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세 부여(북부여, 졸본부여, 동부여)의 삼각관계 – 최초주장
단군왕검 천제 해씨 해씨
넷째아들 해모수 |→ 해모수 북부여 → 해부루 동부여(가섭원부여)
부여 → 부여 → |
|→ 동명왕 졸본부여 | → 추모 고구려(해씨,고씨)
부여씨 |
| → 온조 백제(부여씨)
☀ 단군왕검의 넷째 아들이었던 부여씨(扶餘氏)의 맥이 졸본부여의 동명왕과 백제 온조왕으로 이어졌으니 백제가 고조선(왕검조선)의 정통맥을 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역사상 나타나는 부여(扶餘)는 넷이다.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의 서쪽방향에 위치했으며, 단군왕검의 넷째 막내아들 부여(扶餘)에게 봉했던 원래의 부여(扶餘)가 있었고,[필자주 : 하북성 장가구시 일원]
고조선(왕검조선) 말기에 왕실의 외척으로 보이는 해모수(解慕漱)가 기원전 239년에 원래의 부여를 차지하고 왕위에 올라 그 후손으로 왕위를 이어갔으나,
기원전 108년의 혼란한 시기에 이르러 단군왕검의 넷째이들(막내아들) 부여(扶餘)의 혈손으로 보이는 부여두막루(扶餘豆莫婁 : 필자주 : 이가 곧 동명왕이다)가 부여의 남부 지역인 졸본을 차지하고 졸본부여(卒本扶餘)를 세우게 되어 이때 부여는 두 나라로 분국 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역사에서는 북쪽에 위치했던 부여는 북부여(北扶餘)라 하게 되고,[필자주 :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일원]
남쪽에는 졸본부여(卒本扶餘)가 위치하게 된다.[필자주 :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 일원]
그랬다가 기원전 86년 동명왕(東明王)의 졸본부여가 북부여를 병합하게 되자 북부여의 해부루가 북부여 유민들을 이끌고 동북쪽 창해군 예(濊)가 위치한 가섭원(迦葉原) 땅으로 옮겨가 그 땅을 빼앗아 차지하고 다시 부여를 재건하게 되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동부여(東扶餘)라 한다.[필자주 : 내몽골 석림곽륵맹 정람기, 다륜 일원]
☆ 동부여는 가섭원을 중심으로 사방 수천리의 강역을 가진 대제국을 이루어 580여 년간 유지하다가 결국 고구려 문자왕 때 고구려에 복속되어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동부여를 찾으려면 지금의 난하[필자주 : 옛 패수이다] 최상류인 내몽골 다륜, 정람기 부근으로 가야한다.
한편 동부여에게 그 땅을 빼앗긴 창해군 예(濊)는 동쪽으로 향하여 개마산을 넘어 동쪽 대해(大海) 가에 위치한 임둔[필자주 : 후일의 명주이다] 땅으로 옮겨가 다시 그 땅을 차지하고 예를 재건하게 되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동예(東濊)라 한다.[필자주 : 내몽골 통요시 고륜기 일원]
☆ 동예(東濊)에게 그 땅을 빼앗긴 임둔(臨屯) 사람들이 그대로 동예에 동화되어 소멸하고 말았는지, 그곳을 떠나 대해를 건너 어딘가로 옮겨 갔는지는 지금 잘 알 수 없다.
한편 원래의 부여 땅을 통합했던 졸본부여는 후일 추모왕의 고구려로 거듭나게 되고,
졸본부여 동명왕의 후손인 온조왕은 졸본을 떠나 대수와 패수를 건너 진번 남쪽 한산 부근으로 장소를 옮겨 그곳에 백제를 건국하게 되는 것이다.
☆ 후일 백제의 성왕이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했던 것은 백제 왕실이 동명왕이 세웠던 졸본부여의 영광을 다시 한 번 재현해 보고자 하는 염원의 발로였다고 볼 수 있다.
[졸본으로 추정되는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의 풍광]
[옛 부여와 북부여의 도읍성으로 추정되는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동부여의 중심강역 난하 최상류 섬전하 유역, 사서에는 동부여의 강역이 동이 중에서 가장 평탄하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