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주몽은 동부여(東扶餘)에서 도망쳐 어느 길을 따라 졸본(卒本)으로 왔으며, 처음 자리 잡은 비류수(沸流水) 중류는 지금의 어디일까? - 최초주장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동부여의) 왕자와 여러 신하들이 또 주몽을 죽이려고 꾀하니, 주몽의 어머니가 그 음모를 알고는 주몽에게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해하려 하니, 너의 재주와 지략을 가지고 어디를 간들 어떠하겠느냐? 여기에서 머뭇거리다가 욕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멀리 가서 큰일을 도모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사람과 더불어 벗을 삼아 엄호수[일명 개사수(盖斯水)라고도 하는데, 지금 압록(鴨綠) 동북쪽에 있다]까지 가서 물을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고, 뒤쫓아 오는 병사에게 붙들릴까 두려웠다.
주몽이 물에 대고 말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자손이요 하백(河伯)의 외손(外孫)이다. 오늘 도망을 하는데 뒤쫓는 자가 따라오면 어찌하란 말인가?” 하였더니, 이때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가 되었으므로 주몽은 건널 수 있었고,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져 버렸으므로 말 탄 추격병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가다가 모둔곡(毛屯谷)[위서에는 보술수(普述水, 필자주 : 보살수(菩薩水) 즉 살수(薩水)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에 이르렀다고 하였다]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사람은 삼베옷을 입고, 한 사람은 장삼을 입고, 또한 사람은 물풀로 엮은 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묻기를 “그대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며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하니 삼베옷을 입은 자는 이름이 재사(再思)라 하였고, 장삼을 입은 자는 이름이 무골(武骨)이라 하였으며, 물풀 옷을 입은 자는 이름이 묵거(黙居)라고 하였으나, 성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이 재사에게는 극(克)씨로, 무골에게는 중실(仲室)씨로, 묵거에게는 소실(少室)씨로 성을 삼게 하고, 곧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하늘의 명으로 나라의 기틀을 다지려 하는데 마침 이때에 세 현인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주신 것이 아니겠는가?”하고는 능력에 따라 각각 임무를 부여하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위서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에 이르렀다.
그 지방의 토양이 비옥하고, 산하가 험준하고 견고하여 도읍을 정하였으나, 미쳐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서 비류수(沸流水)가에 초막을 짓고는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고(高)로서 성을 삼았다.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왕이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고 그의 딸로써 아내를 삼게 하였는데, 왕이 죽으매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는 말도 있다][필자주 : 이 기록이 역사적 사실일 것이다]
이때 주몽의 나이 22세로서 한(漢)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B.C.37)이며, 신라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년(甲申年)이었다.
☆ 주몽은 북부여 천제 해모수(解慕漱)의 혈손으로서 그의 성씨는 고(高)씨가 아니라 해씨(解氏)였고, 기원전 79년에 동부여에서 태어나 22세 때인 기원전 58년 봄에 졸본으로 도망쳐 가서 졸본부여왕의 둘째 공주와 다시 혼인하였다. 그런데 이해 10월 졸본부여왕이 죽자 그 왕위를 물려받아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 지방이 말갈(靺鞨)부락과 인접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이 침범할까 하여 쳐서 물리치니, 말갈이 복종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이 비류수(沸流水) 중류에 채소 잎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그 상류에 사람이 사는 것을 알고, 사냥을 하면서 찾아 올라가 비류국(沸流國)에 이르렀다.
그 나라 왕 송양(松讓)이 나와 보고 말하기를 “내가 산골 구석에 외따로 살기 때문에 아직 군자를 만나보지 못했는데 오늘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이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에서 왔는지 전연 알지 못하겠소”하였다.
주몽이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자손으로서, 아무 아무 곳(필자주 : 비류수 중류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소”하였다.
송양이 말하기를 “우리는 여러 대째 왕이 되어 온 터에 땅이 적어 두 임금은 용납 할 수가 없고, 그대는 도읍을 정한지도 얼마 되지 않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떠하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에 분개하여 그와 말다툼을 하다가 다시 활쏘기로서 서로의 재주를 겨뤄 보았는데 송양은 주몽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2년 을유(B.C.36) 여름6월에 비류국왕 송양(松讓)이 와서 나라를 바치매, 그곳을 다물도(多勿都)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 지방의 주인으로 봉하였다.
고구려 말에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多勿)”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 지방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 글을 보면,
“엄호수(淹氵+虎水)[일명 개사수(盖斯水)라고도 하는데, 지금 압록(鴨綠) 동북쪽에 있다]”
“모둔곡(毛屯谷)[위서에는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졸본천(卒本川)[위서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비류수(沸流水)가에 초막을 짓고는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고(高)로서 성을 삼았다”라고 강과 냇물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으나 지금까지 그 정확한 위치를 밝힌 사람은 없었다.
