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조선(왕검조선)의 세 번째 도읍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 위치 찾기 – 최초주장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고조선 왕검조선 조에,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이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이것은 고(高: 요임금)와 같은 시기였다.......
단군왕검은 당고(唐高: 唐堯)가 즉위한 지 50년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朝鮮)이라고 불렀다. [필자주 : 고조선(왕검조선)은 요 25년 무진년(B.C.2333)에 건국되었다고 전해온다. 삼국유사의 찬자가 고조선의 건국연도를 잘못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도읍을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로 옮겼는데, 궁홀산(弓忽山)이라고도 하고,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그는 1,500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호왕(虎王 : 武王)이 즉위한 기묘년(B.C.1122)에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니, 이에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阿斯達)에 은거하다가 산신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 삼국유사는 고조선(왕검조선)의 도읍이전에 대하여, 아사달 → 평양성 → 백악산아사달(궁홀산, 금미달) → 장당경 → 아사달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북애자(北崖子)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檀君記)를 보면,
“고시씨와 여러 사람들이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받들고 그 아들 환검신인(桓儉神人)을 군장으로 삼으니 바로 왕검(王儉)이시다......지금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대강 계산하면 약 4천여 년이 된다. 연대적으로는 당요[帝堯陶唐氏]와 같은 시대로 세상에서 요(堯)와 아울러 함께 일어났다는 말은 바로 이를 말한다.......여러 고을 땅의 길흉을 판단하여 도읍을 태백산(太白山) 서남쪽 우수하지원(牛水河之原)에 정하고 왕검성(王儉城, 필자주 : 왕검조선의 첫 도읍은 태백산 동남쪽 아사달(阿斯達)이었고, 왕검성은 태백산의 남쪽에 위치했다)이라고 했다......
우수하 강변(필자주 : 첫 도읍 아사달을 말하는 것이다)에 산지 10년에 도읍을 백산(白山)의 남쪽이며 패수(浿水)의 북쪽으로 옮기니 이곳이 평양(平壤)이며 두 번째 왕검성(王儉城)이다. 지금의 속말 땅은 기후가 춥고 토질이 나빠서 들이 넓기는 하나 농사짓기가 남쪽보다 좋지 않았다. 속말의 물은 북쪽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으로 들어가니 남쪽과의 교통이 불편하여 도읍을 옮기게 된 것이다.[필자주 : 우수하는 북쪽으로 흐르는 강이었고, 속말말갈 땅에 가까이 위치한 강이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따라서 아사달은 속말말갈과 가까운 태백산(장백산, 백두산) 동남쪽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청평은 단군 때에 4번이나 도읍을 옮겨 나라를 새롭게 했는데, (첫 도읍은 아사달이었고) 두 번째 천도는 패수의 북쪽, (세 번째는) 곧 발해의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 땅인 신주(神州)가 바로 그곳이라고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왕검조선 마지막 단군 제47세 단군 고열가 조를 보면, “우리 황조께서 나라를 세워 만세 후손의 모범이 되었거늘 이제 왕실이 시들어 미약하고 제후가 점점 강해져 외방의 제후들 중에 명령을 받드는 자가 없다........내가 덕이 부족하여 그 가르침과 위풍을 세우지 못한다. 덕이 있는 사람에게 자리를 물려주고자 한다”라고 고열가 임금이 말하고 성손들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적당한 인물이 없었다.
임금이 “나는 당장경으로 옮겨 아사달로 들어가 선성의 신령을 편안하게 받들겠다”말하니 모든 사람이 슬퍼하며 따랐다.
이에 임금이 제기를 받들고 당장경으로 가서 살다가 마침내 아사달에 거처를 정하니 그 근처 백성들이 많이 그의 뒤를 따랐다........이에 나라가 없어지고 말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규원사화는 청평(淸平) 이명(李茗)의 주장을 인용하여, 왕검조선의 첫 도읍은 우수하지원의 아사달(왕검성), 두 번째 도읍은 백산 남쪽 패수 북쪽의 평양(왕검성), 세 번째 도읍은 신주(神州, 필자주 :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백악산아사달, 궁홀산, 금미달을 말하는 듯한데, 청평은 이곳이 후일 발해의 서경압록부라고 했다), 네 번째 도읍은 당장경을 경유하여 아사달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함로(安含老)의 삼성기(三聖記) 전상편(全上篇)을 보면, “뒤에 신인왕검(神人王儉)께서 불함산(不咸山)의 단목지허(檀木之墟)에 내려 오셨다. 그는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짐을 겸비하였으니 이에 능히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었다. 나라를 세운 뜻과 법은 높고도 넓고, 강하고도 열렬하였다. 이에 구환(九桓)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복종하여 그를 받들어 천제의 화신이라 하며 제왕으로 옹립하였다. 그가 곧 단군왕검(檀君王儉)으로 신시(神市)로부터 전해지던 오랜 법을 되찾고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설치하여 나라를 열고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병진년 주나라 고임금 때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라고 바꾸고 백악(白岳)으로부터 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
단군왕검(檀君王儉)은 무진년부터 나라를 다스려 47세를 전하니 그 년수가 2,096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안함로의 삼성기는 고조선(왕검조선)의 도읍 이전에 대하여, 아사달 → (평양왕검성 생략) → 백악 → 장당경으로 기록하고 있고, 이맥(李陌)의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제4 마한세가 하를 보면, "단군 색불루가 아버지께서 이루어 놓으신 힘을 계승하여 대병을 장악하니 진한은 스스로 무너졌고, 나머지 두 한도 역시 이길 수 없어 패해버렸다. 전제(前帝)는 사람을 보내 옥책과 국보를 전하여 제의 자리를 물려 주었다. 새 임금이 백악산(白岳山 : 백악산아사달)에 도읍을 골라 세우니 여러 욕살들이 아무도 승복하지 않았으나 여원홍과 개천령 등이 명령을 받아 저들을 설득했다. 이에 모든 욕살들이 빠짐없이 따르게 되었다. 병신 원년 정월 마침내 녹산에서 즉위하니 이곳을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이라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이암(李嵒)의 단군세기 44세 단군 구물 조를 보면, “이에 구물은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마침내 3월 16일에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장당경에서 즉위하였다. 나라의 이름을 대부여라고 고치고, 삼한은 삼조선이라고 바꿔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고조선(왕검조선)의 첫 도읍은 우수하벌판(牛首河之原)의 아사달(阿斯達) 임이 확실할 것이고, ,
두 번째 도읍은 후일 평양성이 되는 평양왕검성(平壤王劍城)일 것이며,
세 번째 도읍은 궁홀산, 금미달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발해의 서경압록부인 신주(神州)라고 기록되어 있는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일 것이며,
마지막은 장당경(당장경)을 경유하여 첫도읍 아사달로 되돌아간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숙신(肅愼)의 옛 땅으로 상경(上京)을 삼으니 용천부(龍泉府)이며, 용주(龍州), 호주(湖州), 발주(渤州)의 3개주를 다스린다.
