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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조선의 궁홀산(弓忽山)은 한반도 황해도의 구월산(九月山)이 아니다– 최초주장

윤여동 2022. 7. 8. 07:17

윤여동설 – 고조선의 궁홀산(弓忽山)은 한반도 황해도의 구월산(九月山)이 아니다최초주장

 

[위 : 무령산(궁홀산,구월산)에서 바라본 북경평원(요동벌)]

 

[위 : 궁홀산(弓忽山, 구월산)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무령산(霧靈山) 부근]

  

  “구월산(九月山)”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곳이 곧 궁홀산(弓忽山)으로서 고조선(왕검조선)의 세 번째 도읍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며, 또한 고려 때의 황해도 문화현(文化縣), 장련현(長連縣), 은율현(殷栗縣), 송화현(松禾縣), 안악군(安岳郡), 신천군(信川郡) 등의 위치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고조선(왕검조선) 조를 보면,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壇君 : 檀君) 왕검(王儉)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朝鮮, 필자주 : 고조선을 말한다)이라고 불렀으니 이것은 고(, 필자주 : 중국 요임금을 말한다)와 같은 시기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이어서 고기의 기록을 인용하여,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단군왕검은 당고(唐高 : 중국의 요임금)가 즉위한지 50년 경인년(필자주 : 요임금이 즉위한 해는 기원전 2357년이라 하고, 단군왕검은 요임금 재위 25년인 기원전 2333년 무진년(戊辰年)에 고조선(古朝鮮)을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고 전해온다)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또 도읍을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로 옮겼는데, 궁홀산(弓忽山)이라고도 하고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그는 1500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 호왕(虎王, 필자주 : 주 무왕을 말한다)이 즉위한 후 기묘년(필자주 : 기원전 1122년이다)에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니, 이에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阿斯達)에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이가 1908세였다고 한다‘”라고 기록함으로써 고조선(왕검조선)의 건국시기와 도읍이전에 관하여 두 가지 설을 기록해 놓았다.

 

 

  그런데 필자가 연구해 본 결과,

  고조선(왕검조선)의 건국지인 첫 도읍지는 한반도가 아니라 태백산(太白山, 필자주 : 지금의 대광정자산) 동남쪽의 아사달(阿斯達)로서 지금의 내몽골 적봉시 영성현 대명진토성)이었으나, 국초에 다시 왕검성(王儉城)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규원사화에는 첫 도읍 아사달(阿斯達)을 지나는 강물이 북쪽으로 흘러 남쪽과의 교통이 불편했기 때문에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고 했는데, 지금의 내몽골 노합하(老哈河)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새로 옮긴 도읍 왕검성(王儉城)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자리로서 평양왕검성(平壤王儉城)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패수(浿水, 필자주 : 지금의 난하)가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가기 때문에 남북으로 오가는 교통이 매우 편리한 곳이었는데, 고조선(왕검조선)이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서 왕검성(王儉城, 평양왕검성)으로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평양(왕검성) 지역에 폭우가 내려 큰 홍수가 발생하여 많은 평양지역 백성들이 수재를 당하게 된다.

  그러자 단군왕검은 그 수재당한 백성들을 옛 도읍 아사달 동쪽으로 옮겨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장당경(당장경이라고도 한다)으로서 지금의 내몽골 적봉시 영성현(寧城縣)이다.

  그리고 얼마 후 남쪽의 한()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단군왕검은 아들들을 보내 난을 진압하게 되고, 혈구(갑비고차라고도한다)에 삼랑성(三郎城)을 쌓아 통치를 강화하는 등 강역이 커지게 되고, 경제도 발전하게 된다.

  이후 고조선(왕검조선)은 이곳 왕검성(王儉城, 평양왕검성)에 도읍하고 무려 1천여 년의 번영을 구가하게 된다.

  그러다가 고조선(왕검조선)의 강역이 중국 쪽으로도 많이 넓어지자 고조선(왕검조선)은 요동(遼東, 필자주 :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북경 일원)에 가까운 궁홀산(弓忽山 : 구월산)으로 다시 도읍을 옮기게 되는데, 지금의 북경 동북쪽 무령산(霧靈山) 부근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황해도 안악군 산천 조를 보면, 

  “구월산(九月山) : (안악군) 서쪽 30리에 있는데, 문화현 편에 자세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월산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같은 책 황해도 문화현(文化縣) 산천(山川) 조를 보면,

  “구월산(九月山) : 고을(문화현) 서쪽 10리에 있으니 곧 아사달산(阿斯達山, 필자주 : 백악산아사달산)이다. 일명 궁홀(弓忽)이라고도 하고, 일명 증산(甑山), 삼위(三危)라고도 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처음 평양(平壤, 필자주 : 왕검성이다)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다시 백악(白岳)으로 옮겼다 하는데, 바로 이 산이다.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이 당장경(唐藏京)으로 옮겼으며, 후에 다시 이 산으로 와서[필자주 : 이 산인 구월산(궁홀산)이 아니라 초기도읍이었던 아사달성이다] 숨어 신이 되었다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구월산(九月山)은 궁홀산(弓忽山)의 지명이 변한 것이다.

