 놓고 논란이 많다.

  반도사관론자들은 고구려의 도읍이전이 한반도 북쪽의 환인으로부터 집안을 거쳐 남쪽의 북한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으므로 점점 남쪽으로 옮겼다고 기록했어야 옳았는데, 점남천우(漸南遷于)를 점동천우(漸東遷于)로 잘못 기록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 삼국사기 기록이 매우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북경(北京)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현토군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서남쪽 회안성진(懷安城鎭) 부근이며,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은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 국내성은 북경시 연경구 영녕진(永寧鎭), 환도성은 북경시 회유구 발해진(渤海鎭), 평양성은 하북성 승덕시(承德市)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위 그림을 보면 필자가 왜 고구려가 점점 동쪽의 패수 옆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옳다고 주장하지 이해가 될 것이다.

 

[참고]

 

고구려의 도읍이전 기록(삼국사기)

 

1. 졸본(卒本, 忽本) :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

 

삼국사기에는 추모왕(주몽왕)이 기원전 37년에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 그곳이 토양비미(土壤肥美)하고 산하험고(山河險固) 함을 보고 곧 도읍으로 정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단지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고()로써 성을 삼았다.”[필자주 : 추모왕(주몽왕)의 원래 성씨는 해씨(解氏)이다. 고구려는 건국시조 추모왕(주몽왕)으로부터 5대 모본왕까지는 해씨였고, 6대 태조대왕 때부터 고씨들이 왕위에 올랐다]

 

※ 사실은 기원전 108년에 졸본부여의 건국시조 동명왕(東明王, 이름은 부여두막루라고 한다)이 처음 졸본에서 일어나 도읍을 정했고, 기원전 87년에 이르러 북부여를 병합하여 나라가 커졌고, 이때 멸망한 북부여의 해부루는 유민들을 이끌고 동북쪽으로 이동하여 예(창해군)의 땅을 빼앗아 기원전 86년에 동부여를 건국하게 되고, 그 땅을 빼앗긴 예는 다시 동쪽으로 개마산을 넘어 임둔군 땅으로 가서 그 땅을 차지하고 예를 부활시켰는데 곧 동예이다.[필자주 : 임둔은 소멸했는지, 또 어디로 이동해 갔는지 알 수 없다. 혹시 아메리카 인디언이 임둔사람들이 예에 쫓겨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로 이동해 가서 아메리카 인디언, 인디오가 된 것은 아닐까?]

 

졸본부여는 동명왕이 죽고 그 뒤를 이어 부여무서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아들이 없이 딸만 셋이 있었다고 하고, 주몽이 둘째 공주와 혼인하였고, 기원전 5810월에 이르러 졸본부여 부여무서왕이 죽자 주몽이 그 왕위를 물려받아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또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세우고 왕위에 오른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추모왕은 기원전 58년에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다가 21년 후인 기원전 37년에 이르러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고 다시 왕위에 올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고구려가 고구려라는 국호를 실제로 사용하기 시작한 때가 해()씨인 추모왕(주몽왕) 때부터가 아니라 혹시 고씨로서 추모왕의 외손인 6대 태조대왕 고궁(高宮) 때부터 ()씨의 구려(句麗)라는 의미로 고구려(高句麗)라는 국호를 사용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졸본성에서는 시조인 추모왕(주몽왕)2대 유리왕이 재위 22(A.D.3) 9월까지 살았다.

 

2. 국내성(國內城) : 북경시 연경구 영녕진

 

2대 유리왕이 재위 22년인 서기 310월에 국내로 도읍을 옮겼다(王遷都於國內).

국내성에서는 2대 유리왕이 재위 22(A.D.3) 10월부터 재위 3710월까지, 3대 대무신왕이 재위 27년간, 4대 민중왕이 재위 5년간, 5대 모본왕이 재위 6년간, 6대 태조대왕이 재위 94년간, 7대 차대왕이 재위 20년간, 8대 신대왕이 재위 15년간, 9대 고국천왕이 재위 19년간, 10대 산상왕이 재위 13(A.D.209) 9월까지 살았다.

도읍한 기간은 206년간(A.D.3102099)이다.

