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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장보고의 진짜 청해진(淸海鎭)은 산동반도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 부근이 확실 – 최초주장

윤여동 2022. 2. 25. 14:40

윤여동설 장보고의 진짜 청해진(淸海鎭)은 산동반도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 부근이 확실 최초주장

 

[위 : 백제가 해양강국으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것은, 대륙백제와 반도백제, 그리고 열도백제와 왜국, 중국 등을 오가며 무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산동성은 옛 탐라와 동청주로서 백제 동성왕 때부터 우리의 백제 땅이 되었던 곳이었을 것인데, 후세 신라말 장보고도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동청주의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상왕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대청광여도 산동반도 부분 지도 속 정해(靖海)와 적산(赤山)의 위치]

 

[위 : 장보고의 청해진(淸海鎭)은 지금의 산동성 위해시 문등구 후가진(侯家鎭) 부근으로 비정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42대 흥덕왕 3(A.D.828) 조를 보면, 여름4월 청해대사(淸海大使) 궁복(弓福)의 성은 장씨(張氏)[다른 이름은 보고(保皐)이다]이다.

  당나라 서주(徐州)로 가서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가 뒤에 본국으로 돌아와 왕을 만나 뵙고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청해를 지키게 되었다.[청해(淸海)는 지금의 완도(莞島)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완도(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자 우리 역사학자들은 한반도의 전남 완도(莞島)에 장보고의 청해진(淸海鎭)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고, 완도를 구석구석 뒤져 보았으나 그곳에서 신라 흥덕왕 때 설치했던 청해진(淸海鎭)의 확실한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우리의 신라(新羅)는 한반도에 위치했던 나라가 아니라 지금의 발해 북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필자주 : 이곳이 서라벌이다)에 도읍하고 천년왕조를 이루었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가 흥덕왕 때 설치했던 완도(莞島)의 청해진(淸海鎭)은 발해 주변에서 찾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신라 장보고가 세웠다는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이 지금의 산동반도 끝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石島鎭)839년 당시에 이미 세워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828년에 설치된 장보고의 청해진(淸海鎭)이 적산법화원 부근에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말이 되는 것인데, 청나라 때의 지도인 대청광여도를 보면, 산동반도 끝에 적산(赤山)과 정해위(靖海)가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적산(赤山)은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이 위치한 곳이고, 정해위(靖海)는 신라 흥덕왕 때 설치한 청해진(淸海鎭)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보면 신라 청해진(淸海鎭)의 흔적이 청()나라 때까지도 정해위(靖海)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 상의 정해위(靖海)는 지금은 산동성 위해시 문등구 후가진(侯家鎭)으로 지명이 바뀌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46대 문성왕 8(A.D.846) 조를 보면, 이해에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조정에서 보낸 염장이라는 자객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13(A.D.851) 조를 보면, “2월에 청해진(淸海鎭)을 폐하고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옮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청해진은 828년으로부터 장보고가 846년에 죽고 난 후인 851년까지 24년간 존속했고, 적산법화원은 청해진을 폐하기 훨씬 전인 839년 당시에 이미 세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지금 그 위치가 아리송한 청해진(淸海鎭)이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 가까이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지금의 산동반도는 언제부터 우리의 땅이 되었던 것일까?

  지금에 이르러 아주 먼 옛날의 일은 알 수 없겠으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24대 동성왕 20(A.D.498) 조를 보면, “8월에 왕이 탐라(耽羅)에서 공납과 세금을 바치지 않는다하여 그를 몸소 치려고 무진주(武珍州)에 이르니 탐라에서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므로 중지하였다.[탐라(耽羅)는 곧 탐모라(耽牟羅)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미 이전에 탐라[필자주 : 후일의 제주(濟州)]가 백제에 부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필자가 판단하기로는 이는 아마 동성왕 때 백제(百濟, 필자주 : 대륙백제이다)가 북위(北魏)와의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북위로부터 탐라를 배상금으로 획득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고 또 청해(완도) 지역도 이때 함께 획득했을 것이다.

  그런데 백제가 다른 곳이 아닌 탐라와 청해(완도) 지역을 배상금으로 요구했던 것은 이때 백제는 대륙백제(필자주 : 발해 북쪽, 북경 동쪽 난하 하류 부근)와 반도백제(필자주 : 한반도 서부지역에 무광왕이 세운 나라)가 대륙과 한반도에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두 백제를 오가는데 중간 기항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며,

  백제는 이 해상 교통의 요충지인 탐라와 청해(완도) 지역을 차지하게 되어 이로부터 해양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고, 후일 신라의 장보고도 이러한 지리적 잇점을 이용하여 주변국과 활발하게 교역을 할 수 있어 부와 권력을 움켜 쥘 수 있었을 것이다.

