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려 동북9성(東北九城)의 진짜 위치를 찾아 공개한다 - 최초주장
고려 동북9성 공험진(公嶮鎭) 선춘령(先春嶺)은 백두산(白頭山) 동북쪽, 두만강(豆滿江) 북쪽 700리에 위치했고, 그곳이 소하강변(蘇下江邊)이었다고 하며, 고려 윤관장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그곳 선춘령(先春嶺)에 "高麗之境(고려지경)"이라고 새긴 척경비[필자주 : 고려지경비(高麗之境碑)라고도 하고, 선춘령비(先春嶺碑)라고도 한다]를 세웠다고 전해온다.
☆ 고려 동북9성은 영주성(英州 : 蒙羅骨嶺, 서단), 복주성(福州城 : 吳林金村), 길주성(吉州城 : 弓漢伊村, 최북단), 웅주성(雄州城 : 火串嶺, 동단), 공험진성(公嶮鎭城 : 先春嶺), 함주성(咸州城 : 咸州), 평융진성(平戎鎭城), 통태진성(通泰鎭城), 의주성(宜州城)을 말하는 것이고, 영주성에 진동보제사(鎭東普濟寺)와 호국인왕사(護國仁王寺)라는 두 절을 지은 것은 고려 숙종이 생전에 천지신명에게 여진을 축출하게 해 주면 절을 지어 보답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지금 한반도 동북쪽의 두만강 북쪽 700리에서 동북9성을 찾고 있고, 공험진(公嶮鎭) 선춘령(先春嶺)을 찾으려 하고 있는데, 이는 고려가 한반도 황해도 개성에 도읍하고 있던 나라였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고려의 도읍 개경(開京)은 한반도의 개성이 아니라, 지금의 발해 북쪽 중국 하북성 난하 반가구수고 동북쪽에 위치한 관성현(寬城縣 : 관성만족자치현)이라는 곳이었다.
따라서 고려의 동북9성은 지금 한반도의 백두산 동북쪽, 두만강 북쪽 700리에서 찾을 일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관성현(寬城縣)의 북쪽, 동북쪽에서 백두산(白頭山)과 두만강(豆滿江)을 찾아야 하고, 그 두만강 북쪽 700리에서 동북9성, 공험진(公嶮鎭), 선춘령(先春嶺)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사서들에는 북옥저와 남옥저는 서로 800리 떨어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옥저는 한반도의 함경도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북옥저(北沃沮)는 지금의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 동북쪽, 내몽골 소랑하(少郞河) 북쪽,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 남쪽 옹우특기(翁牛特旗) 일원을 말하는 것이고,
☆ 고대의 태백산(太白山), 장백산(長白山), 백두산(白頭山)은 지금의 칠로도산 산맥 중 최고봉인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 해발 2,067m)을 말하는 것이다.
동옥저(東沃沮)는 대광정자산 동쪽, 내몽골 소랑하(少郞河) 남쪽, 음하(陰河), 영금하(英金河) 북쪽, 노합하(老哈河) 서쪽 사이 지역인 교두진(橋頭鎭) 일원을 말하는 것이며,
남옥저(南沃沮)는 대광정자산 동남쪽, 내몽골 음하(陰河) 남쪽, 노합하(老哈河) 서쪽 객라심기(喀喇沁旗) 일원을 말하는 것이다.[필자주 : 대광정자산 동남쪽에 위치한 객라심기 부근의 이 남옥저지역이 옛 태백산 동남방에 위치했던 행인국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따라서 고대의 두만강(豆滿江)으로 비정되는 지금 내몽골 적봉의 음하(陰河)에서 306번 국도를 따라 서북쪽으로 700리를 가면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에 도달하게 되므로, 지금의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 부근이 고려 때 윤관장군이 여진을 축출하고 개척했던 동북9성 설치지역이었으며 당시 고려의 북쪽 국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남옥저(객라심기)에서 북옥저(옹우특기)까지 800리였다는 사서의 기록과 두만강(음하)에서 공험진 선춘령(서랍목륜하 강변)까지 700리였다는 기록을 비교해 보면 필자의 주장이 매우 신빙성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함주로부터 공험진까지 아홉 개의 성을 축성하고 선춘령에 비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고, 공험진은 고령진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고 고라이(古羅耳)를 넘고, 오동참, 영가참을 지나면 소하강(蘇下江)에 이르는데 강가에 공험진 옛 터가 있고, 남쪽으로는 구주, 탐주와 이웃하고 북쪽으로는 견주에 접했다고 하고, 선춘령(先春嶺)은 두만강 북쪽 7백 리에 있으며, 윤관이 이곳까지 개척하고 공험진에 성을 쌓고는 곧 선춘령 꼭대기에 비석을 세웠는데 비석의 사면에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고 글자를 새겼으나 오랑캐들이 그 글자를 모두 지워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북9성 축성순서는 동쪽 화곶령의 웅주성, 북쪽 궁한이령의 길주성, 서쪽 몽라골령의 영주성과 오림금촌의 복주성을 먼저 쌓고, 그 다음 선춘령 공험진성과 함주성을 쌓고, 그 다음 평융진성, 통태진성, 의주성을 쌓아 9성을 완성했다]
