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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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려는 윤관장군의 여진 정벌 전에도 두만강 북쪽 400리까지는 차지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20. 9. 6. 12:08

윤여동설 고려는 윤관장군의 여진 정벌 전에도 두만강 북쪽 400리까지는 차지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태백산(백두산, 장백산) 동북쪽 오국성(五國城) 지역은 원래는 북옥저(北沃沮)였다.

 

☆ 후한서 동옥저 전을 보면,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 : 옛 태백산을 말하는 듯하다)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대해까지이고, 북쪽은 읍루와 부여, 남쪽은 예, 맥과 접했다. 그 땅이 동서는 좁고, 남쪽은 긴데 땅이 사방 천리의 절반쯤 된다.........또 북옥저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置溝婁)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에서 800여리 떨어져 있다. 그 풍속은 모두 남옥저와 같으며 국경의 북쪽으로 읍루와 접했다. 읍루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해마다 여름철에는 바위굴 속에 숨어살다가 겨울이 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내려와 읍락에서 산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북옥저가 읍루(필자주 : 숙신, 말갈, 물길, 여진의 다른 이름이다)와 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약탈을 즐겨하는 호전적인 읍루(말갈) 때문에 매우 골치 아파 했음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 북옥저는 고구려 추모왕 때 고구려에 복속되어 나라가 없어지고 말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추모왕 11년(B.C.27) 조를 보면, “11월에 왕이 부위염으로 하여금 북옥저를 쳐서 없애고 그 지역을 고을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랬다가 고구려가 멸망하고 대조영에 의해 발해(渤海)가 서자 그곳은 발해의 강역이 되었고, 발해에서는 그곳에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를 설치하게 되는데 신라로 가는 길목이었다.

 

☆ 신당서 북적 발해전을 보면, “ 발해의 국토는 5경 15부 62주이다.

숙신(肅愼)의 옛 땅으로 상경(上京)을 삼으니 용천부(龍泉府)이며, 용주(龍州), 호주(湖州), 발주(渤州)의 3개 주를 다스린다.

그 남부를 중경(中京)으로 삼으니 현덕부(顯德府)이며, 노주(盧州),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 영주(榮州), 흥주(興州)의 6개 주를 다스린다.

예맥(濊貊)의 옛 땅으로 동경(東京)을 삼으니 용원부(龍原府)인데,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한다. 경주(慶州),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주(賀州)의 4개 주를 다스린다.

옥저(沃沮)의 옛 땅으로 남경(南京)을 삼으니 남해부(南海府)이며, 옥주(沃州), 정주(睛州), 초주(椒州)의 3개 주를 다스린다.

고구려(高句麗)의 옛 땅으로 서경(西京)을 삼으니 압록부(鴨淥府)이며, 신주(神州), 환주(桓州), 풍주(豐州), 정주(正州)의 4개 주를 다스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랬다가 세월이 흘러 발해가 거란의 야율아보기에 의하여 멸망한 후에는 요()나라 땅이 되었고, 또 요(거란) 나라가 금()나라에게 멸망한 후에는 금나라(여진) 땅이 되었으며, 또 그 후에는 원나라 땅이 되었던 곳이다.

 

☆ 정확히 언제부터 북옥저지역을 오국성(五國城)이라고 불렀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대명일통지에는 "이곳으로부터 동쪽은 나뉘어 5국이 되었으므로 오국성이라고 한 것이다. 옛날부터 전해오기를 송(북송) 휘종을 이곳에 장사지냈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그곳이 원래 북옥저, 고구려, 발해, 거란(요), 금나라 등으로 이어져 내려온 땅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이 오국성(五國城) 지역은 금() 나라 초기 요나라 천조제가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와 살다 죽어 묻힌 곳이기도 하고, 북송의 휘종과 흠종도 정강의 변 때 역시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와 이곳 오국성에서 고생고생하며 살다가 죽어 묻힌 곳이기도 하며, 또 이 지역에서 잡히는 사냥매인 해동청(海東靑)이 유명해 지면서 이 오국성(五國城)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아직까지 아무도 그 확실한 위치를 찾은 사람은 없었다.

 

☆ 청나라 때 그려진 지도나 조선시대에 그려진 지도들에 오국성의 위치를 한반도 백두산 동쪽에 그려 놓았으나 이는 조선이 건국된 후 역사의 중심이 대륙에서 한반도로 이동된 뒤의 지명이동에 의한 것일 뿐 그곳이 진짜 오국성은 아니다.

 

   그런데 필자가 찾고 보니, 고대의 태백산, 장백산, 백두산은 지금의 한반도 북쪽 백두산이 아니라 칠로도산산맥 중 최고봉인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 2,067m)을 말하는 것이었고,

   태백산 동쪽(필자주 : 사실은 동북쪽이다)에 위치했었다는 오국성(五國城)은 지금의 내몽골 옹우특기(翁牛特旗)를 지나는 소랑하(少郞河) 북쪽,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 남쪽 사이지역을 말하는 것이었고,

   ()나라 말기 지금의 소랑하(少郞河) 남쪽은 고려 땅이었고,

  고대의 두만강(豆滿江)은 대광정자산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적봉을 지나 영금하로 흘러 들어가는 지금의 음하(陰河)를 말하는 것이었다.

