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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대의 두만강(豆滿江)은 지금의 내몽골 적봉의 음하(陰河) - 최초주장

윤여동 2020. 8. 16. 19:57

윤여동설 - 고대의 두만강(豆滿江)은 지금의 내몽골 적봉의 음하(陰河) - 최초주장

 

 

   두만강(豆滿江)백두산(白頭山)에서 발원하여 동쪽 방향으로 흐른다고 하였다. 그런데 옛 태백산(백두산, 장백산)으로 밝혀진 지금의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며 강을 이루어 내몽골 적봉에 이르는 강이 지금의 음하(陰河)인데, 바로 이 강이 고대의 두만강(豆滿江)으로 비정되는 강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함경도 회령도호부 산천 조를 보면, “백두산(白頭山)이 곧 장백산(長白山)이다. 회령도호부의 서쪽으로 7.8일 걸리는 거리에 있다. 산이 3층으로 되어 있는데, 높이가 2백리요, 가로는 천리에 뻗쳐있다. 그 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鴨綠江), 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松花江 : 樺木溝)과 혼동강(混同江 : 百岔河), 동북으로 흐르는 것은 소하강(蘇下江 : 西拉木倫河)과 속평강(速平江 : 少郞河),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두만강(豆滿江 : 陰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옛 불함산, 태백산, 도태산이나 고려시대의 백두산, 장백산에 관한 기록들에는 산꼭대기에 큰 못이 있다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다가, 조선시대부터 백두산 꼭대기에 둘레가 80리에 이르는 못이 있다고 기록되기 시작한다.

만약 지금의 백두산 천지(天池) 만큼 거대한 못이 옛날부터 태백산(도태산, 장백산, 백두산) 꼭대기에도 있었더라면 당연히 옛날 사람들도 그러한 특이한 상황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을텐데, 수서 말갈전이나 북사 물길전을 보더라도, “도태산(태백산, 백두산, 장백산의 다른 이름)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 지방 사람들이 매우 경외하여 산 속에서 대소변을 보지 않고, 산속의 짐승들도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들 역시 짐승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는 정도의 기록들만이 남아 있고, 남송의 홍호가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냉산(冷山)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돌아와 쓴 송막기문(松漠紀聞)에도 “장백산은 냉산 동남 천여리에 있다. 이곳에는 백의관음이 살고 있고, 그 산의 짐승들은 모두 희며, 사람들이 감히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 산꼭대기에 아주 커다란 못이 있다는 내용은 없다.

 

☆ 지금의 내몽골 적봉에서 음하(陰河)와 석박하(錫泊河)가 합류하여 영금하(英金河)가 되고, 영금하는 다시 노합하(老哈河)로 흘러 들어가고, 노합하는 또 다시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로 흘러 들어간다.

 

   역사연구자들이 고대의 두만강을 정확히 찾으려 애쓰는 것은, 고대의 두만강(豆滿江)을 찾으면 우리 고대사에서 아직 풀지 못하고 있는 많은 것들을 밝혀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고사, 고대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고대의 태백산(太白山 : 불함산, 도태산, 백두산, 장백산)을 확실하게 확정할 수 있게 되고, 숙신(肅愼 : 말갈, 여진)의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있게 되며, 고려 때 윤관장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두만강 북쪽 700리에 척경비를 세웠다는 동북9(東北九城)의 공험진(公險鎭) 선춘령(先春嶺)을 찾을 수 있게 되어 우리 역사 강역의 북단을 찾을 수 있게 되고, 아직까지도 그 설치 위치가 아리송한 천리장성과 쌍성총관부도 찾을 수 있고, 조선 태조 이성계의 출생지 영흥도 찾을 수 있게 된다.

