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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거란(요)의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 위치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 2021. 10. 2. 07:17

윤여동설 – 거란(요)의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 위치 찾기 – 최초주장

 

 

[거란() 중경대정부 추정지, 규모 가로세로 각 약700m, 좌표 동경1143327초 북위401218]

 

거란()5(五京)은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 남경석진부(南京析津府, 燕京),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서경대동부(西京大同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중국에서는 거란() 5(五京)의 위치에 대하여,

상경을 지금의 내몽골 파림좌기라 하고,

중경을 내몽골 영성이라 하며,

남경을 북경,

동경을 요녕성 요양,

서경을 산서성 대동이라 하는데,

이것은 서경대동부를 제외하고는 완전한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거란()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가 설치되었던 고대의 요동(遼東)이 지금의 요녕성 요양이 아니라 북경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 : 내몽골 파림좌기의 대형고성터는 거란(요)의 상경임황부가 아니라 발해의 상경용천부이다]

 

[위 : 내몽골 영성현의 대명진토성, 이곳은 요 중경대정부터가 아니라 고조선의 첫도읍 아사달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 중국에서 요 상경임황부터라고 하고 있는 내몽골 파림좌기 대성터는 발해의 상경용천부이고, 요 중경대정부터라고 하고 있는 영성현의 대명진토성은 고조선(왕검조선)의 아사달이었으며, 북경은 고대의 요동이었고, 요녕성 요양은 고대의 왜국 강역이었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거란() 상경은 지금의 내몽골 오란찰포시 상도(商都)이고,

중경은 그 대강의 위치는 비정할 수 있으나 그 확실한 위치는 불분명했었고,

남경은 하북성 역현(易縣) 부근이고,

동경은 옛 요동이었던 북경(北京)이며,

서경은 산서성 대동(大同)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필자의 연구에 따라 거란()의 상경임황부였던 지금의 내몽골 상도, 남경석진부였던 지금의 하북성 역현, 동경요양부였던 지금의 북경, 서경대동부였던 지금의 산서성 대동의 위치를 확정하고, 그 중간 지점에 위치했었을 거란()의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 위치를 비정해보면, 지금의 북경 서북쪽 하북성 장가구시(張家口市) 부근에 위치했었음에 틀림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지금 하북성 장가구시 부근에는 크고 작은 옛 성터들이 많이 있어 거란의 중경대정부터를 확정하기가 쉽지 않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서남쪽 동성진(東城鎭) 동쪽, 상간하변(필자주 : 요나라 때의 토하로 비정된다)에 가로, 세로 각 700m쯤 되는 고성터가 있는데, 바로 이 고성터가 요(거란)의 중경대정부터가 아닐까 생각된다.

 

장가구시 선화현에 매우 큰 고성터인 선화고성이 있는데, 이는 고구려의 신성터로 보이기 때문에 요 성종 때 새로 지었다는 요(거란)의 중경대정부터로 볼 수는 없다.

 

위 필자가 그린 요(거란) 5경의 위치를 보시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참고]

요사지리지

中京大定府

虞爲營州

夏屬冀州

周在幽州之分

秦郡天下 是為遼西

漢為新安平縣 漢末步奚居之 幅員千里 多大山深谷 阻險足以自固

魏武北征 縱兵大戰 降者二十餘萬 去之松漠

其後拓拔氏乘遼建牙於此 當饒樂河水之南 溫渝河水之北

唐太宗伐高麗 駐蹕於此(?)

部帥蘇支從征有功 奚長可度率眾內附 為置饒樂都督府

咸通以後 契丹始大 奚族不敢復抗 太祖建國 舉族臣屬

聖宗嘗過七金山土河之濱 南望雲氣 有郛郭樓闕之狀 因議建都 擇良工於燕薊董役二歲 郛郭 宮掖 樓閣 府庫 市肆 廊廡 擬神都之制

統和二十四年 五帳院進故奚王牙帳地 二十五年 城之 實以漢戶 號曰中京 府曰大定

皇城中有祖廟 景宗 承天皇后御容殿 城池湫濕 多鑿井泄之 人以為便

大同驛以待宋使 朝天館待新羅使 來賓館待夏使

有七金山 馬盂山 雙山 松山 土河

 

중경대정부

중경대정부는 순임금 때 영주에 속했다.

하우 때는 기주에 속했으며

주 때는 유주로 나뉘었다.

진의 천하일 때는 요서가 되었고,

한 때에는 신안평현이 되었다

한 말에 해족이 들어와 그곳에 살았는데, 폭원이 천리이고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아서 조험하므로 스스로 방어하기에 충분하였다

위무제가 북쪽으로 정벌할 때 항복한 자가 10여만 명이었고 나머지는 송막으로 도망갔다

그 후에 북위의 척발씨가 이곳에 아장을 세우고 요 땅을 다스렸는데 요락하 남쪽으로부터 온유하 북쪽까지이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칠 때 이곳에서 주필하였다(?)[필자주 : 이 기록은 의문스럽다]

해부의 장수인 소지가 따라가 공을 많이 세웠다. 해의 우두머리 가도가 무리를 거느리고 내부하여 요락도독부를 두어 다스렸다

당 의종 함통(860~874) 이후 거란이 강대해지자 해족이 다시는 항거하지 못했다. 태조가 건국하자 부족을 들어 신속하였다

성종이 일찍이 칠금산과 토하의 물가를 지날 때 남쪽을 바라보니 운기가 서려 있고 부곽과 누궐의 형상이 나타나므로 이곳에 도성을 세우고자 하였다

연과 계에서 장인들을 뽑아 2년 동안 부곽 궁궐 누각 부고 시사 낭무를 세웠는데 신도의 법도를 헤아렸다

요 성종 통화 24년에 오장원까지 진출하였는데 옛 해왕의 아장이 있던 곳이다.