 

탐라(탐모라) 즉 제주(濟州)는 지금 한반도의 제주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발해 남쪽 산동반도 부근에 위치했을 제주를 말하는 것이다.

  옛날 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 고구려 유민이었던 이정기(李正己)가 당나라 때 세운 제()나라 부근에 우리의 탐라, 탐모라 즉 제주가 위치했었을 것이다.

 

  그리고 571년에 북제(北齊)에서 백제 27대 위덕왕(재위 : 554-598)에게 보내온 작위를 보면, “사지절 도독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使持節 都督 東靑州諸軍事 東靑州刺史)”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위덕왕 때 백제가 동청주(東靑州)지역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말인데, 역사적으로 "청주(靑州)"는 발해 남쪽인 지금의 산동성 청주시(靑州市) 부근을 말하는 것이므로 동청주(東靑州)는 그 동쪽인 지금의 산동반도 청도시(靑島市), 연태시(烟台市), 위해시(威海市) 등 그 일원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옛날 백제 위덕왕 때 지금의 산동반도 전체를 백제가 차지하게 되었다는 말이 되는 것인데, 이때 북제(北齊)에서 왜 갑자기 동청주(東靑州) 지역 전체에 대한 관할권을 백제 위덕왕에게 주게 되었는지 그 확실한 내막은 아직 알 수 없으나 북제는 몇 년 뒤인 577년에 소멸하고 만다.

  그리고 그 후 백제가 멸망한 직후인 신라 30대 문무왕 2(A.D.662)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이 와서 항복하였다. 탐라국(耽羅國)은 무덕(武德, A.D.618-626, 필자주 : 사실은 앞선 시기인 백제 동성왕 때부터였을 것이다) 이래 백제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좌평으로 삼았던바 이때에 이르러 항복하여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라 42대 흥덕왕이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장보고를 책임자로 임명했으며, 바로 그 장보고가 지금의 산동반도 끝에 적산법화원을 설치했던 것인데, 이를 보면,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 땅이었던 탐라와 동청주 지역을 신라가 계승하여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혹시 백제 멸망 후 당나라와 신라가 백제 땅을 놓고 전쟁까지 할 정도로 갈등을 겪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탐라와 동청주 지역을 당나라에게 빼앗겼다가 819년 이사도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신라가 군사를 파병한 대가로 당나라로부터 탐라와 동청주 지역을 반환받아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앞선 신라 33대 성덕왕 때인 733년에 발해말갈이 등주(登州, 필자주 : 동옥저 지역의 등주를 말한다)를 침공하자 당나라에서 신라에게 군사의 지원을 요청했었는데, 신라가 그에 응하자 735년에 이르러 패하(패수) 이남 땅을 당나라가 신라에게 돌려주는 조치를 취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사도의 난 때도 군사지원 대가로 신라에게 옛 백제 땅을 돌려주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 때 군사를 동원하여 지원한다면 공짜는 없는 것인데,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당나라 조정에서 산동성에 제()나라를 세운 이정기(李正己)에게 내려준 관작을 보면, “평로치청절도관찰사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 검교공부상서 어사대부 청주자사(平盧淄靑節度觀察使 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 檢校工部尙書 御史大夫 靑州刺史)”라 되어 있는데, 이 중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는 바닷길을 이용하는 신라국과 발해국의 사신과 교류에 관한 모든 것을 관장한다는 뜻으로서 이는 신라와 발해의 모든 사신왕래와 물품교역권을 독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이정기는 아마 이 독점권을 활용하여 대단히 큰 이권을 챙겼을 것이다.

  이는 지리적 위치상 신라국(新羅國)과 발해국(渤海國) 사신이나 교역상들이 바닷길을 이용하여 당나라 장안(長安, 필자주 : 지금의 섬서성 서안)에 오갈 때는 반드시 이정기(李正己)의 제()나라 지역을 경유해서 가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인데, 사실 신라는 지금의 발해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발해국은 신라의 북쪽인 지금의 내몽골 적봉시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나 발해국에서 당나라의 장안으로 갈 때는 반드시 제() 지역을 통과해야 한다. 그리하여 신라와 발해국이 양존하던 시기를 우리 역사에서 남북국시대라고도 하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지금의 산동반도는 우리 옛 땅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산동에 사는 사람들은 중국의 한족(漢族)과는 전혀 다른 외모와 풍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산동 사람들은 우리와 피를 나눈 형제들이었던 것이다.

  앞으로 우리의 고대 역사가 명명백백 밝혀지는 날, 지금의 산동반도가 우리의 옛 땅이었음이 확인될 것이고, 머지않은 훗날 그곳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