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신라 달구벌(達句伐)의 진짜 위치를 찾았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9년(A.D.689) 조를 보면, "왕이 달구벌(達句伐)로 도읍을 옮기려다가 실현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지금 이 기록을 본 우리는 이때 신라의 신문왕이 도읍을 서라벌(徐羅伐)로부터 달구벌(達句伐)로 옮기려고 시도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은 신라의 천년 도읍 서라벌(徐羅伐)을 한반도 경주(慶州)라고 하고 있고, 이때 신문왕이 도읍을 옮기려고 했던 달구벌(達句伐)이 대구(大邱)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정말 역사적 사실일까?
그런데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의 신라(新羅)는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가 아니라, 지금의 발해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가 바로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徐羅伐)이었다.
☆ 고구려의 졸본(卒本)은 지금의 북경 북쪽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 부근이고, 국내성(國內城)은 북경시 연경구 영녕진(永寧鎭)이며, 환도성(丸都城)은 회유구 발해진(渤海鎭), 평양성(平壤城)은 하북성 승덕시(承德市)이며, 백제의 북한산(북한산)은 지금의 진황도 도산(都山)을 말하는 것이고, 웅진(熊津)은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盧龍縣)이며, 사비(泗沘)는 하북성 당산시 난주시(灤州市)이다. 그리고 가야의 금관성(金官城)은 요녕성 호로도시 흥성시(興城市)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의 도읍 개경(開京)은 하북성 승덕시 관성만족차지현(寬城滿族自治縣)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환인환국, 환웅단국, 고조선(왕검조선) 그리고 삼한과 삼국, 가야 그리고 고려까지도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가 아니라 지금의 발해 북쪽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엉터리 역사학자들의 엉터리 같은 주장을 우리 역사의 진실로 믿고 어이없게 속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한반도 경주(慶州)에는 어떠한 왕조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일까?
한반도 경주(慶州)는 왕망(王莽)의 신(新)나라에 적극 협조했다가 후한의 광무제에게 쫓기게 된 흉노족인 투후 김일제의 후예들이 한반도 남부로 도망쳐 와서 세운 흉노족왕국의 도읍이었다.
금석문에 “태조(太祖) 성한왕(星漢王)”으로 나타나는 인물이 바로 흉노족인 투후 김일제의 후예로서 한반도 남부로 도망쳐 와서 흉노족 왕국을 세운 김성(金星)이다.
따라서 한반도 경주나 김해 등지에 조성된 고총들은 신라왕릉이나 가야왕릉이 아니라 흉노족왕국의 왕릉 또는 호족들의 무덤인 것이다.
지금 한반도 경주, 김해 등지의 고총들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주로 유목민족과 관련 있는 문화유물이 출토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당시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에 도읍하고 있었으며, 삼국을 통일했던 신라의 신문왕은 과연 지금의 어디로 도읍을 옮기려 했었던 것일까?
찾고 보니 달구벌(達句伐)은 서라벌(徐羅伐)이었던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에서 서남쪽으로 20km쯤 떨어진 요녕성 호로도시 금성진(金星鎭) 일원으로서, 지금의 여아하(女兒河) 남쪽 평원지역이었다.
☀ 신라의 달구벌(達句伐)로 비정되는 지금의 요녕성 호로도시 금성진(金星鎭)은 임둔태수장 봉니가 출토된 태집둔(台集屯)에서 매우 가까운 곳이다.
옛 한사군 때의 임둔군은 지금의 내몽골 통요시 고륜기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서 명주(강릉)를 말하는 것이다. 명주는 임둔군 이후에는 동예(東濊)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