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임나(任那) 종발성(從拔城)의 위치와 호태왕비문 영락10년(A.D.400) 조의 이해 - 최초공개
위 그림과 아래의 호태왕비문 영락9년(A.D.399)조, 영락10년(A.D.400)조 그리고 영락14년(A.D,400)조를 비교하여 보면,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와 신라, 가야, 백제, 왜국, 대방 그리고 임나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고, 필자가 왜 임나(任那)가 한반도 남쪽이 아닌 하북성 진황도시 부근에 위치했으며, 임나(任那) 종발성(從拔城)의 위치가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 산해관고성(山海關古城) 부근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영락 9년(A.D.399) 기해년 조
[쟁점 : 고구려 평양,하평양,신라,백잔(대륙백제),임나,왜국의 위치]
九年 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영락 9년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왕이 하평양을 순수하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이뢰기를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왜인이 그 나라(신라)의 국경에 많이 와서 성과 못을 파괴하고 백성들을 노비로 삼고 있으니 왕에게 귀의하여 명령을 청한다고 하였다.
太王恩慈 稱其忠誠 特遣使還 告以密計
왕이 은혜와 자비로서 그 충성심을 칭찬하고 특별히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밀계를 내렸다.
영락 10년(A.D.400) 경자년 조
[쟁점 : 고구려,신라,가야,아라가야(안라),임나왜,임나가라와 종발성의 위치]
十年 庚子 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
영락 10년 경자년에 교시로서 보기병 5만으로서 가서 신라를 구하라 하였다.
從南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까지 왜인으로 가득했는데 관군이 그곳에 이르니 왜적이 퇴각했다.
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安羅人 戌兵拔新羅城
왜의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에 있던 안라인들이 즉시 항복하므로 신라성 군사들을 뽑아 지키게 하고,
☆城 倭寇大潰 城內十九盡拒隨倭安羅人 戌兵新羅城
..성에서 왜구를 크게 궤멸시키고 성내에서 왜를 따라 항거하는 안라인 열에 아홉을 모두 쳐부수고 신라성 군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 결락 ..........................
殘倭潰逃 拔☆城 安羅人 戌兵
나머지 왜구가 궤멸되어 도망치자 ☆성에서 병사를 뽑아 안라인을 지키게 하였다.
昔新羅寐錦 未有身來論事 ☆☆☆☆
옛날에는 신라의 매금이 직접 와서 보고하지 않았으나
廣開土境好太王 ☆☆☆☆ 寐錦 ☆家僕勾請 ☆☆☆朝貢
광개토경호태왕이 (신라를 구해준 이후에는) 신라매금이 스스로 가복이라 칭하며 명령을 청하고, 조공을 바쳤다.
영락 14년(A.D.404) 갑진년 조
[쟁점 : 고구려 평양성,임나왜,백제,대방의 위치]
十四年 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和通殘兵☆石城
영락 14년 갑진년에 왜가 감히 대방 경계를 넘어 들어와 백잔병과 화통하여 ☆석성을 침공하였다.
☆連船 ☆☆☆
...배를 잇대어...
王躬率往討 從平穰☆☆☆鋒相遇 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기 위하여 평양으로부터 가다가 ...봉에서 마주쳤다.
王幢要截盪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왕이 적을 막아서며 대열을 끊고 우왕좌왕하는 적을 죽이니 왜구가 궤멸하고 패했다.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