 

   고려에서 장성을 처음 쌓은 때는 거란의 3차 침입 이후인 덕종(德宗) 대이다. 거란의 1.2.3차 침공을 받으며 장성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 덕종(德宗)1033(덕종2)에 이르러 평장사 유소(柳韶)로 하여금 천여 리에 달하는 장성(長城)을 쌓게 했는데, 이 때 완공된 것이 위원(威遠) · 흥화(興化) · 정주(靜州) · 영해(寧海) · 영덕(寧德) · 영삭(寧朔) · 운주(雲州) · 안수(安水) · 청새(淸塞) · 평로(平虜) · 영원(寧遠) · 정융(定戎) · 맹주(孟州) · 삭주(朔州) 14성을 거쳐 요덕(耀德), 정변(靜邊), 화주(和州) 3성에 잇대어 동쪽으로 바다와 닿게 되는 길이가 1천리에 이르고, 높이와 폭이 각 25척이었다는 고려 천리장성으로서 지금 중국의 만리장성과 같은 규모의 장성이었다.

   그런데 뒤를 이은 정종(靖宗) 역시 왕위에 오른 후 1035년에 장성(長城)을 서북로 송령(松嶺)의 동쪽에 쌓아서 변방 외적의 요충지를 제압할 수 있도록 하였고,[필자주 : 이때 쌓은 고려장성의 명칭이나 규모에 대하여는 역사에 확실하게 전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재위 10년인 1044년에 이르러서는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영기(金令器) 등에게 명하여 장주(長州)와 정주(定州 : 정평) 및 원흥진(元興鎭)에 성을 쌓게 하였는데, 이 성들은 두만강(豆滿江) 북쪽 지역에 위치한 성들이었다.

 

☆ 고려는 후일 이 장주, 정주, 원흥진의 성들 사이를 이어 장성도 쌓았던 듯하다. 혹시 이때 쌓은 장성과 천리장성 사이에 화주(和州 : 영흥)가 위치했기 때문에 두 장성을 쌍성이라 부르며 화주(영흥)에 관부를 설치할 때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라 이름 지은 것이 아닌가 싶고, 이 쌍성총관부는 바로 옛 옥저(沃沮)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부였다.

 

   이 때 고려는 두만강(豆滿江)과 그 북쪽 함주(咸州) 사이 지역에 장주성과 정주성 그리고 원흥진성을 쌓은 것이고, 또 선덕진(宣德鎭)에도 성을 쌓았다고 고려사에 전한다.[필자주 : 두만강과 북쪽의 함주 사이 지역이 곧 옛 동옥저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권제82 지제36 ()2 성보(城堡) 조를 보면,

   고려 정종(靖宗)은 왕위에 오르자 서북로 송령(松嶺)의 동쪽에 장성(長城)을 쌓았고, 또 각 지역에 필요에 따라 많은 성들을 쌓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재위 10(A.D.1044)김영기(金令器), 왕총지(王寵之)에게 명하여 장주(長州), 정주(定州) 및 원흥진(元興鎭)에 성을 쌓았다.

   장주성(長州城)은 길이가 575칸이고, 초소는 6곳에 설치했는데, 그 명칭은 정북(靜北), 고령(高嶺), 소흉(掃兇), 소번(掃蕃), 염천(厭川), 정원(定遠)이었다.

   정주성(定州城)은 길이가 809칸이고, 초소가 5개인데 명칭은 방수(防戍), 압호(押胡), 홍화(弘化), 대화(大化), 안륙(安陸)이다.

   원흥진성(元興鎭城)은 길이가 683칸이고, 초소가 4개인데, 명칭은 내항(來降), 압로(壓虜), 해문(海門), 도안(道安)이었다.

   또 선덕진(宣德鎭)에 성을 쌓았다.

   재위 12(A.D.1046) 영흥진(永興鎭)에 성을 쌓으니 길이가 424, 문이 넷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려 정종 때의 축성 상황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함경도 정평도호부(定平都護府) 군명(郡名) 조를 보면, “파지(巴只), 선위(宣威), 천정(千丁), 중산(中山), 정주(定州)로 기록되어 있어 정평(定平)의 옛 지명이 정주(定州)였음을 알 수 있고,

   또 함경도 영흥대도호부(永興大都護府) 군명(郡名) 조를 보면, “박평(博平), 쌍성(雙城), 화주(和州), 당문(唐文), 장령(長嶺), 화령(和寧), 역양(歷陽)”으로 불리운 적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영흥(永興)의 옛 지명이 쌍성(雙城), 화주(和州), 화령(和寧)이었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당시 고려의 도읍 개경(開京)은 한반도 황해도의 개성이 아니라 지금 중국 하북성 관성현(寬城縣, 필자주 : 하북성 진황도 도산(都山)의 서북쪽 방향)으로서 좌표는 동경1182856초 북위403652초이다)이었다.