25년에 그곳에 성을 쌓고 한나라 사람들로 채우고 중경이라 하고 부는 대정이라 하였다

황성가운데 조묘가 있는데 경종과 승천황후의 어용전이다

성의 연못이 말라 우물을 많이 파니 사람들이 편리하게 사용하였다

대동역은 송()의 사신을 대접하며, 조천관은 신라(新羅)의 사신을 대접하며, 내빈관은 하()의 사신을 대접한다

칠금산 마우산 쌍산 송산 토하가 있다

 

宋王曾上契丹事曰

出燕京北門 至望京館 五十裏至順州 七十裏至檀州 漸入山五十裏至金溝館 將至館 川原平曠 謂之金溝澱 自此入山 詰曲登陟 無復裏堠 但以馬行記日 約其裏數 九十裏至古北口 兩傍峻崖 僅容車軌 又度德勝嶺 盤道數層 俗名思鄉嶺 八十裏至新館 過雕窠嶺 偏槍嶺 四十裏至臥如來館 過烏灤河 東有灤州 又過摸鬥嶺 一名渡雲嶺 芹菜嶺 七十裏至柳河館 松亭嶺甚險峻 七十裏至打造部落館 東南行五十裏至牛山館 八十裏至鹿兒峽館 過蝦蟆嶺 九十裏至鐵漿館過石子嶺自此漸出山七十裏至富穀館八十裏至通天館二十裏至中京大定府 城垣卑小 方圓纔四裏許 門但重屋 無築闍之制 南門曰朱夏 門內通步廊 多坊門 又有市樓四 曰天方 大衢 通闤 望闕 次至大同館 其門正北曰陽德 閶闔 城內西南隅岡上有寺 城南有園圃 宴射之所 自過古北口 居人草庵板屋 耕種 但無桑柘 所種皆從壟上 虞吹沙所壅 山中長松鬱然 深穀中時見畜牧牛馬橐駝 多青羊黃豕

 

송 왕증의 상거란사에 이르기를,

연경(남경석진부) 북문으로 나오면, 망경관에 이르며,

50리를 가면 순주에 이른다.

70리를 가면 단주에 이르러 서서히 산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50리를 가면 금구관에 도달하는데 대저 관에 이르면 냇물의 발원지가 평평하고 넓어서 이를 금구전이라 한다.

이곳에서부터 산지로 들어가며 힐곡과 등척으로 리수나 이정표를 말하기 어렵다.

다만 마행기에 이르기를, 대략 그 리수로

90리를 가면 고북구에 이르는데, 양 옆이 험준한 절벽이라서 겨우 마차가 갈 수 있다.

다시 덕승령을 지나는데 굽은 능선길이 여러 층으로 되어 있어 속명이 사향령이다.

80리를 가면 신관에 이르고 조과령을 지나는데 창령으로 치우쳐 있으며

40리를 가면 와여래관에 이른다. 오란하를 지나가며 동쪽은 란주이고 다시 모투령, 일명 도운령을 지나면 근채령이며, 70리를 가면 유하관에 도달한다. 송정령은 심히 험준하며

70리를 가면 타조부락관에 이르고 그 동남으로

50리를 가면 우산관에 이른다.

80리를 가면 녹아협관에 도착한다. 하마령을 지나

90리를 가면 철장관에 이르러 석자령을 지나는데 이곳에서부터 점차 산지 밖으로 나오게 된다.

70리를 가서 부곡관에 도착하여

80리를 가면 통천관에 이르며

20리를 가면 중경대정부에 도착한다

성의 울타리는 낮고 협소하며 방원은 겨우 4리 정도이다. 성문만 다만 이중으로 된 지붕을 가졌으니 도성의 문을 쌓는 법도가 없다할 것이다. 남문은 주하라 부르며 문 안으로 보랑이 통하여 있고 방문이 많다. 또한 시루가 4개인데 천방 대구 통환 망궐이라 한다. 그 뒤로 대동관에 이른다. 그 문의 정북은 양덕이라 하며 문은 닫혀있다.

성내의 서남 모퉁이 언덕 위에는 절이 있다. 성의 남쪽에는 원포가 있는데 연회 시 활쏘기를 하는 곳이다.

고북구를 지나면서부터는 사람들이 초가집에 살며 씨를 뿌리고 논밭을 가는데 다만 산자는 없다. 그 종자들은 모두 밭두둑위에 뿌리는데 바람이나 모래가 그곳을 메울까봐 염려된다. 산중에는 장송으로 무성하며 곡식이 무성할 때에는 우마나 탁타와 많은 청양과 황시를 목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