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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高句麗)라는 국호는 정말 언제부터 불리워졌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21. 4. 24. 14:12

윤여동설 고구려(高句麗)라는 국호는 정말 언제부터 불리워졌을까? - 최초주장

 

 

   고구려(高句麗)”라는 국호는 과연 언제부터 불리워졌을까 하는 것은 우리 역사 연구자들 모두의 공통 관심사일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추모왕(주몽왕) 조를 보면,

   “졸본천(위서에는 홀승골성에 이르렀다고 하였다)에 이르러 그 지방의 토지가 비옥하고 산천이 준험함을 보고 드디어 도읍을 정하려 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고(高)씨로 성(姓)을 삼았다.[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졸본부여왕이 아들이 없었는데, 왕이 주몽을 보고는 비범한 사람이라 판단하고는 그의 공주로써 아내를 삼게 하였고, 왕이 죽으매 주몽이 왕위를 이어받았다는 말도 있다] 이때가 주몽의 나이 22세로서 한(漢)나라 효원제의 건소2년(A.D.37)이며, 신라시조 혁거세21년 갑신년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역사 연구자들은 이 기록에 따라 고구려의 건국 시기는 기원전 37년 갑신년이었고, 고구려(高句麗)라는 국호가 이때 정해졌으며, 고구려 왕실의 성씨는 고씨(高氏)이고, 주몽이 왕위에 오른 때의 나이가 22세였다고 했으므로 주몽의 출생년도를 기원전 58년 계해년으로 인식하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필자가 연구해 본 바에 의하면, 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은 많은 부분이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주몽의 출생신분에 대하여 명확히 기록하지 않음으로서 그의 성씨를 잘못 기록했고, 또 출생년도를 잘못 기록함으로써 고구려의 건국년도도 헷갈리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범장(范樟)의 북부여기(北夫餘紀)와 이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를 보면,

  주몽의 혈통이 북부여 천제 해모수에 닿아 있어 그의 출생신분이 북부여의 왕족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고,

  출생년도 역시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기원전 58년 계해년이 아니라 기원전 79년 임인년에 차릉(岔陵, 岔凌의 오기인 듯 : 동부여)이라는 곳에서 태어났고,

  기원전 58년 계해년에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부여로 가서 졸본부여왕의 부마가 되었다가 같은 해 10월에 이르러 졸본부여왕이 죽자 그 왕위를 이어받아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를 보면, “주몽이 북부여(필자주 : 동부여의 오기)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부여왕이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졸본부여왕이) 주몽을 보고는 비범한 사람이라 여기고 둘째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그 왕위를 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필자가 주몽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과 여러 상황들을 대입하고 비교해 본 결과 이 북부여기와 태백일사의 기록이 매우 합리적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주몽의 출생신분에 대하여 북부여 천제 해모수(解慕漱)의 혈통을 이어받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리군왕(槀離郡王) 해진(解辰)의 손자인 해불리지(解弗離支)가 하백의 딸 유화(柳花)를 겁탈하여 세상에 태어났다고 기록함으로써 주몽이 북부여 왕가의 혈손으로서 해씨(解氏) 임을 명시하였고,

   주몽이 동부여에서 왕궁의 말지기가 되었었으나 얼마 안 되어 관가의 미움을 받았다고 하였는데, 이는 아마 주몽의 신분이 알려지게 되어 해부루왕의 양아들 신분으로서 당시 동부여 태자로 봉해져 있었던 금와가 자신의 태자 자리가 주몽으로 인하여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 주몽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급히 졸본으로 도망쳐 갔던 것이 아닌가 싶고,

   친구 세 사람과 함께 급히 동부여에서 졸본부여로 도망쳐 온 주몽이 아무런 정치적 기반이나 지지 세력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졸본으로 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것을 선뜻 믿기가 어려웠는데, 북부여기나 태백일사는 주몽이 졸본으로 온 후 졸본부여왕의 부마가 되었고, 얼마 후 졸본부여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러한 것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高句麗)”라는 국호가 과연 언제부터 정해지고 불리워졌을까 하는 것을 추정해 보려고 한다.