   고려는 원래 두만강 북쪽 400리까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 고려는 윤관장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에 동북9성을 쌓았고, 그곳 공험진 선춘령에 고려지경비(선춘령비)를 세웠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진으로부터 빼앗았던 그 300리 땅을 다시 돌려주었는데, 이는 고려가 동북9성 축성 이전에도 두만강 북쪽 400리 지점까지는 원래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과 같다. 두만강 북쪽 400리까지가 원래 고려의 강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몽골 옹우특기는 한사군 때 초기 현토군의 치소였고, 북옥저의 도읍이었으며, 발해의 남경남해부였으며, 후세 함주(咸州)로 비정되는 곳으로서 원래 두만강 북쪽 400리쯤에 위치한 곳이었다.

 

   그랬다가 고려 예종 때 윤관장군이 17만 별무반을 이끌고 이 오국성 지역의 여진을 축출하고 빼앗았던 300리 땅에 동북9성을 설치하였다가 곧 다시 돌려주었던 것이고, 후세 원()나라 때인 1258년에는 조휘. 탁청 등이 두만강 이북 땅 즉 옛 동옥저와 오국성(북옥저) 지역의 땅을 떼어 가지고 몽골에 투항하게 되자 몽골에서는 화주(和州)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그곳을 통치하였으나 1356년 공민왕 때 이르러 고려가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 조돈 등의 협조를 받아 99년 만에 그 쌍성총관부 지역을 탈환하게 된다.

   이때 고려는 앞서 윤관장군이 개척했던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까지 즉 동옥저를 지나 북옥저(오국성) 지역까지를 다시 되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 명사 조선전 홍무19년(A.D.1386) 12월 조를 보면, “(명 태조 주원장이) 호부에 명하여 고려왕에게 말하기를 “철령 북쪽, 동쪽, 서쪽의 땅은 옛날부터 개원(開元:원나라 때의 개원로를 말함)에 속하였으니 요동(遼東)에서 통치하도록 하고, 철령(鐵嶺) 이남은 옛날부터 고려에 속하였으니 고려에서 통치하도록 하시오. 그리하여 서로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하였다

 

   그런데 고려 말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서자 오국성 지역은 고사하고 그 남쪽 400리에 위치했던 두만강보다도 더 남쪽에 위치한 철령 이북이 옛날부터 원나라에 속했던 땅이었으므로 그곳을 명나라가 차지하겠다고 통보해 오자 고려에서는 그 조치에 강하게 반발하고 요동정벌을 하려 했던 것이고, 위화도회군으로 결국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던 것이다.

   고려의 두만강 이북 땅은 고려로서는 계륵과 같은 존재였고, 결국에는 이 동북면 지역인 동옥저와 오국성(북옥저) 땅이 고려 멸망의 단초로 작용하고 말았던 것이다.

 

   앞서 윤관장군이 별무반을 이끌고 이 오국성(북옥저) 지역의 여진을 축출하고 동북9성을 쌓았을 때, 그를 여진에게 반환하지 말고 오히려 더 진군하여 여진을 완전히 섬멸하고 복속시켰더라면, 고려가 여진족이 세운 나라인 금(金)나라에 칭신하는 수모는 겪지 않았을지 모르고, 또 원나라 때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며, 또 명나라가 철령 이북을 차지하겠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고려가 무리하게 요동정벌을 추진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멸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 철령 이북 고려의 동북면.

   지금 필자가 그 땅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냈건만, 그곳은 이미 남의 땅이 되어 있고, 우리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은 그곳이 우리의 옛 땅인 줄도 모르고, 전혀 엉뚱한 곳에서 동북9성, 쌍성총관부의 흔적을 찾고 있으니 안타까움을 이루 형용할 길이 없다.

   고려로부터 그 이전 옥저(沃沮)와 초기 현토군(玄菟郡) 그리고 환웅의 신시(神市)까지 우리의 유구한 대륙역사가 고스란히 그곳에 묻혀 있건만................

   땅을 치며 통곡한들 지금에 이르러 다시 되돌릴 수 없고, 위정자들은 역사에 관심이 없어 잃어버린 대륙의 우리 옛 땅을 되찾을 궁리는 뒷전이고, 좁은 한반도에 갇혀서 동서남북으로 갈라지고, 좌우로 나뉘어 당파싸움질만 하고 있으니......

  동인, 서인, 남인, 북인으로 나뉘고 또 노론, 소론으로 나뉘어 당파싸움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나라를 망친 조선시대와 지금이 무엇이 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