그리고 고려사에는 윤관장군이 여진을 축출하고 동북9성을 설치한 지역이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았고, 서북방으로 개마산(蓋馬山)을 끼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장주(長州)와 정주(定州) 두 고을에 접했다”고 하였고,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에는, “점령한 지역이 300리이며,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았고, 서북방은 개마산(蓋馬山)을 끼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장주(長州), 정주(定州) 두 고을에 연접하였는바 산천이 수려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넉넉히 우리 백성들이 거주할 만한데 이곳은 본래 고구려의 영토였었다. 그 증거로는 오래된 비석과 유적이 오늘까지도 보존되어 있다. 그런즉 전일에 고구려가 잃었던 영토를 금일에 성상께서 다시 찾으신 것이니 이 어찌 천명이 아니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사지리지에는 공험진(公嶮鎭)이 선춘령 동남, 백두산 동북 혹은 소하강변(蘇下江邊)에 위치했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 윤관열전에는 이때 고려의 국경을 “동쪽은 화곶령(火串嶺), 북쪽은 궁한이령(弓漢伊嶺), 서쪽은 몽라골령(蒙羅骨嶺)으로 정했다”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매우 정확한 기록들이다.
☆ 고려 윤관장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개척한 동북9성 300리 땅은 옛 북옥저의 강역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추모왕 10년(B.C.27)조를 보면, “겨울11월 왕이 부위염으로 하여금 북옥저를 쳐서 없애고 그 지역을 고을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북옥저가 일찍이 고구려에 병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고려가 여진을 정벌하고 개척한 300리 땅의 연혁이 그러했기 때문에 영주청벽기에 윤관장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빼앗은 지역이 본래 고구려의 영토였었다라고 기록했던 것이다.
따라서 개마산(蓋馬山)은 옛 태백산, 장백산, 백두산이었던 지금의 대광정자산 북쪽 줄기인 내몽골 극십극등기 일원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땅은 옛 개마국(蓋馬國)이었고,
☆ 개마산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9년(A.D.26) 조에, “겨울 10월 왕이 친히 개마국을 쳐서 그 나라 왕을 죽였다.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하였으며 군사들에게 인명과 재물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고 다만 그 지역을 군현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옛 개마국을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 경치가 매우 아름답기로 널리 알려져 있는 내몽골 극십극등기(克什克騰旗) 아사합도(阿斯哈圖) 일원을 말하는 것이다.
동쪽의 대해(大海)는 지금의 중국 동북평원을 말하는 것으로서, 동북평원은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에 하얼빈 동북쪽 흑룡강성 모란현(木蘭縣) 부근이 무너져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을 따라 대해(大海)의 물이 모두 빠져나가게 되어 그 하류는 삼강평원이 형성되었고, 그 상류는 옛 대해가 사라지게 되어 지금은 동북평원이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고려의 동북9성은 지금의 대광정자산 동북쪽, 내몽골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 남쪽 강변을 따라 축성되었던 것이고, 고려지경(高麗之境) 척경비를 세웠다는 공험진(公嶮鎭) 선춘령(先春嶺)도 이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 강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인데, 선춘령은 지금의 내몽골 적봉에서 극십극등기로 가는 306번 국도가 서랍목륜하와 만나는 지점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 고려사 윤관열전을 보면, “고려와 여진의 경계선 지점에 연달아 산줄기가 있는바 그것이 동해안으로부터 불끈 솟아서 고려 북부 국경까지 뻗쳤는데 지세가 험준하고 수림이 무성하여 인마(人馬)의 통행이 지극히 곤란하였다.