 

3. 환도성(丸都城) : 북경시 회유구 발해진

 

10대 산상왕 재위 13년인 서기 20910월에 환도로 도읍을 옮겼다(王移都於丸都)

환도성에서는 10대 산상왕이 재위 13(A.D.209) 10월부터 재위 315월까지 살았고, 11대 동천왕이 재위 21(A.D.247) 1월까지 살았다.

도읍한 기간은 38년간(A.D.209102471)이다.

 

4. 평양성(平壤城) :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11대 동천왕 21(A.D.247) 2월에 왕이 환도성은 병란을 겪어서 다시 도읍할 수 없다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평양성에서는 11대 동천왕이 재위 21(A.D.247) 2월부터 229월까지, 12대 중천왕이 재위 23년간, 13대 서천왕이 재위 23년간, 14대 봉상왕이 재위 9년간, 15대 미천왕이 재위 32년간, 16대 고국원왕이 재위 12(A.D.342) 7월까지 살았다.

도읍한 기간은 106년간(A.D.24723427)이다.

 

5. 환도성(丸都城)

 

16대 고국원왕 재위 12(A.D.342) 8월에 왕이 환도성으로 옮겨 살았다(移居丸都城).

고국원왕이 평양성에서 환도성으로 옮겨온 후인 34210월 전연 모용황의 침공을 받고 환도성이 함락되자 3437월에 다시 평양 동쪽 황성으로 옮겨 살았다.

도읍한 기간은 2년간(A.D.34283436)이다.

 

6. 황성(黃城) : 하북성 승덕시

 

16대 고국원왕 재위 13(A.D.343) 7월에 왕이 평양 동쪽 황성으로 옮겨 살았다(移居平壤東黃城).

황성에서는 16대 고국원왕이 재위 13(A.D.343) 7월부터 재위 411023일까지, 17대 소수림왕이 재위 14년간, 18대 고국양왕이 재위 9년간, 19대 광개토왕이 재위 22년간, 20대 장수왕이 재위 14(A.D.426)까지 살았다.

도읍한 기간은 180년간(A,D,2477- 426)이다.

 

 

7. 평양성(平壤城) : 하북성 승덕시

 

20대 장수왕 재위 15(A.D.427)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移都平壤).

평양성에서는 20대 장수왕(재위 15(A.D.427)부터 재위 791230일까지), 21대 문자왕이 재위 28년간, 22대 안장왕이 재위 13년간, 23대 안원왕이 재위 15년간, 24대 양원왕이 재위 15년간, 25대 평원왕이 재위 27(A.D.585)까지 살았다.

도읍한 기간은 159(A.D.427- 585)이다.

 

8. 장안성(長安城) : 하북성 승덕시

 

25대 평원왕 28(A.D.586)에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移都長安城).

장안성에서는 25대 평원왕 재위 28년으로부터 재위 32(A.D.590)까지, 26대 영양왕이 재위 29년간, 27대 영류왕이 재위 25년간, 마지막 왕인 28대 보장왕이 재위 27(A.D.668) 9월까지 살았다.[이로서 고구려가 멸망했다]

도읍한 기간은 83(A.D.5866689)이다.

 

※ 다만 신당서 고려(고구려) 전을 보면, “그 나라의 왕이 살고 있는 곳은 평양성인데, 장안성이라고도 부른다. 한나라 때의 낙랑군으로, 경사에서 5천리 남짓 떨어져 있다. 산의 굴곡을 따라 성곽을 쌓았으며, 남쪽은 패수까지이다. 왕은 그 좌측에 궁궐을 지어 놓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평양성과 장안성을 같은 장소로 기록하고 있고,

  또 북사 고구려전을 보면, “도읍은 평양성으로서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서가 6리로서 산의 굴곡을 따라 성곽을 쌓았고,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았다. 성안에는 오직 군량과 무기만을 저장하여 외적이 침입할 때를 대비하였다가 (외적이 침입하면) 곧 성안으로 들어가 단단히 지킨다. 왕은 그 한쪽에 궁실을 별도로 지어 놓았는데, 평상시에는 거처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평양성과 장안성이 같은 장소라는 말인지, 아니라는 말인지 아리까리하다. 어찌되었든 고구려는 최후에 평양성을 함락 당함으로써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