   사서의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보면, 주몽은 고씨(高氏)가 아니라 북부여의 건국시조 해모수(解慕漱) 천제의 후손으로서 해씨(解氏)가 확실하고, 기원전 79년에 동부여에서 태어났으며, 22세 때인 기원전 58년에 동부여에서 무슨 큰 사건에 연루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자 졸본으로 도망쳐 와서 졸본부여왕의 둘째공주와 혼인을 함으로써 왕의 부마가 되었다가 왕이 죽자 그 왕위를 물려받아 졸본부여의 3대 왕위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 고구려 2대 유리왕, 3대 대무신왕, 4대 민중왕, 5대 모본왕까지는 해씨(解氏)로 나타나고, 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궁(宮)으로부터는 성씨가 다른 고씨(高氏)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필자는 고구려의 해씨왕들은 추모왕(주몽)의 친손이고, 고씨왕들은 외손으로 본다.  

 

   따라서 고구려(高句麗)”라는 국호가 정해진 시기를 여러 각도에서 추정해 볼 수 있게 된다.

   첫째, 태백일사의 기록에 의하면, 주몽의 증조할아버지로 나타나는 해진(解辰)이 북부여 때 고리군왕(槀離郡王 : 구려)에 봉해졌었다고 하였는데, 주몽은 기원전 58년에 졸본부여의 왕위에 오르자 옛날 북부여 때 자신의 증조할아버지인 해진(解辰)에게 봉해졌던 그 땅의 이름을 따서 졸본부여라는 국호를 버리고 숭고한 구려라는 의미로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로 바꾸고 건국시조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주몽은 군사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졸본부여왕의 부마 자격으로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으므로 왕위에 오르자마자 기존의 국호인 졸본부여를 버리고 새로운 국호인 고구려로 바꾸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후 어떠한 계기가 있었다면 국호를 바꿀 수도 있었을 것인데, 주몽왕이 졸본부여의 왕위에 오른 지 15년쯤이 지난 기원전 43년경에 주몽왕은 연타발의 딸로서 당시 아들 둘 딸린 청상과부였던 소서노와 재혼을 했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이를 왕비가 살아 있었으나 제2비를 맞아 들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이때쯤 주몽왕과 혼인했던 왕비 즉 졸본부여 둘째공주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새로이 왕비를 맞아들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기원전 42년 기묘년에 이르자 소서노는 졸본을 떠나 한산부근으로 가버리는 것이다.

   이는 주몽왕이 동부여에 있는 자신의 아들인 유리가 오면 그를 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소서노로서는 졸본에 있어봤자 자신의 아들들(비류와 온조)을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릴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왕비도 죽고, 소서노도 떠나버리자 주몽왕은 마음을 다잡고,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기원전 37년에 이르러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꾼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삼국사기에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 전해졌을 것이다.

   셋째, 주몽왕이 죽고 그 아들인 유리왕이 왕위에 오른 후인 서기 3년에 이르자 졸본으로부터 국내로 도읍을 옮겼다.

   그런데 이때 새로 옮긴 도읍 국내성(國內城)이 구려(句麗) 지역으로 나타나므로 국내로 도읍을 옮긴 이후부터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서기 12년에 중국 신()나라의 왕망이 유리왕을 하구려후(下句麗候)라고 격하 시켜 부르게 했다는 기록이 존재하므로, 이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이때 고구려(高句麗)라는 국호가 중국에도 알려졌기 때문에 비하하는 의미로 하구려(下句麗)라고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구려(句麗)의 호족인 고여달(高閭達)에게 시집갔던 추모왕(주몽왕)의 딸(추모왕과 졸본부여 둘째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의 후손인 태조대왕 고궁(高宮)이 왕위에 오르자 이때까지 사용해오던 졸본부여(卒本扶餘)라는 국호를 버리고, “고씨(高氏)의 구려(句麗)”라는 의미로 고구려(高句麗)로 국호를 바꾸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는 고구려 6대왕으로 기록되어 있는 고궁(高宮)에게 나라를 처음 창건한 왕에게나 붙일 수 있는 태조(太祖)라는 시호를 붙였기 때문에 그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지금에 이르러 우리의 고구려가 언제, 어떤 이유로 고구려(高句麗)”라는 국호를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후대에 이르러서는 또 왜 고려(高麗)로 불리우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위와 같은 여러 이유 중 하나로 처음에 고구려(高句麗)라는 국호가 정해지게 되었을 것이다.