그 사이에 단 하나의 오솔길이 있었는데 이것을 병항(甁項 : 병목)’이라고 하는바 그것은 단 하나의 구멍으로 출입하는 까닭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공명심이 강한 사람들이 가끔 건의하기를 “단 한 줄기의 오솔길을 폐쇄하면 오랑캐(필자주 : 여진족을 말함이다)의 통로가 끊어질 터이니 바라건대 군사를 파견하여 그것을 평정하시라”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지금 내몽골의 적봉을 지나 극십극등기로 가는 306번 국도의 옛길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윤관장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개척했던 300리 땅이란 바로 지금의 내몽골 소랑하(少郞河), 옹우특기(翁牛特旗) 부근으로부터 그 북쪽, 서북쪽으로 서랍목륜하까지의 300리 땅(필자주 : 이 땅이 바로 옛 북옥저의 강역이었고 오국성이었다)이었으며, 공험진의 선춘령(先春嶺)은 옛 두만강이었던 지금의 내몽골 적봉 음하(陰河)로부터 서북쪽으로 700리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 필자가 특히 이 고려 동북9성의 정확한 위치를 찾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것은 필자의 선조이신 문숙공(윤관장군의 시호)께서 17만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실 때, 지금의 어느 길을 따라 진군하셨고, 어디에서 전투를 하셨으며, 어디까지 진출하셨고, 어디에 아홉 개의 성을 쌓으셨을까 매우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후손으로서 선조의 발자취를 밝히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여기고,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찾고 또 찾아 가 보니 지금의 내몽골 적봉을 지나 서랍목륜하(시라무렌하)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춘령이 백두산 동북쪽, 두만강 북쪽 700리에 위치했다고 전해지게 되었던 것인데, 역사학자들이 기록 속의 백두산과 두만강을 지금의 한반도 백두산, 두만강으로 착각하고는 두만강 북쪽 700리에서 선춘령비를 찾으려 하였으니 그 흔적조차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생각을 바꾸면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사의 역사 강역 모두를 쉽게 찾을 수 있으련만 그 인식의 전환이 그리도 어려운 일인가?
☆ 고려의 동북9성과 공험진 선춘령이 지금의 한반도 동북쪽 두만강 북쪽 700리에 위치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내몽골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 : 시라무렌강) 남쪽 강변을 따라 축성되었다는 것을 역사상 처음으로 공개하는 것이니, 여러분들도 그 부근을 뒤져 확인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러다보면 우리의 고려로부터 그 이전 우리 상고사의 역사 강역을 찾을 수 있고, 또 그 부근에서 덤으로 오국성에 조성되었다는 요 천조제의 능과 북송 흠종의 능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위 글의 내용을 인용할 때에는 반드시 “윤여동설” 임을 밝혀야 합니다.
[참고]
고려 동북9성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
☆ 영주청벽기는 윤관장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그 땅에 아홉 개의 성을 축성하고, 그 맨 서쪽에 위치했던 영주성의 관청 벽에 기록해 놓았던 내용으로서 매우 정확한 기록입니다.
아래 지도는 필자가 밝힌 대륙고려와 거란, 여진, 천리장성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 입니다.
아래 기록을 읽고 위 지도에서 고려 동북9성의 위치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
맹자에 이르기를, “약한 자는 원래 강한 자에게 대적할 수 없고, 작은 자는 큰 자에게 대항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내가 이 말씀을 외운 지는 오래나 오늘에 와서야 확신하게 되었다.
여진은 우리나라에 비하여 병력의 강약과 인구의 다소에서 현저한 세력의 차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국경을 엿보아 왔다.
숙종(고려) 10년에는 우리나라의 경비가 약한 틈을 타서 전란을 도발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을 많이 살육했고, 또 납치해가서 노비로 만든 사람도 매우 많았으므로 숙종께서 진노하시어 군대를 정비하고 장차 정의의 토벌을 단행 하시려던 차에 애석하게도 그 일을 성사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시었다.
