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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거란지리지도(契丹地理之圖) 속 거란(요) 5경과 현재의 지형, 지명비교 - 최초공개

윤여동 2022. 7. 30. 19:34

윤여동설 거란지리지도(契丹地理之圖) 속 거란() 5경과 현재의 지형, 지명비교 - 최초공개

 

 

[거란지리지도 : 발해 북쪽에 표시되어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

 

[거란() 5경의 위치]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 : 내몽골 오란찰포시(烏蘭察布市) 상도현(商都縣) 부근

 

상경임황부는 원래 한() 요동군 서안평 땅이다. () 왕망(王莽)이 북안평(北安平)으로 고쳤다.

태조(太祖)가 천제(天梯)몽국(蒙國)별로(別魯)등의 세 산의 형세를 취하자 위전(葦甸)으로 이를 표시하려고 금착전(金齪箭)을 쏘아서 그곳을 용미궁(龍眉宮)이라 일렀다.

태조(太祖) 신책(神冊) 3(918) 그곳에 성()을 세우고 이름을 황도(皇都)라 불렀다.

태조(太祖) 천현(天顯) 13(938) 다시 이름을 상경(上京)이라 고치고 부()는 임황(臨潢)이라 하였다.

 

()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1016) 9년의 설영기(薛映記)에 이르기를,

상경(上京)은 중경(中京)에서

정북쪽으로 80리를 가면 송산관(松山舘)에 이르고,

70리를 가면 숭신관(崇信舘)에 이르고,

90리를 가면 광녕관(廣寧舘)에 이르고,

50리를 가면 요가채관(姚家寨舘)에 이르고,

50리를 가면 함녕관(咸寧館)에 이르고,

30리를 가서 황수석교(潢水石橋)의 옆으로 요주(饒州)가 있는데, ()이 거란(契丹)에 일찍이 요락(饒樂)을 설치하였으며, 지금은 발해(渤海) 사람들이 살고 있다.

50리를 가면 보화관(保和館)인데,

흑수하(黒水河)를 건너 70리는 선화관(宣化舘)이고,

50리는 장태관(長泰舘)이다.

장태관() 서쪽 20리에 불사(佛舍)들이 있어 백성들이 사는데 즉 조주(祖州)이다.

또한 40리를 가면 임황부(臨潢府)에 이른다.

지나온(自過) 숭신관(崇信館)을 지나면서부터 거란(契丹)의 옛 경내인데, 그 남쪽은 해()의 땅이다.

서문으로 들어가는데 문의 이름은 금덕문(金徳)이고, 안에는 임황관(臨潢舘)이 있다. 자성(子城)의 동쪽 문은 순양문(順陽)이라고 한다. 북쪽으로 가면 경복문(景福門)에 이른다. 또한 승천문(承天門)에 이르는데 안쪽에는 소덕(昭徳)과 선정(宣政) 2개의 전(殿)이 전려(氊廬)와 더불어 있는데 모두 동쪽을 향하고 있다.

임황(臨潢)의 서북쪽 200여리를 양정(涼淀)이라고 부르는데, 만두산(饅頭山) 남쪽에 있으며 더위를 피하는 곳이다. 수초가 많으며 깊이는 1장정도 되는데 얼음이 단단하게 언다.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 : 하북성 장가구시(張家口市) 양원현(陽原縣) 부근

 

중경대정부는 순임금() 때 영주에 속했다.

() 때는 기주에 속했으며

() 때는 유주(幽州)로 나뉘었다.

()의 천하일 때는 요서(遼西)가 되었고,

() 때에는 신안평현이 되었다

한말(漢末)에 해족이 들어와 그곳에 살았는데, 폭원이 천리이고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아서 조험하므로 스스로 방어하기에 충분하였다

위무제(魏武)가 북쪽으로 정벌할 때 항복한 자가 10여만 명이었고 나머지는 송막(松漠)으로 도망갔다

그 후에 북위의 척발씨가 이곳에 아장을 세우고 요 땅을 다스렸는데 요락하 남쪽으로부터 온유하 북쪽까지이다.

당 태종唐太宗이 고구려를 칠 때 이곳에서 주필하였다(?)[필자주 : 이 기록은 의문스럽다]

해부의 장수인 소지가 따라가 공을 많이 세웠다. 해의 우두머리 가도가 무리를 거느리고 내부하여 요락도독부를 두어 다스렸다

당 의종 함통(860~874) 이후 거란이 강대해지자 해족이 다시는 항거하지 못했다. 태조가 건국하자 부족을 들어 신속하였다

성종이 일찍이 칠금산과 토하의 물가를 지날 때 남쪽을 바라보니 운기가 서려 있고 부곽과 누궐의 형상이 나타나므로 이곳에 도성을 세우고자 하였다

()과 계()에서 장인들을 뽑아 2년 동안 부곽 궁궐 누각 부고 시사 낭무를 세웠는데 신도의 법도를 헤아렸다

요 성종 통화 24년에 오장원까지 진출하였는데 옛 해왕의 아장이 있던 곳이다.