   그곳이 진짜 고려의 도읍 개경(開京)이었다.

   따라서 당시 고려의 동북면은 한반도의 동북쪽이 아닌 지금 하북성 관성현의 동북쪽 방향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고, 고려 천리장성도 한반도 북부가 아닌 하북성 북부와 내몽골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 동북9성 역시 고려 천리장성 너머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고, 두만강, 정주, 화주도 옛 태백산 동쪽, 천리장성 북쪽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필자가 밝혀본 바에 의하면 고대의 태백산(太白山)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칠로도산산맥 중 최고봉인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 2,067m)을 말하는 것이고, 고려 때의 두만강(豆滿江)은 대광정자산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내몽골 적봉(赤峰)에 이르는 음하(陰河)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필자도 이 두만강(豆滿江)을 찾아 확정하고 공개하는데 수십년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우 헷갈렸던 강이다.

 

☆ 필자의 변 : 지금 한반도에 엄연히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이 있고, 조선시대에 그려진 고지도들이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고대의 태백산(백두산, 장백산)과 옛 두만강은 지금 내몽골에 있는 산과 강이라고 주장해야 하니, 대륙에서 두만강을 찾아 놓고도 오랜 세월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 우리 역사의 진실을 위해 용기를 내어 공개합니다. 여러분들의 검증을 기다리겠습니다.

 

   지금의 내몽골 적봉의 음하(陰河)가 옛 두만강이었다고 하면 선뜻 수긍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대다수이겠지만, 이는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일 것이고, 정주(定州 : 정평)는 지금의 내몽골 적봉(赤峰) 북쪽 교두진(橋頭鎭, 좌표는 동경 1185446초 북위423645초이다) 부근을 말하는 것이며, 화주(和州 : 쌍성, 영흥, 좌표는 동경1191811초 북위421853초이다)는 지금의 내몽골 영금하(英金河)와 노합하(老哈河)의 합류지점인 원보산진(元寶山鎭)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천리장성(千里長城),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진짜 흔적은 한반도 영흥(지금 북한의 금야읍)이 아닌 지금의 내몽골 적봉(赤峰) 동쪽 부근에서 찾아야하고, 옛날 윤관장군이 여진정벌을 위해 군사들을 나누어 진군시켰던 정주성(定州城)의 흔적은 옛 두만강 북쪽인 지금의 내몽골 적봉(赤峰) 북쪽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은 이러한 우리 고대 역사의 진실을 알지 못하고는 한반도 함경도의 함흥, 영흥(지금의 금야읍) 부근에서 쌍성총관부를 찾고 있고, 한반도 동북쪽 두만강 부근에서 동북9성을 찾고 있으니 그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고, 우리의 고대 역사해석이 엉터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고대의 두만강(豆滿江)은 지금 한반도 동북쪽의 두만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몽골 적봉을 지나는 음하(陰河)를 말하는 것이다.

 

☆ 고려 동북9성의 공험진 선춘령비(先春嶺碑)는 두만강 북쪽 700리에 세웠다고 하였고,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에는 이때 윤관장군이 여진을 축출하고 개척한 지역이 300리 땅이며,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았고, 서북방은 개마산(蓋馬山)을 끼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장주(長州), 정주(定州) 두 고을에 연접하였는바 산천이 수려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넉넉히 우리 백성들이 거주할 만한데 이곳은 본래 고구려의 영토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지금 한반도의 두만강 북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발해 북쪽에 위치하고 있던 대륙고려의 동북쪽 방향인 내몽골 옹우특기(翁牛特旗) 일원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