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타 하리(Mata Hari)
마타 하리(Mata Hari, 1876년 8월 7일 ~ 1917년 10월 15일)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첩자 혐의로 처형된 네덜란드 출신의 무용가인 마르하레타 헤이르트라위다 젤러(네덜란드어: Margaretha Geertruida Zelle)의 가명이다.
초기 생애
마타 하리는 네덜란드의 레이우아르던(Leeuwarden)에서 한 사업가의 딸로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어린 시절 유복한 삶은 끝나게 된다.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에서 복무한 네덜란드군 장교와 결혼했을 정도로 마타 하리의 가난한 삶이 시작되었다.
어머니가 자바계 혼혈로,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교사로서의 취직과 결혼(네덜란드군 장교와 결혼)에 실패한 뒤 파리로 이사했다. 마타 하리는 자바 섬에서 온 공주인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며 "동양식" 춤을 선보였으며, 이때 만든 "마타 하리"라는 이름은 말레이어와 인도네시아어로 '새벽의 눈' 이라는 뜻이다. 그의 이러한 기만은 군인이었던 남편을 따라 자바에서 살았던 경력 덕분이었다.
코르티잔과 스파이 활동
마타 하리는 코르티잔으로도 일하며 많은 장교들, 정치인들과의 스캔들을 남겼다. 마타 하리는 자신의 "정체" 가 네덜란드의 시골 출신이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자신의 정체에 대해 수많은 헛소문을 뿌렸다. 인도 어느 지역의 사제라는 것부터 자바의 공주라는 것 등의 헛소문과 억측이 난무하는 중에 팬들의 열정은 더욱 깊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베를린에 있던 마타 하리는 독일 정보기관에 2만마르크를 받는 조건으로 포섭돼 암호명 'H21호'로 연합군 고위장교들을 유혹, 군사기밀을 정탐해 독일군에 제공해 왔다.
당시 그가 수집한 정보는 연합군 5만 명의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고급정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영국의 정보기관이 베를린-마드리드간의 외교통신을 해독, 그녀가 스파이임을 밝혀내 프랑스 정부가 파리에서 그녀를 체포했고, 총살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마타 하리가 실제로 첩자였는지, 아니면 그것도 그녀가 뿌린 수많은 헛소문들 중 하나였는지는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 논란이 가중된 것은 1999년 영국 정보부 MI5가 한 정보보고서를 공개하며 마타하리가 'H21호'이라는 암호명으로 독일군에 주요 군사정보를 빼돌렸다고 자백했다는 프랑스측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밝혀 마타 하리 처형에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위키백과]
마타 하리(Mata Hari)
본명 마르가레타 게르트루이다 젤레, Margaretha Geertruida Zelle
출생 1876. 8. 7, 네덜란드 레바르덴
사망 1917. 10. 15, 프랑스 파리 근처 뱅센
국적 독일
[요약] 매혹적인 여성 스파이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녀가 벌인 첩보활동의 성격과 범위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제1차 세계대전중 독일 스파이로 활동한 혐의로 프랑스에서 총살당했다. 첫 결혼 후 자바와 수마트라에서 살다가 이혼한 그녀는 1905년 파리에서 레이디 매클라우드란 이름의 직업 무희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곧 마타 하리로 이름을 바꿨다. 이 말은 '태양'(글자 그대로는 '낮의 눈동자')을 뜻하는 말레이어이다. 평생 동안 많은 애인이 있었으며 대부분은 장교였다. 첩보활동에 관한 사실들은 아직도 뚜렷이 밝혀지지 않았다. 그녀가 이중첩자일 것이라는 의혹이 커지자 프랑스에서 1917년 체포했고,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마타 하리
그녀의 이름은 매혹적인 여성 스파이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녀가 벌인 첩보활동의 성격과 범위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제1차 세계대전중 독일 스파이로 활동한 혐의로 프랑스에서 총살당했다.
부유한 모자 상인의 딸로 태어나 레이덴교육대학을 다녔다. 1895년 스코틀랜드 출신 장교인 네덜란드 식민지군 소속 캠벨 매클라우드 대위와 결혼했고 1897~1902년 자바와 수마트라에서 살았다. 유럽으로 돌아온 후 이혼한 그녀는 1905년 파리에서 레이디 매클라우드란 이름의 직업 무희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곧 마타 하리로 이름을 바꿨다.
이 말은 '태양'(글자 그대로는 '낮의 눈동자')을 뜻하는 말레이어이다. 훤칠하고 아주 매력적이며 동인도의 춤을 어느 정도 출 줄 알았고, 대중 앞에서도 기꺼이 나체 출연을 했던 그녀는 파리를 비롯한 대도시에서 즉각 성공을 거두었다. 평생 동안 많은 애인이 있었으며 대부분은 장교였다.
첩보활동에 관한 사실들은 아직도 뚜렷이 밝혀지지 않았다. 한 자료에서는 그녀가 헤이그에 살고 있던 1916년 봄, 한 독일 영사가 찾아와 다음 프랑스 여행에서 그녀가 어떤 정보라도 얻어오면 돈을 주겠다고 제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군에 체포된 뒤 그녀는 몇몇 낡은 정보를 독일군 정보장교에게 제공했다는 것만 인정했다.
그녀는 그전에 독일 점령하의 벨기에에서 프랑스 스파이로 활동하는 데 동의한 적이 있었다고 진술했고, 아울러 프랑스 정보부에 독일과 접촉했던 사실도 거리낌없이 털어놓았다. 나중에는 연합군을 위해 독일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이며 영국 컴벌랜드 공작작위의 상속자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의 도움을 얻을 생각이었다고 진술했다. 헤이그에서 마타 하리와 독일군 장교가 접촉한 사실을 알린 것은 영국 쪽이었던 것 같다.
그녀가 이중첩자일 것이라는 의혹이 커지자 프랑스에서는 1917년 2월 13일 파리에서 그녀를 체포했다. 그녀는 수감되어 1917년 7월 24~25일 열린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당했다.
[출처 다음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