그 남부를 중경(中京)으로 삼으니 현덕부(顯德府)이며, 노주(盧州),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 영주(榮州), 흥주(興州)의 6개주를 다스린다.
예, 맥(濊, 貊)의 옛 땅으로 동경(東京)을 삼으니 용원부(龍原府)인데,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한다. 경주(慶州),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주(賀州)의 4개주를 다스린다.
옥저(沃沮)의 옛 땅으로 남경(南京)을 삼으니 남해부(南海府)이며, 옥주(沃州), 정주(睛州), 초주(椒州)의 3개 주를 다스린다.
고구려(高句麗)의 옛 땅으로 서경(西京)을 삼으니 압록부(鴨淥府)이며, 신주(神州), 환주(桓州), 풍주(豐州), 정주(正州)의 4개주를 다스린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발해 5경 중 서경압록부는 지금의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궁홀산(弓忽山 : 구월산),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도 지금의 밀운수고 부근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 문화현(文化縣) 산천 조를 보면, “구월산(九月山)은 현의 서쪽 10리에 있는데, 곧 아사달산(阿斯達山)이다. 일명 궁홀산(弓忽山)이라고도 하고, 일명 증산(甑山)이라고도 하며, 일명 삼위(三危)라고도 하는데, 세상에 전해오기를 단군이 평양으로부터 백악(白岳)으로 옮겼다고 하는 곳이 곧 이 산이다.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이 당장경(唐藏京)으로 옮겼으며, 후에 도로 이 산으로 와서 은거하다가 신이 되었다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고적 조를 보면, “장장평(莊莊坪)은 고을(문화현) 동쪽 15리에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했던 곳이라 하며 그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황해도 구월산 부근이 고조선(왕검조선)의 세 번째 도읍지였던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 임을 알 수 있는데, 후세의 발해 서경압록부가 밀운수고 부근으로 나타나므로 결국 구월산은 지금의 밀운수고 동북쪽 가까이에 위치한 무령산(霧靈山, 해발 2,116m)으로 비정해 볼 수 있다.
이때 평양왕검성에서 백악산아사달로 도읍을 옮긴 것은 왕검조선(고조선)의 강역이 서남쪽(중국방향)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서남쪽 방향에 위치한 요동 부근으로 도읍을 옮겼을 것이다.
☆ 발해의 중경현덕부는 내몽골 파림우기, 상경용천부는 파림좌기, 동경용원부는 고륜기, 남경남해부는 옹우특기, 서경압록부는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부근으로 비정되므로, 문화 구월산(九月山 : 궁홀산, 아사달산)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흥륭현 무령산(霧靈山)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구월산(九月山)이라는 산 이름은 원래의 궁홀산(弓忽山)에서 유래된 듯하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 구월산이 옛날 단군이 당장경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 은거하다가 신이 되었다는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첫 도읍 우수하벌판(牛首河之原)의 아사달과 세 번째 도읍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을 헷갈린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규원사화 단군기에 속말 땅이 기후가 춥고 토질이 나빠서 들이 넓기는 하지만 농사짓기가 남쪽보다 좋지 않고, 속말의 강물이 북쪽으로 흘러 혼동강으로 들어가므로 남쪽과의 교통이 불편하여 도읍을 아사달에서 평양왕검성으로 옮기게 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첫 도읍 아사달이 속말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게 하고, 또 “단군왕검이 나라를 다스린 지 30여년에 홍수를 만나 패수가 넘쳐 나고 평양이 물에 잠겨 네 아들을 보내 적당한 땅을 두루 살피게 했다. 그리하여 (수재를 당한 백성들이) 아사달 아래 당장의 땅을 차지하고 살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당장경을 건설한 이유가 평양지역에서 수재를 당한 백성들을 이주시키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으므로 당장경(장당경)은 첫 도읍 아사달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고, 고조선(왕검조선)의 마지막 단군이었던 고열가가 일단 당장경(장당경)으로 갔다가 다시 가까이 위치한 아사달로 들어감으로써 결국 왕검조선(고조선)이 소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때 단군 고열가는 권력을 잃자 옛날 왕검조선의 건국시조였던 단군왕검께서 평양의 수재 입은 백성들의 이주를 위해 첫 도읍 아사달 부근에 건설했던 당장경으로 갔다가 그 가까이의 우수하벌판(牛首河之原)에 위치했던 아사달로 들어갔던 것이지, 세 번째 도읍 백악산아사달로 되돌아갔던 것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