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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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온조백제, 대륙백제)의 진짜 건국지는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북경 동쪽, 진황도 도산(都山) 남쪽이 확실하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22. 5. 13. 10:13

윤여동설 백제(온조백제, 대륙백제)의 진짜 건국지는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북경 동쪽, 진황도 도산(都山) 남쪽이 확실하다 - 최초주장

 

 

 

 

 

 

 

  후한서(後漢書)에는 낙양 동북 3,600리에 요동군(遼東郡)이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고, 중국 사서들에는 한 결 같이 요동(遼東) 동쪽 1천여 리에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가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지금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으로 요동(遼東)은 한반도의 압록강 북쪽을 말하는 것인데, 요동 동쪽 1천여리에 고구려와 백제가 위치하고 있었다면, 백두산 부근에 백제가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후한서(後漢書)에 기록되어 있는 낙양 동북 3,600리는 지금의 어디쯤을 말하는 것일까?

  한반도의 압록강 북쪽 요녕성 요양(遼陽)이 정말로 후한서에서 말하는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600리쯤 떨어져 있는 고대의 요동군(遼東郡)이었을까?

  그런데 고대의 10리는 지금처럼 4km가 아니라 2.3km쯤에 해당했다고 한다. 따라서 후한서가 말해주는 낙양 동북 3,600리는 지금 중국의 도읍인 북경(北京) 부근이 된다.

 

낙양에서 북경까지의 고속도로 거리는 약 800km쯤 된다.

 

  뭣이라? 지금의 중국 북경이 고대의 요동군이었다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필자의 주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의 주장이 옳다면?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우리의 백제(백제 : 온조백제, 대륙백제)가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 중국의 북경 동쪽 230km쯤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자 그러면 충실하게 사서의 기록에 따라 지금의 북경에서 동쪽으로 230km쯤을 가보면 지금의 어디쯤에 도달할까?

  우리 백제(百濟)의 건국지 한산부아악(漢山負兒嶽)”위례성(慰禮城)”을 찾아가 보자.

  백제(온조백제, 대륙백제)의 건국지를 찾을 때 가장 중요한 지명은 당연히 한산부아악(漢山負兒嶽)”위례성(慰禮城)”의 위치를 찾는 일이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비류와 온조 형제가 신하들과 함께 한산 부아악에 올라 도읍할 만한 곳을 살폈는데, 이때 신하들이 이 하남(河南)의 땅은 북대한수(北帶漢水)하고, 동거고악(東據高岳)하며, 남망옥택(南望沃澤)하고, 서조대해(西阻大海)하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했으나 비류는 그에 반대하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미추홀(彌鄒忽)로 가버렸고, 온조는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한 후 후일 백제로 거듭나게 되고 강국이 되었기 때문인데, 문제는 지금 우리는 백제의 첫도읍지 위례성의 위치를 잃어버려 아무도 위례성이 지금의 어디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논란을 빚고 있는 것이다.[필자주 :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인 1145년에도 이미 위례성의 위치를 잃어버렸다고 하였다]

 

하나의 나라를 세우려고 했다면 형인 비류가 미추홀로 가버릴 때 동생인 온조나 신하들이 함께 미추홀로 따라 가야 했겠으나, 동생인 온조가 별도로 위례성에 도읍하고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비류와 온조가 쌍둥이 형제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어머니 소서노(召西奴)가 쌍둥이 두 아들에게 각각의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허락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부아악(負兒嶽)”이라는 의미는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 형상이 나타나는 산이라는 뜻이고, 고대의 요동(遼東)이 지금의 중국 북경(北京)으로 밝혀졌으며, 중국 사서들에는 요동 동쪽 1천여리에 고구려와 백제가 위치한다고 하였고,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업고 있는 형상의 산이 북경 동쪽 1천여리에 위치하였으며, 북한산(北漢山)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도산(都山) 남쪽 당산시 천안시 건창영진 북쪽 노군태(老君台)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곳이 곧 한산부아악(漢山負兒嶽)이었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그 한산부아악과 위례성을 엉뚱하게도 한반도 서울에서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산부아악(漢山負兒嶽)에서 신하들이 도읍지로서 적당하다고 건의한 지형이 한산부아악의 북쪽에 나타나고, 온조는 바로 그곳에 도읍하고 위례성(慰禮城)이라고 했다가 후일 도읍을 남한성(南漢城), 한성(漢城)으로 옮겨 백제라는 강국으로 거듭났다가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당시 도읍이었던 한성(漢城)이 함락되자 웅진(熊津)으로 옮겼다가 다시 사비(泗沘)로 옮겨 678년 왕조를 문 닫게 되는 것이다.

 

한반도에는 4세기 중반에 대륙백제(온조백제)에서 근초고왕과의 왕위쟁탈전에서 패하고 한반도로 건너온 무광왕(武廣王)이 세운 백제(반도백제)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