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백제 방어의 요충 탄현(炭峴)과 백강(白江), 기벌포(伎伐浦)의 진짜위치 - 최초공개
삼국유사 기이 제1 태종 춘추공 조를 보면,
“정관 15년(A.D.641) 신축에 (의자왕이) 왕위에 오르자 주색에 빠져서 정사는 어지럽고 나라는 위태로웠다.
좌평 성충이 힘 써 간했지만 듣지 않고 오히려 그를 옥에 가두니 몸이 쇠약해져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으나 성충이 글을 올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다 했습니다. 원하옵건대 한마디 말씀만 올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시국의 변화를 살펴보니 반드시 병란이 있을 것 같습니다.
대체로 용병은 그 지세를 잘 가려야 하는 것인 즉 요충지에 진을 치고 적을 맞아 싸우게 되면 사직을 보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만일 외국 군사가 오거든 육로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험한 곳에 의지하여 적을 막아야 합니다.’하였으나 왕은 그 말을 깨닫지 못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A.D.660) 조를 보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 나라 고종이 조서를 내려 좌위대장군 소정방으로 신구도행군대총관을 삼아 좌위장군 유백영과 우무위장군 풍사귀와 좌효위장군 방효공 등과 더불어 군사 13만을 거느리고 백제로 와서 치게 하고 겸하여 신라왕 김춘추로서 우이도행군총관을 삼아 자기 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당 나라 군사와 세력을 합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 현 산동반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나라의 서쪽 덕물도에 이르니 신라왕이 장군 김유신을 보내어 정병 5만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우느냐 지키느냐 하는 적당한 방법을 물으니 좌평 의직이 나서서 말하기를 “당 나라 군사가 멀리 바다를 건너 왔으므로 물에 익숙하지 못한 것들이 배에서 피곤하여졌을 것이므로 그들이 처음 육지에 올라 군사들의 기운이 회복되지 못할 때에 갑자기 쳐버리면 뜻대로 될 수 있을 것이요, 신라 사람들은 큰 나라의 응원을 믿기 때문에 우리를 경멸히 여기는 마음을 먹을 것이나 만약 당 나라 군사들이 불리하게 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머뭇거리면서 두려워서 감히 빨리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당 나라 사람들과 결전을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다.
달솔 상영 등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 나라 군사가 멀리 와서 속히 싸우려 할 것이니, 그 서슬을 당할 수 없을 것이요, 신라 사람들은 전일에 여러 차례 우리 군사에게 패배를 당하였기 때문에 이제 우리 군사의 기세를 바라보고 겁을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오늘의 계책으로는 당 나라 군사들이 들어오는 길을 막아서 그들의 군사가 피곤하여지기를 기다리면서 우선 적은 군사로 하여금 신라 군사를 쳐서 그의 예봉을 꺾은 후에 그 형편을 보아서 싸우게 되면 군사를 완전히 유지하며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왕이 머뭇거리면서 누구의 말을 쫓아야 할지 몰랐다.
이 때에 좌평 흥수(興首)가 죄를 짓고 고마미지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왕이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묻기를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였다.
흥수가 말하기를 “당나라 군사는 숫자가 많을 뿐만 아니라 군사 규율이 엄명하고, 더구나 신라와 연합하여 우리의 앞뒤를 견제하고 있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진을 대치한다면 승패를 가늠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백강[白江 혹은 기벌포라고도 한다]과 탄현[炭峴 혹은 침현이라고도 한다]은 우리 나라의 요충으로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 막아도 1만 명이 이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날랜 군사를 선발하여 그 곳에 가서 지키게 하여 당 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면서 대왕께서는 성문을 여러 겹으로 닫고 굳게 지켜 그들의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곤하여 질 때를 기다려서 그렇게 된 뒤에 심하게 치게 되면 기필코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 말에 대하여 대신들은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는 오래동안 옥중에 있으면서 임금을 원망하며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니 그 말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당 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강을 따라 배가 나란히 가지 못하게 하며,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으로 넘게 하여 좁은 길에서 나란히 오지 못하게 하고 이러한 때를 타서 군사를 풀어 치게 되면 마치 둥우리에 든 닭과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니 왕이 그 말을 곧이 들었으며,
또한 당 나라와 신라 군사들이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 계백(堦伯)을 시켜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나가서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는데 네 번 싸워서 다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하고 계백은 죽음을 당하였다.
그제야 군사를 모아 가지고 웅진구(? : 필자주 : 기벌포가 아닐까?)를 막고 강가에 군사를 배치시켰더니 소정방이 강의 좌측(동쪽)으로 올라와서 산에 의지하여 진을 치니 그들과 싸워서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이때 당 나라 수군은 조수가 밀려오는 기회를 타서 배들을 잇대어 북을 울리고 떠들면서 들어오고, 소정방은 보병, 기병들을 거느리고 곧 바로 진도성(眞都城 : 사비성) 30리(一舍) 외곽까지 와서 멈추었다.
우리 군사들이 모조리 나가서 싸우다가 또 패하여 죽은 자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 나라 군사는 승세를 타서 성에 육박하였다.
왕이 패망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한스럽게도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고 드디어 태자 효(孝)를 데리고 북쪽 변경(필자주 : 웅진을 말한다)으로 달아났다.
소정방이 성(사비성)을 포위하니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자신이 왕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 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왕의 아들 융(隆)에게 이르기를 “왕께서는 태자와 함께 나가 버렸고 숙부가 자기 마음대로 왕 노릇을 하고 있으니 만일 당 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물러가게 되면 우리들의 생명을 어떻게 보전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측근자들과 함께 밧줄을 타고 성을 넘어 나가니 태가 이를 만류하지 못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들을 시켜 성에 뛰어 올라 당나라 깃발을 세우니 태는 사태가 긴박하게 되어 성문을 열고 목숨을 살려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때에 왕(의자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들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소정방이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륭, 연(演) 및 대신, 장군과 지휘관 88명과 백성 1만2천8백7명을 당 나라 서울로 호송하였다.
백제는 원래에 5부, 37군, 2백 개성, 76만 호로 되어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지역을 나누어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 등 5개의 도독부를 두어 각각 주, 현들을 통할하게 하고 거수들을 발탁하여 도독, 자사, 현령을 삼아서 관리하게 하고 낭장 유인원에게 명령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고 또한 좌위낭장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임명해서 남은 백성들을 무마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사로잡은 사람들을 임금(당 고종)에게 바치니 임금이 그들을 꾸짖은 후 용서하여 주었다.
왕(의자왕)이 병으로 죽으니 그를 증금자광록대부위위경으로 추증하고, 옛 신하들이 조문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조서를 내려 손호, 진숙보 등의 무덤 옆에 장사하고 그 무덤들과 나란히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위 기록을 아래 지명과 연결시켜 해석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서의 기록과 현장이 일치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윤여동설에 의한 현재의 지명비정]
서라벌(徐羅伐) :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평양성(平壤城) : 하북성 승덕시(承德市) 피서산장(避暑山莊)
웅진성(熊津城) :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盧龍縣) 노룡고성(盧龍古城)
사비성(泗沘城) : 하북성 당산시 난현(灤縣, 난주라고도 한다)
탄현(炭峴) : 하북성 진황도시 무령(撫寧)에서 노룡(盧龍)으로 넘어가는 고개
황산벌(黃山伐) :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황토영촌(黃土營村) 부근
기벌포(伎伐浦) :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 난하 동안 정안진(靖安鎭) 부근
백강(白江) : 난하(灤河) 하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