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한반도 지리산은 가짜, 진황도 창려의 갈석산(碣石山)이 진짜 지리산(智異山)이었다 - 최초주장
[역사의 착각 신악갈석(神岳碣石). 진황도 창려에 있는 가짜 갈석산을 진짜처럼 믿게 만들고 있는 갈석산 표지석]
삼국사기 신라본기 42대 흥덕왕 3년(828) 12월 조를 보면,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문종이 인덕전에서 그를 불러 차등을 두어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사신 대렴이 차(茶) 종자를 가지고 왔으므로 왕이 지리산(地理山, 智異山)에 심게 하였다.
차(茶)가 선덕왕(선덕여왕) 때부터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매우 유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茶) 종자를 지리산에 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 삼국사기 기록을 읽고는 이때 가져온 차 종자를 한반도 지리산에 심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가야의 원래위치는 한반도가 아니라 북경 동쪽, 발해 북쪽이었다.
고조선의 왕검성(王儉城), 고구려의 평양성은 하북성 승덕시(承德市)였고,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는 하북성 당산시 난현(灤縣)이었으며,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은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였으며, 가야의 도읍 금관성은 호로도 흥성시(興城市)였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따라서 지금 진황도 창려의 갈석산은 옛 갈석산(碣石山)이 될 수 없는 것이다.
☆ 한반도 경주는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이 아니라 투후 김일제의 후손인 흉노족 김성(金星) 일파가 왕망의 신(新)나라가 멸망하자 한반도로 도망쳐 와서 세운 흉노족왕국의 도읍이었다. 이 김성이라는 사람이 비편에 나타나는 태조성한왕(太祖星漢王)이다. 따라서 경주의 고총들은 신라왕릉이 아니라 흉노족왕국의 왕릉들인 것이고, 금관이나 석굴암, 불국사, 첨성대 등도 신라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흉노족들의 작품인 것이다.
[고지도 우공구주산천지도 속 항산(恒山)과 갈석산(碣石山)은 매우 가까이 인접해 있던 산이었다. 옛 항산(지금의 대무산)은 북경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원래의 갈석산도 그 가까이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옛 갈석산이었던 지금 하북성 보정시의 낭아산 풍경]
대개의 경우 옛날 중국과 동이의 경계였던 갈석산(碣石山)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에 있는 낭아산(狼牙山)으로서 그 산이 바로 옛날 중국의 아홉 황제들이 올랐다는 진짜 갈석산(碣石山)이다.
[당 태종이 갈석산에 올라 읊었다는 춘일관해 시비]
그렇다면 지금 진황도 창려의 갈석산이 원래는 무슨 산이었을까?
지금 발해 북쪽 진황도 창려에 있는 갈석산(해발 695m)은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에서 가져 온 차 종자를 심었다는 바로 그 지리산(地理山, 智異山)인 것이다.
☆ 지금의 북경 부근이 고대의 요동이었음을 먼저 인식해야 우리 삼국사기 기록 속의 고조선(왕검조선), 삼한(마한, 진한, 변한),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 과 가야 그리고 후백제와 고려가 한반도가 아닌 발해 북쪽, 북경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고, 잃어버린 우리의 대륙 역사 강역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한반도의 지리산은 삼국사기 기록 속의 지리산이 아니라 가짜인 것이다.
지리산에는 고려 때 사람인 이인로가 찾으려다 끝내 찾지 못했다는 전설의 장소인 청학동(靑鶴洞)이 있다고 전해 오는데, 이제 진짜 지리산을 찾았으니 푸른 학이 살고 있어 그리 불렀다는 진짜 청학동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