궁홀산(弓忽山)”은 듣는 사람에 따라서 구월산(九月山)”으로도 들렸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면서 일반 백성들은 그 산을 구월산이라 부르게 되었고, 원래의 이름인 궁홀산(弓忽山)은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이다.

원래의 지명이었던 궁홀(弓忽)”이란 활골 또는 활곡이라는 의미로서 그곳의 지형이 활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서, 지금 북경 동북쪽에 위치한 무령산 북쪽 무령호 부근의 지형이 마치 활 모양으로 생겼음이 확인된다.

그리하여 옛 사람들은 그 앞 산을 궁홀산(弓忽山)이라 불렀던 것이고, 더구나 궁홀(弓忽)이 고조선(왕검조선)의 후기 도읍이 되자 궁홀산은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을 것이다.

 

  같은 책 사묘(祠廟) 조에는,

  “삼성사(三聖祠) : 구월산(九月山) 성당리(聖堂里)에 있으니 곧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의 사당이다. 나라에서 춘추로 향축을 내려 보내 제사 드리며, 또 비가 심할 때와 가물 때 기도하면 곧 응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한반도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동쪽에도 삼성사가 있고, 그곳 삼성전에 환인, 환웅, 단군의 초상을 모시고 있으며,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고 하니, 이성계의 근세조선 초에 대륙으로부터 한반도로 옮겨 온 후 대륙의 지명과 역사를 모두 한반도로 이치시켜 적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고,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사가 모두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역사를 이해한다. 근세조선은 왜 우리의 대륙역사를 이토록 철저히 숨겨야만 했는지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

 

  또 같은 책 고적(古跡) 조에는,

  “장장평(莊莊坪) : 고을 동쪽 15리에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했던 곳이라 하며, 그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고려사에 장장평(莊莊坪)이라 하였으나 이는 당장경(唐藏京)의 와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황해도 문화현 동쪽 15리에 있었다는 장장평은 왕검조선의 첫 도읍 아사달 동쪽에 위치한 장당경(당장경)을 착각한 것임에 틀림없다. 옛 기록들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왕검조선)의 첫 도읍 아사달과 세 번째 도읍 궁홀산아사달(백악산아사달)을 헷갈린 기록들이 많다. 첫 도읍 아사달과 세번째 도읍 궁홀산아사달(백악산아사달)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던 별개의 장소이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 장련현(長連縣) 산천(山川) 조를 보면,

  “구월산(九月山) : 고을(장련현) 남쪽 10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같은 책 황해도 은율현(殷栗縣) 산천(山川) 조에도,

  “구월산(九月山) : 고을(은율현) 동쪽 10리에 있다. 산 중턱에 못이 있으니 고요연(高腰淵)이라고 하는데, 형상이 가마 같으며,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민간에서는 용이 있다고 하며, 가물 때 비를 빌면 곧 응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성곽(城郭) 조에는,

  “구월산성(九月山城) : 고을(은율현) 동쪽 1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4,386척이며, 높이는 15척이다. 성의 모양이 큰 배와 같고, 남쪽과 북쪽에는 도로가 없으며, 동쪽과 서쪽에만 나무다리 길이 있다.

  성안에는 나무들이 묶어세운 것처럼 빽빽하게 서 있으며, 물이 여러 골짜기에서 나와 하나의 냇물을 이루고, 성 서쪽에 이르러서는 양쪽으로 높은 산이 서 있어 마치 문 같으며, 물이 문 밖으로 나와서 폭포가 된다.

  성안에 좌우 창고가 있는데, 문화, 신천, 안악은 좌창(동창)에 속하고, 은율, 풍천, 송화, 장연, 장련은 우창(서창)에 속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들을 종합하여 필자가 판단해보면,  

구월산성(九月山城)은 지금의 사마대장성, 금산령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고, 지금의 고북수진 부근이 고조선(왕검조선)의 세 번째 도읍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로 비정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