☆ 한원 번이부 고구려(翰苑 藩夷部 高[句]麗) 조를 보면, “후한서와 그 지리지에 이르기를, 현토군 서개마현 마현의 마자수는 서북쪽에서 염난수로 흘러 들어와 서남쪽으로 서안평(필자주 : 안평)까지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강의 길이가 2천1백리이다 라고 하였고, 응소(應邵)는 말하기를, 마자수는 서쪽에서 염택(鹽澤)으로 흘러 들어온다고 하였다.
고(구)려기에도, 마자수(馬訾水)를 고구려에서는 일명 엄수(淹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이름은 압록수라고 하고, 물고기가 떠올랐다고 하는 이야기가 그 나라에 전해진다고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의 북경 동북쪽 백하(白河)와 밀운수고(密雲水庫), 조백하(潮白河)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고대의 압록강은 지금 한반도 북쪽의 압록강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고대의 태백산(太白山)이 지금의 북경 동북쪽 칠로도산산맥의 최고봉인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 2,067m)임을 밝혔고, 동부여는 내몽골 정람기 일원, 졸본(卒本)은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을 말하는 것으로 밝혔으며, 북부여는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일원, 고대의 요동(遼東)은 북경 일원, 현토군은 하북성 장가구시 서남쪽 회안성진(懷安城鎭) 부근으로 밝혔다.
따라서 주몽의 어머니 유화(柳花)가 아들인 주몽과 함께 자리 잡고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라는 강은 지금의 소난하(小灤河)로 비정되므로 주몽이 동부여(東扶餘)에서 도망쳐 졸본(卒本)으로 갈 때 지금의 소난하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패수(浿水)인 지금의 난하를 건너고, 살수(薩水)인 지금의 조하를 따라 내려와 압록강(鴨綠江)인 지금의 밀운수고에 도착한 후 그곳에서 졸본(卒本) 즉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을 향하여 서쪽 방향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주몽이 다른 곳이 아닌 하필 졸본을 향하여 도망친 것은 그곳이 바로 자신의 선조인 천제 해모수가 세웠던 나라 북부여(졸본부여의 전신) 땅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 주몽은 자신의 선조들이 왕국을 이루고 살았던 옛 고향으로 돌아왔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동 중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천신만고 끝에 졸본(卒本)에 도착한 주몽은 졸본천(卒本川)이 아닌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나라를 세웠다고 하고, 비류수 중류에 채소 잎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그 상류에 사람이 살 것으로 생각하고는 강을 따라 올라가 송양((松讓)의 비류국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고, 그 후 비류국왕 송양이 나라를 들어 바치자 그곳을 강역에 포함시키고는 다물도(多勿都)로 고치고, 송양을 다물후(多勿侯)로 봉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그리고 후일 주몽의 아들인 유리왕은 바로 이 다물후 송양의 두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몽이 졸본으로 와서 처음에 자리 잡고 살았다는 비류수(沸流水)는 지금의 어느 강을 말하는 것이며, 주몽은 지금의 어디쯤에 자리 잡았던 것일까?
비류수(沸流水)는 송양의 비류국(沸流國) 도읍성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용관진(龍關鎭)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쪽,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조악진(雕鶚鎭) 부근에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백하(白河, 필자주 : 고대의 졸본천, 압록강으로 비정되는 강이다)에 합류되는 홍하(紅河)로 비정되므로,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와서 처음에 비류수 중류에 자리 잡고 살았다면, 주몽은 바로 지금의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조악진(雕鶚鎭) 부근에 자리 잡고 살았을 것이다.
☆ 이맥의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를 보면,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필자주 : 동부여를 말한다)을 택하여 거기서 살다가 관가에 뽑혀 말지기로 임명되었다. 얼마 안 되어 관가의 미움을 사서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卒本)으로 왔다. 때마침 부여왕(졸본부여왕)은 후사가 없었다. 주몽이 마침내 부마(사위)가 되어 대통을 이으니 이를 고구려의 시조라 한다.
32년 갑오(B.C.27) 10월 북옥저를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33년) 을미년(B.C.26)에 도읍을 졸본(卒本)으로부터 눌현(訥見)으로 옮겼다. 눌현(訥見)은 지금의 상춘(常春) 주가성자(朱家城子)이다.
유리명제의 19년 또 눌현(訥見)으로부터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겼으니 또한 황성(皇城)이라고도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 홍하(紅河) 중류인 하북성 장가구시(張家口市) 적성현(赤城縣) 조악진(雕鶚鎭) 부근에 주가요촌(朱家窯村)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이 고구려가 초기에 졸본으로부터 눌현(訥見)으로 도읍을 옮겼었다고 기록에 나타나는 눌현이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졸본으로 비정되는 후성진의 서쪽 머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고, 또 주몽이 졸본으로 와서 처음에 자리 잡고 살았다는 비류수 중류에 해당하는 곳이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