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낙랑동부도위 화려성(華麗城)과 불내성(不耐城)은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을까? - 최초주장
삼국지 동옥저 전을 보면, “한(漢)나라는 그 땅이 넓고 멀어 단단대령의 동쪽을 나누어 동부도위(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고 치소를 불내성(不耐城)에 두어 별도로 대령 동쪽의 7개현을 관할하게 하였다............건무 6년(A.D.30) 변경의 군을 줄일 때 도위도 폐지하고 그 후 모두 현의 거수로서 현후를 삼으니 불내(不耐), 화려(華麗), 옥저(沃沮) 등의 여러 현이 모두 후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 예전에도, “예(濊 : 동예)는 남쪽으로는 진한(신라), 북쪽으로는 고구려, 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다. 지금 조선(고조선, 위만조선)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백성이 2만호이다............한 무제가 조선(위만조선)을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네 군으로 만들었다............단단대령(單單大嶺)의 서쪽은 낙랑에 속했으며, 단단대령의 동쪽 일곱 개현은 낙랑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가 통치하는데, 그 백성이 모두 예인(濊人)이다. 뒤에 낙랑동부도위를 폐지하고 거수로서 현후를 삼았다. 지금의 불내예(不耐濊)는 모두 그 종족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 사서들에는 불내성(不耐城)과 불이성(不而城)을 헷갈리게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삼국지 예전을 보면, “정시6년(A.D.245)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단단대)령 동쪽의 예(동예)가 고구려에 복속되자 군사를 일으켜 정벌했는데, 불내후(不耐侯)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정시8년(A.D.247) (위나라의) 대궐에 와서 조공하므로 불내예왕(不耐濊王)으로 봉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북사 고구려전을 보면, “정시6년(A.D.245) 관구검이 다시 토벌하니 위궁(동천왕)은 가벼운 차림으로 장수와 여러 가(加)만 거느리고 옥저로 달아났다. 관구검은 장군 왕기로 하여금 그를 추격하도록 하여 옥저를 지나 1천여리를 쫓아 숙신의 남쪽에 이르러 바위에 공적을 새기고 또 환도산(필자주 : 옥저산의 오기?)에도 불내성(不耐城)이라 새기고 돌아갔다”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한데, 환도산에 불내성이라고 새겼다는 것은 오기로 보이고,
또 전한서 권28하 지리지 제8하의 낙랑군(樂浪郡) 조를 보면, “불이현(不而縣)은 동부도위의 치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불내성(不耐城)의 오기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7년(A.D.40) 조를 보면, “가을9월 화려(華麗), 불내(不耐) 두 현 사람들이 공모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신라의)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으나 맥국(貊國)의 거수가 군사로서 곡하(曲河 : 필자주 : 지금의 대릉하를 말하는 듯)의 서쪽에서 요격하였으므로 패하게 되었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貊國)과 우호를 맺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같은 왕 19년(A.D.42) 조를 보면, “가을8월 맥국(貊國)의 거수가 사냥을 하여 잡은 짐승을 바쳤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맥국(貊國), 화려현, 불내현 등이 신라(新羅)와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53년(A.D.105) 조를 보면, “왕이 한(후한)나라 요동(遼東)에 장수를 보내어 6개현을 약탈하게 했더니 요동태수 경기가 군사를 내어 항전하매 왕의 군사가 대패하였다.
가을9월 경기가 맥인(貊人)들을 쳐부수었다”라고 맥인이 등장하고,
또 66년(A.D.118) 조를 보면, “여름6월 왕이 예(濊), 맥(貊)과 함께 한(漢)나라 현토(玄菟)를 습격하고,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했다”라고 예, 맥이 동시에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신라(新羅)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에 도읍하고 천년 왕조를 이룬 나라였고, 동예(東濊)는 발해시대의 책성, 동경용원부, 우리 삼국시대 신라의 하슬라, 명주지역을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의 내몽골 오한기(敖漢旗), 나만기(奈曼旗), 고륜기(庫倫旗) 부근으로 밝혀졌으며, 맥국(貊國)은 능원(凌源) 부근, 옥저(沃沮)는 지금의 내몽골 적봉(赤峰), 옹우특기 일원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전한낙랑군은 하북성 승덕시 부근, 후한 낙랑군은 하북성 흥륭현 부근, 단단대령(單單大嶺)은 지금의 칠도도산산맥을 말하는 것으로 밝혀졌으므로 낙랑동부도위는 곧 지금의 칠로도산(七老圖山) 동쪽에 위치했을 것이다.
따라서 화려현이나 불내현은 지금의 칠로도산 동쪽인 내몽골 객라심기(喀喇沁旗) 일원으로 비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노합하(老哈河) 상류 서쪽과 칠로도산 동쪽에 화려성과 불내성이 위치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 고대역사에서 그 위치가 아리송했던 화려성(華麗城)과 불내성(不耐城)의 위치를 찾은 것이다.
위 그림을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