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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한반도 울주 천전리각석 명문은 흉노족들의 작품 - 최초주장

윤여동 2021. 7. 24. 19:58

윤여동설 한반도 울주 천전리각석 명문은 흉노족들의 작품 - 최초주장

 

 

      [울주 두동면 천전리각석]

 

  [한반도 흉노족왕국의 왕족들이 새긴 천전리각석 명문]

 

              [한반도 흉노족왕국의 왕족들이 새긴 천전리각석 명문 탁본]

 

   우리의 신라(新羅)는 한반도 경주에 도읍하고 있던 나라가 아니라 사실은 지금의 발해 북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에 도읍하고 천년왕조를 이은 나라였고, 그곳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가 신라의 천년 도읍지 서라벌(徐羅伐)이었다. 따라서 신라의 왕성이었던 금성(金城), 월성(月城) 등도 그곳에 있었고, 신라 왕릉들 역시 그 부근에 조성되었다.[필자주 :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고려로부터 그 이전 우리의 대륙 상고사와 고대사를 제대로 해석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한반도 경주에는 단1기의 신라왕릉도 조성된 적이 없고, 한반도 경주, 김해 등은 대륙에서 왕망의 신()나라가 멸망하자 왕망에게 적극 협조했던 투후 김일제의 고손자인 투후 김성[金星, 필자주 : 이 사람이 바로 경주 출토 비편에 나타나는 태조(太祖) 성한왕(星漢王)이다] 일파가 후한의 광무제에게 쫓겨 잡히면 죽게 되는 상황에 이르자, 대륙을 떠나 한반도 남부로 도망쳐 와서 경주, 김해 등을 중심으로 다시 흉노족왕국을 세운 흔적임을 알아야 한다.

 

한반도 남부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성한왕(星漢王) 김성(金星)을 태조로 하는 흉노족왕국의 국호는 전해지지 않았는데, 전북 익산 금마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무광왕(武廣王)의 반도백제 역사와 함께 이 흉노족왕국의 역사가 밝혀지는 날 한반도의 고대사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도깨비 방망이를 든 한반도 경주 괘릉 앞에 세워져 있는 서역인 무인상]

 

 

 [도깨비 방망이를 든 한반도 경주 괘릉 앞에 세워져 있는 서역인 무인상]

 

    [한반도에서 많이 출토되는 왕망의 신()나라 때 화폐인 화천(貨泉)]

 

     [한반도 경주 금관총(흉노족왕국 이사지왕릉) 출토 금관]

 

  한반도에서 발견된 북한산비, 감악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등과 울진봉평리비, 포항중성리비, 냉수리비, 단양적성비 등은 신라 진흥왕이 세운 비석이 아니라 한반도에 위치했던 어느 왕국의 왕이 세운 비석이다.

  한반도 남부에 신라는 없었고, 흉노족왕국이 오랜 세월 그 땅을 차지하고 지배했다.

  그리하여 한반도에서 왕망 때의 화폐인 화천(貨泉)이 많이 발견되는 이유이고, 한반도 경주의 고총들에 서역인의 무인상이 세워져 있는 이유이며, 그곳에서 흉노 문화의 유물들이 주로 발굴되는 이유이다.

   따라서 멋진 금관이 출토되는 한반도 경주의 고총들은 신라왕릉이 아니라 흉노족왕국의 왕들이 죽어 묻힌 왕릉들이고, 김해의 고분들도 당시 지배층이었던 흉노족들의 무덤이지 가야왕릉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 울주 천전리계곡에 그 멀리 발해 북쪽에 위치했던 신라의 왕족들이 목숨 걸고 수 천리 배를 타고 와서 놀러 갔을 리는 없는 것이고, 천전리에 가까이 위치했던 경주에 도읍하고 있던 흉노족왕국의 왕족들이 서석곡(書石谷 : 지금의 천전리각석계곡)에 놀러가서 기념으로 바위에 글을 새겨 놓은 것이다.

   그런데 천전리각석 명문에 갈문왕(葛文王)”이라는 명문이 나타나자, 우리 역사학자들은 한반도 경주가 신라의 천년도읍지 서라벌이었고, 이 갈문왕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타나는 신라갈문왕이라고 생각하고는 천전리각석명문이 당시 신라 왕족들이 놀러왔다가 새긴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여 모든 것을 신라 역사에 맞추어 해석하려 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일성이사금 15년 조의 주를 보면 新羅追封王皆稱 葛文王其義未詳(신라에서는 추봉된 왕을 모두 갈문왕이라 불렀는데, 그 의미는 미상하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신라에 갈문왕제도가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나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용하고 있었다니 혹시 외부에서 들어온 제도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필자의 주장처럼 한반도 남부에 위치했던 흉노족왕국에도 갈문왕(葛文王)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니 아마 이 갈문왕제도는 맨 처음 한반도의 흉노족왕국에서 사용하던 제도를 발해 북쪽 신라가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많고, 또한 한반도에서 발견된 북한산비의 명문에 군주(軍主)”라는 명칭도 나타나는데, 이 역시 신라에서도 군주(軍主)라는 군사책임자의 직급이 있었음을 볼 때 발해 북쪽에 위치했던 신라(新羅)와 한반도 남부에 위치했던 흉노족왕국 사이에는 상당한 수준의 문화적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던 흉노족왕국에 대한 기록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어 당장 그를 확인해 볼 수는 없겠으나, 언젠가는 한반도 남부의 흉노족왕국에 대한 기록이 나타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반도사관론자들의 엉터리 같은 주장들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 것이다.

   ! 우리 모두 한반도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반도백제의 기록과 흉노족왕국의 기록을 찾아보자.

 

우리 역사학자들이 한반도 경주를 신라의 도읍 서라벌로 인식함으로써 엉뚱하게도 경주김씨들이 흉노족 김일제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어, 대보공 김알지의 후손인 경주김씨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니 역사를 잘못 인식하면 이렇듯 엉뚱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