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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 22첨로(檐魯)에 대한 새로운 가설 - 최초주장

윤여동 2020. 8. 1. 09:04

윤여동설 - 백제 22첨로(檐魯)에 대한 새로운 가설 - 최초주장

 

 

 

   양서 백제전을 보면, "號所治城曰固麻 謂邑曰檐魯 如中國之言郡縣也 其國有二十二檐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치성을 고마라 부르고, 읍을 첨로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에는 22첨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남사 백제전에는, "號所都城曰固麻 謂邑曰檐魯 如中國之言郡縣也 其國土有二十二檐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도성을 고마(固麻)라 부르고, 읍을 첨로(檐魯)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 땅에는 22첨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양직공도 백제국사조에도, "所治城曰固麻 謂邑曰檐魯 於中國郡縣 有二十二檐魯(필자주 : 원문은 檐曾(첨증)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첨로의 오기로 보인다) 分子弟宗族爲之旁小國有叛 波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巳 文下 枕羅 等 附之(치성을 고마라 하고, 읍을 첨로라 하는데, 중국의 군현과 같은 것이다. 22첨로가 있는데, 주변 소국의 반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왕의) 자제와 종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파탁·다라·전라·사라·지미·마연·상사·문하·침라 등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22개 첨로 중 9개 첨로의 이름을 알 수 있게 하는데, 우리는 지금 이 백제 22첨로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 있다.

 

☆ 지금 한국역사학자들은 이 “첨로(檐魯)”를 담로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글자 형태가 비슷한 檐(처마첨) 자와 擔(멜담) 자를 착각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중국 북조의 역사서에는 주로 대륙백제에 대한 기록들이 들어 있고, 중국 남조의 역사서에는 반도백제에 대한 기록들이 들어 있다.

   대륙백제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온조왕이 지금의 발해 북쪽 진황도 도산(都山) 남쪽에 세운 백제를 말하는 것이고, 반도백제는 12대 계왕의 아들인 무광왕이 대륙백제에서 13대 근초고왕과 20여 년간에 걸친 왕위다툼에서 최종으로 패하자 365년경 대륙백제를 떠나 지금 한반도의 전북 익산 금마(필자주 : 이곳이 지모밀지이다)로 도망쳐 와서 다시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던 나라였다.

   관세음응험기에,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정사()를 새로 지었다(百濟 武廣王 遷都 枳慕密地 新營精舍)"고 기록되어 있는 바로 그 무광왕(武廣王)이다.

   그리고 무광왕의 고손자로 보이며 동성왕의 할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는 모도왕(牟都王)에 대한 기록도 있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조의 주를 보면, “책부원구에는 이르기를 남제 건원2(480)에 백제왕 모도(牟都)가 사신을 보내 공납을 바치매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하늘의 명령을 새로 받게 되면서 혜택이 먼 지역에까지 미치고 있다. 모도는 대대로 동쪽 지경 밖에 번신으로 있으면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기 직분을 다하고 있으므로 즉시로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으로 임명한다하였다.

 

☆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31명의 백제왕 중에 모도왕(牟都王)이라는 왕은 없다. 그런데 남제에서는 백제 모도왕이 사신을 보내왔다고 하고, 그에게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작위도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에 모도왕이라는 왕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한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이 백제 모도왕이 반도백제의 왕이었음이 틀림없다고 하는 것이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조의 주를 보면, "삼한고기에는 모도가 왕이 된 사실이 없으며, 또한 모대는 개로왕의 손자 즉 개로왕의 둘째 아들 곤지의 아들이라는 것만 기록되어 있고, 그의 할아버지가 모도라고는 하지 않았으니 제서(남제서)의 기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백제 모도왕에 대하여 부정하는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보아 삼국사기 찬자들도 백제 모도왕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또 한치윤의 해동역사 제9권 세기9 백제편을 보면 "살펴보건대, 백제의 여러 왕 중에 모도란 이름이 없다. 그런데 남제서에는 영명8년에 모대를 죽은 할아버지 모도의 뒤를 이어서 왕으로 책봉하였다고 하였다.  남사에 의거하면 모도의 아들이 모대이고, 남제서에 의거하면 모도의 손자가 모대로서 서로 어긋난다. 우선은 이를 기록하여 후세의 고증을 기다린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치윤도 백제 모도왕에 대하여 그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후세에 미루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드디어 윤여동이 백제 모도왕의 실체를 밝힌 것이다.

 

  모도왕은 반도백제 무광왕의 후예(고손자)로서 곤지의 아버지였고, 동성왕 모대와 무령왕 사마(융이라고도 한다)의 할아버지 되는 사람으로서 이 모도왕때 반도백제가 대륙백제를 흡수통합한 후 그의 둘째 손자인 모대를 대륙백제로 보내 왕위에 올렸다. 이때 반도백제 모도왕은 황제의 위치에 있었을 것인데, 488년에 죽고 그의 맏손자 남제왕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한반도 전북 익산 미륵사지는 바로 이 반도백제 남제왕 70세때 그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지어진 절이다.          

   또한 영명8년에는 백제왕 모대(동성왕)가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매 알자복야 손부를 보내어 모대에게 책명하여 그의 죽은 할아버지 모도(牟都)의 관작[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을 계승하게 하고 백제왕을 삼으면서 말하기를 아아 그대가 대대로 충성과 근면을 계승하여 정성이 먼 곳에까지 나타나 바닷길이 조용해졌고 조공을 어기지 않으므로 이에 떳떳한 법전에 의하여 책명을 하는 것이니 삼갈지어다. 삼가 아름다운 위업을 잇는 것이니 어찌 조심하지 않으랴. ’행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으로 임명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반도백제 모도왕은 곤지의 아버지이고, 동성왕 모대의 할아버지라는 것이 확실한데, 동성왕은 반도백제의 왕이 아니라 대륙백제의 24대왕이었다. 이는 반도백제 모도왕 때 반도백제가 대륙백제를 흡수통합한 후 그 둘째손자인 모대(동성왕)를 대륙백제로 보내 왕위에 올렸다고 해석하면 앞뒤가 딱 맞아 떨어진다.

 

   지리적 위치상 대륙백제는 중국 북조의 나라들과 접촉이 많았고, 반도백제는 중국 남조의 나라들과 접촉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주로 남조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 22첨로(檐魯)에 대한 기록들은 반도백제에 관한 기록일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 그러했다면,

   양직공도 백제국사 조에 그려져 있는 백제사신의 모습은 반도백제에서 양나라로 보낸 사신의 모습일 가능성이 있고, 

반도백제에서는 치소[도읍]를 고마(固麻)라 불렀으며, 군현을 첨로(檐魯)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반도백제는 22첨로를 두고, 그곳을 믿을 만한 왕자와 왕족들에게 나누어 주고 통치하게 하였다고 할 수 있으므로, 22첨로는 반도백제의 군현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혹시 波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巳 文下 枕羅(파탁·다라·전라·사라·지미·마연·상사·문하·침라) 등은 한반도의 옛 지명들이 아니었을까? 

 

☆ 한반도 공주의  "고마나루"라는 것도 웅진(熊津 : 곰나루)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치소라는 의미인 "고마(固麻)"에서 유래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