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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살수이남(薩水以南)과 패수이남(浿水以南)의 진짜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 2022. 6. 17. 10:49

윤여동설 살수이남(薩水以南)과 패수이남(浿水以南)의 진짜위치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0(A.D.37) 조를 보면, “왕이 낙랑(樂浪)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27(A.D.44)조에는, “가을9월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바다를 건너 군사를 보내 낙랑(樂浪)을 치고, 그 지역을 빼앗아 군현을 만드니 살수이남(薩水已南, 薩水以南)이 후한에 속하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 대무신왕이 서기 37년에 낙랑군(樂浪郡)을 쳐서 빼앗자, 7년 후인 서기 44년에 이르러 후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살수이남 땅을 다시 빼앗아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6대 태조대왕 4(A.D.56) 조를 보면, “가을7월 동옥저(東沃沮)를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고, 국경을 동쪽으로는 창해(滄海)까지, 남쪽으로는 살수(薩水)까지 넓혔다고 살수(薩水)가 다시 언급된다.

 

살수(薩水)는 북경 동북쪽 고북구(古北口)를 지나는 지금의 조하(潮河)를 말하는 것으로서, 살수이남 지역은 옛 낙랑군의 남부도위에 해당하는 지역을 말하는 것이고, 역사서에 나타나는 고구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薩水大捷), 고려 강감찬의 귀주대첩(龜州大捷) 등은 바로 이곳 고북구(古北口) 부근에서 일어났던 전투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33대 성덕왕 34(A.D.735) 조를 보면, “정월에 김의충을 당나라에 보내 신년을 축하하였다. 2월에 부사 김영이 당나라에서 죽으니 광록소경을 추증하였다. 김의충이 돌아올 때에 당 현종이 조칙으로 패강이남(浿江以南, 패수이남) 땅을 우리에게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 다음 해인 35(A.D.736) 조에는, 여름6월에 신년을 축하하고, “패강이남(패수이남)의 땅을 준다는 칙서를 잘 받았고 고맙다고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이때 당나라가 패강이남의 땅을 신라에게 주었던 이유는,

  732년에 발해국 무왕(대무예)이 장수인 장문휴를 보내 당나라의 등주(登州, 필자주 : 이때의 등주(登州)는 산동반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옥저지역으로서 후대의 쌍성지역을 말하는 것이다)를 공격하자 당나라에서 신라에게 군사를 동원하여 발해국의 남쪽을 공격해 달라고 하였고, 이에 신라가 응하였기 때문에 당 현종은 이때에 이르러 군사동원에 대한 보답으로 패강이남 땅의 소유권을 공식적으로 신라가 가질 수 있도록 칙서로서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패강(浿江, 패수)은 지금의 난하(灤河)를 말하는 것이다. 패강이남 땅은 옛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지역 일원을 말하는 것으로서 사실 이 땅은 이미 신라 태종무열왕, 문무왕 때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빼앗아 차지하고 있던 땅이었다. 따라서 이때 당 현종이 조칙으로 패강이남 땅을 신라에게 주었다는 것은 이때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신라의 소유임을 인정해 주었다는 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