 

[추모왕(주몽왕)의 일생]

 

기원전 79년 임인년 1세 주몽 동부여에서 출생

                               아버지는 북부여 천제 해모수의 증손자 해불리지(解弗離支) 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 류화(柳花)

         78년 계묘년 2

         77년 갑진년 3

         76년 을사년 4

         75년 병오년 5

         74년 정미년 6

         73년 무신년 7

         72년 기유년 8

         71년 경술년 9

         70년 신해년 10

         69년 임자년 11

         68년 계축년 12

         67년 갑인년 13

         66년 을묘년 14

         65년 병진년 15

         64년 정사년 16

         63년 무오년 17

         62년 기미년 18

         61년 경신년 19

         60년 신유년 20세 주몽 동부여에서 예씨와 혼인(추정)

         59년 임술년 21

         58년 계해년 22세 주몽이 동부여서 졸본부여로 도망()

                                주몽이 졸본부여왕의 둘째공주와 재혼(왕의 부마됨)

                                졸본부여왕 붕()(10)

                                주몽 졸본부여 왕위에 오름(10)

                                졸본부여의 국호를 새로이 고구려라 바꾸었을 가능성

                                주몽의 아들 유리 동부여에서 출생

          57년 갑자년 23

          56년 을축년 24세 졸본부여 둘째공주가 주몽의 딸을 낳음(추정)

          55년 병인년 25

          54년 정묘년 26

          53년 무진년 27

          52년 기사년 28

          51년 경오년 29

          50년 신미년 30

          49년 임신년 31

          48년 계유년 32

          47년 갑술년 33

          46년 을해년 34

          45년 병자년 35세 주몽과 혼인했던 왕비(졸본부여왕의 둘째공주) 사망(추정)

          44년 정축년 36

          43년 무인년 37세 주몽이 연타발의 딸인 소서노와 재혼(추정)

          42년 기묘년 38세 소서노가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졸본을 떠나

                                 진번 남쪽 한산 아래로 옮겨감

          41년 경진년 39

          40년 신사년 40

          39년 임오년 41세 주몽의 딸 구려의 호족 고여달(高閭達)과 혼인(18세추정)

          38년 계미년 42

기원전 37년 갑신년 43세 삼국사기에 의한 고구려건국년도

                                 이때 주몽과 구려가 사돈관계를 맺음으로 해서 구려가 주몽의 영향권에 들어옴.

                                 이때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었을 가능성.

          36년 을유년 44

          35년 병술년 45

          34년 정해년 46

          33년 무자년 47

          32년 기축년 48

          31년 경인년 49

          30년 신묘년 50

          29년 임진년 51

          28년 계사년 52

          27년 갑오년 53

          26년 을미년 54

          25년 병신년 55

          24년 정유년 56

          23년 무술년 57

          22년 기해년 58

          21년 경자년 59

          20년 신축년 60

기원전 19년 임인년 61세 첫 부인 예씨와 아들 유리 동부여로부터 도망쳐 졸본으로 옮(4)

                                 추모왕(주몽왕) ()(9)(61)

                                 아들 2대 유리왕 왕위계승(40)

 

☆ 이후 유리왕이 도읍을 구려지역인 국내성으로 옮긴 후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고, 또 서기 53년에 추모왕(주몽왕)의 외손자의 후손인 6대 태조대왕 고궁(高宮)이 왕위에 올라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엄격한 의미에서는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기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호태왕비문을 보면, 추모왕(주몽왕)을 건국시조로 기록하고 있고, 19대 호태왕(광개토왕)이 시조 추모왕의 17세손(필자주 : 사실은 추모왕의 17세 외손이었다)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역사를 추모왕(주몽왕)으로부터 보는 것이 옳다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