금상 폐하(고려 예종)가 즉위 하신 후 3년 상을 마치자마자 좌우 시신들에게 말씀 하시기를, “여진은 본시 고구려의 한 부락으로 개마산 동편에 모여 살면서 대대로 우리나라에 조공하여 왔고, 우리 선대의 깊은 은혜도 입어왔다. 그런데 무도하게도 배반하였으므로 부왕께서 대단히 노하셨다. 일찍이 옛 사람의 말을 듣건대, “큰 효도란 어버이의 뜻을 잘 계승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오늘 3년 상을 마치고 국사를 총람하기 시작하였으니 어찌 정의의 칼을 들어 저 무도한 적을 정벌함으로써 선군이 당하신 치욕을 깨끗이 씻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신 다음 수사도중서시랑평장사 윤관을 행영대원수로, 지추밀원사한림학사승지 오연총을 부원수로 삼아 각각 임명하고 정병 30만 명을 인솔시켜 정벌을 맡아 행하게 하였다.
윤공(윤관)은 매사에 특출한 분으로 항상 김유신을 사모하며 말하기를, “김유신이 전쟁을 할 때 6월에 강물이 얼어 삼군을 도하시킨 것은 다름 아닌 지성으로써 이루어진 것일 뿐인데, 나도 또한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며, 그의 지성이 감응되어 이루어진 기적도 자주 들려왔다.
오공(오연총)은 당시의 명망이 대단하였으며, 그의 천성이 신중하여 매사를 처결할 때는 반드시 재삼 생각한 후에 실천하였으므로 그가 세운 국가대책은 성공 못한 일이 없었다.
이 두 분은 전일부터 국방에 뜻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왕의 명령을 받고 분심이 발동하여 군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향하여 떠났으며, 출사하던 날에는 친히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였으며, 휘하 장졸들과 선서식을 하기도 전에 벌써 여러 장졸들은 눈물을 흘리며 명령에 충실히 복종할 것을 결의 하였으며, 적군의 경내에 진격했을 때는 전군의 사기가 충천하여 일당백의 기세로 뻗쳤으니 그 기세가 소위 “마른 나무를 꺾고, 대나무를 쪼갠다”는 말로도 충분히 표현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목을 벤 것이 6천이요, 무기를 바치고 군진 앞에 와서 항복한 자가 5만여 명이며 기타 아군을 보기만 하여도 혼이 나서 북쪽 끝까지 도망친 자들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다.
아 여진의 우둔함이여!
세력의 강약과 병력의 다소를 헤아리지 않고 이 같이 스스로 멸망의 길을 택하였구나.
점령한 지역이 300리이며,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고, 서북방은 개마산을 끼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장주, 정주 두 고을에 연접하였는바 산천이 수려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넉넉히 우리 백성들이 거주할 만한데 이곳은 본래 고구려의 영토였었다. 그 증거로는 오래된 비석과 유적이 오늘까지도 보존되어 있다.
그런즉 전일에 고구려가 잃었던 영토를 금일에 성상께서 다시 찾으신 것이니 이 어찌 천명이 아니랴.
이에 새로 6개성을 설치하였으니,
첫째는 진동군 즉 함주대도독부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이 1948정호요,
둘째는 안령군 즉 영주방어사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이 1234정호요,
셋째는 영해군 즉 웅주방어사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이 1436정호요,
넷째는 길주방어사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이 680정호요,
다섯째는 복주방어사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이 632정호요,
여섯째는 공험진방어사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이 532정호이다.
[필자주 : 이 후 의주성(宜州城), 통태진성(通泰鎭城), 평융진성(平戎鎭城)을 더 쌓아 아홉 개 성을 완성하게 되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고려 동북9성이라 한다]
이상 각성의 주민들 중에서 현명하고 재간이 있어서 능히 임무를 감당할 만한 사람을 선발하여 그 지방을 진무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정복하고 선무하여 왕실의 울타리로 삼는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제부터 앞으로는 동쪽 국경에 대한 근심이 없이 베개를 높이 하고 편안히 잠잘 수 있게 되었는데, 원수(윤관)가 나(임언)에게 말씀 하시기를, “옛날 당나라 재상 배진공(배도)이 회서로 출정하여 적을 평정한 후 종군하였던 문객 한유에게 그 승전한 전말을 기술하게 하여 비석에 새겨 그것을 세상에 널리 알렸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당나라 헌종의 영특하고 절등한 덕을 알고 그를 칭송하게 되지 않았는가? 지금 그대가 다행히 이곳에 종군하고 있는 바 어찌 이번 대승전의 전말을 기록하여 우리나라 임금님의 위대한 업적을 후세에 영원히 전하는 일을 아니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므로 나 임언이 그 지시를 받고 붓을 들어 기록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