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사서의 기록과 다른 한반도 경주 안압지(雁鴨池)의 위치 – 최초주장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 불우(佛宇) 조를 보면,
“天柱寺 在月城西北 ○俗傳炤智王射琴匣而倒,乃是寺僧也。其北有雁鴨池”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해석해 보면,
“천주사는 월성 서북쪽에 있다. 속전에 소지왕이 거문고갑을 활로 쏘아 쓰러뜨렸더니 그 속에 있던 자가 바로 이 절의 중이었다 한다. 그 북쪽에 안압지가 있다”라는 뜻이다.
즉 신라 월성(月城)의 서북쪽에 천주사(天柱寺)가 있었고, 그 천주사의 북쪽에 안압지(雁鴨池)가 위치하고 있었다라는 의미이다.
결국 원래의 안압지는 월성의 서북쪽 방향에 위치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한반도 경주의 안압지(雁鴨池)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달리 월성(月城)의 동북쪽 방향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 한반도 경주의 황룡사지 역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월성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 황룡사지는 월성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데, 사실 이러한 현상은 너무도 많다.
그런데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우리 역사학자들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할 때 잘못 기록했던 것일까?
그런데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고대의 요동(遼東)은 지금의 북경(北京) 일원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고,
고구려와 백제는 그 요동 동쪽 1천여리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였으며,
고구려의 동남쪽, 백제의 동쪽에 신라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사서들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는 우리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가야가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발해 북쪽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인 것이다.
☀ 많은 역사연구자들이 바로 이것 즉 고대 요동(遼東)의 위치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대륙상고사와 대륙고대사를 잘못 이해하고 있고, 우리가 지금 한반도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대륙 상고사와 고대사를 잘못 해석하게 되어 고려로부터 그 이전의 역사해석이 완전 엉터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 : 신라 천년도읍지 서라벌인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와 진한6부 배치도]
[위 : 신라 서라벌인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의 신라 월성터, 천주사터, 안압지터의 추정위치]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 고적(古跡) 조를 보면,
“월성(月城)은 경주부 동남쪽 5리에 있다.
파사왕(婆娑王) 22년에 쌓았는데,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기 때문에 이름 지은 것이다. 토축으로써 둘레가 3천23척이다.
처음 탈해왕이 어렸을 때에, 토함산에 올라가 성중에서 살 만한 곳을 바라보다가, 양산(楊山)의 한 봉우리가 일월(日月)의 형세와 같음을 보고, 곧 내려가 찾아보니, 곧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몰래 그곳에 숫돌과 숯을 묻어놓고 호공에게 말하기를, ‘이곳은 우리 할아버지의 집이었습니다‘하니, 호공이 다투어 변명하다가 드디어 관아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관아에서 말하기를, “무엇을 가지고 너의 집이란 것을 증명하겠느냐?” 하니, 탈해가 말하기를 “우리 집은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깐 이웃 마을에 간 사이에 남에게 빼앗겼습니다. 땅을 파서 징험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땅을 파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다. 드디어 탈해에게 주어서 살게 하였으니 이곳이 바로 월성(月城) 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지금 많은 사람들은 이 신라 월성(月城)에 관한 기록이 한반도 경주의 월성터에 관한 기록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천년 도읍지 서라벌(徐羅伐)은 한반도의 경주가 아니라, 발해 북쪽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일원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우리 신라의 월성(月城), 금성(金城), 만월성(滿月城), 명활성(明活城) 등 왕성들은 한반도의 경주가 아닌 소릉하(小凌河)가 지나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고, 천주사(天柱寺), 안압지(雁鴨池)도 그 부근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비록 신라가 역사에서 사라진지 천년도 더 지났지만 그곳에는 아직까지도 옛 신라의 흔적들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으니...........
위 그림을 보시라.
☆ 한반도의 경주는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이 아니라 흉노족인 투후 김일제의 후손으로서 왕망의 신(新)나라 건국에 적극 가담했던 투후 김성(金星)이 후한의 광무제에게 쫓겨 대륙을 떠나 한반도 남부로 도망쳐 와서 흉노족 왕국을 세운 것으로서 한반도 경주는 그 도읍이었고, 이 “김성(金星)”이라는 인물이 바로 “태조성한왕(太祖星漢王)”으로 비편의 명문에 나타나는 주인공이다.
따라서 지금 한반도 경주의 유적, 유물들은 유목민족인 흉노족들이 남겨 놓은 것들이지 신라인들이 남겨 놓은 것이 아닌 것이다.
지금 한반도 경주나 김해 등지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대부분 유목민 문화와 닿아있는 것은 아직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이러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우리 역사의 미스테리 모두를 명명백백 밝혀낼 수 있는데, 왜 그 “인식의 전환”을 못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세월을 더 기다려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