25년에 그곳에 성을 쌓고 한()나라 사람들로 채우고 중경(中京)이라 하고 부는 대정(大定)이라 하였다

 

황성가운데 조묘가 있는데 경종과 승천황후의 어용전이다

성의 연못이 말라 우물을 많이 파니 사람들이 편리하게 사용하였다

대동역은 송()의 사신을 대접하며, 조천관은 신라(新羅)의 사신을 대접하며, 내빈관은 하()의 사신을 대접한다

칠금산 마우산 쌍산 송산 토하가 있다

   

송 왕증의 상거란사(宋王曾上契丹事曰)에 이르기를,

연경(남경석진부) 북문을 출발하여,

망경관에 이르러 50리를 가면 순주에 이르고,

70리를 가면 단주에 이르러 서서히 산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50리를 가면 금구관에 도달하는데 대저 관에 이르면 냇물의 발원지가 평평하고 넓어서 이를 금구전이라 한다.

이곳에서부터 산지로 들어가며 힐곡과 등척으로 리수나 이정표를 말하기 어렵다.

다만 마행기에 이르기를, 대략 그 리수로

90리를 가면 고북구에 이르는데, 양 옆이 험준한 절벽이라서 겨우 마차가 갈 수 있다.

다시 덕승령을 지나는데 굽은 능선길이 여러 층으로 되어 있는데 속명이 사향령이다.

80리를 가면 신관에 이르고 조과령을 지나는데 창령으로 치우쳐 있으며

40리를 가면 와여래관에 이른다.

오란하를 지나가며 동쪽은 란주이고,

다시 모투령, 일명 도운령을 지나면 근채령이며,

70리를 가면 유하관에 도달한다.

송정령은 심히 험준하며 70리를 가면 타조부락관에 이르고,

그 동남으로 50리를 가면 우산관에 이른다.

80리를 가면 녹아협관에 도착한다.

하마령을 지나 90리를 가면 철장관에 이르러 석자령을 지나는데, 이곳에서부터 점차 산지 밖으로 나오게 된다.

70리를 가서 부곡관에 도착하며,

80리를 가면 통천관에 이르며

20리를 가면 중경대정부에 도착한다.

성의 울타리는 낮고 협소하며 방원은 겨우 4리 정도이다.

성문만 다만 이중으로 된 지붕을 가졌으니 도성의 문을 쌓는 법도가 없다할 것이다. 남문은 주하라 부르며 문 안으로 보랑이 통하여 있고 방문이 많다. 또한 시루가 4개인데 천방 대구 통환 망궐이라 한다. 그 뒤로 대동관에 이른다. 그 문의 정북은 양덕이라 하며 문은 닫혀있다

성내의 서남 모퉁이 언덕 위에는 절이 있다. 성의 남쪽에는 원포가 있는데 연회 시 활쏘기를 하는 곳이다

 

고북구를 지나면서부터는 사람들이 초가집에 살며 씨를 뿌리고 논밭을 가는데 다만 산자는 없다. 그 종자들은 모두 밭두둑위에 뿌리는데 바람이나 모래가 그곳을 메울까봐 염려된다. 산중에는 장송으로 무성하며 곡식이 무성할 때에는 우마나 탁타와 많은 청양과 황시를 목축한다.

 

 남경석진부 (南京析津府) : 하북성 보정시(保定市) 역현(易縣) 부근

 

남경석진부는 원래 옛날 기주(冀州)의 땅이다.

고양(髙陽)씨는 유릉(幽陵)이라고 하였고 도당(陶唐)씨는 유도(幽都)라고 하였으며 우순(虞舜)씨는 이를 쪼개어 유주(幽州)라고 하였다.

()에서는 유주를 기주에 병합하였고, ()에서는 병주(并州)을 나누어 유주로 하였다.

직방(職方)에서 말하기를 동북쪽이 유주인데, 진산(鎭山)은 의무려(醫巫閭)이고, 덤불진 늪[澤藪]으로는 혜양(豯養)이 있으며, 큰 하천[]으로는 하수()와 제수()가 있고, 저수지[]로는 치()와 시()가 있다.

그곳에서는 생선과 소금으로 이익을 얻으며 그곳에서 기르는 가축으로는 말과 소와 돼지가 있고 그곳에서 자라는 곡식으로는 기장과 쌀이 있다.

무왕(武王)은 태보(太保)소공석()을 연()에 봉하였다.

()은 그 땅을 어양 상곡 우북평 요서 요동 등의 5개 군으로 삼았다.

()에서는 연()으로 삼았는데 대대로 장다(臧茶)와 노관(盧綰)과 유건(劉建)과 유택(劉澤)과 유단(劉旦)을 봉하였으며 일찍이 탁군(涿郡)과 광양국(廣陽國)을 설치하였다.

후한(後漢)에서는 광평국(廣平國)과 광양군(廣陽郡)을 두었었는데 영역을 상곡(上谷)에 합쳤다가 되돌려 유주(幽州)에 설치하였다.

후주(後周, 951~960) 에서는 연()과 범양군(范陽郡)을 설치하였고,

()에서는 유주총관(幽州總管)으로 하였다.

()에서는 대도독부(大都督府)을 두었다가 범양절도사(范陽節度使)로 고쳤다. 안록산(安禄山) 사사명(史思明) 이회선(李懐仙) 주도(朱滔) 유평(劉怦) 유제(劉濟) 등이 서로 계승하여 할거하였었다. 유총(劉總)은 당()으로 귀부하였다. 장중무(張仲武)와 장윤중(張允仲)에 이르러서는 정식으로 백성을 얻었다. 유인공(劉仁恭)의 아버지와 아들이 간사하게 다투니 드디어 5대의 시대가 되었다.

후당(後唐)으로부터 후진(後晉)에 이르러 고조(髙祖, 석경당)는 요()가 나라를 세우는데 도움이 이었으므로 유주(幽州) 16개의 주를 분할하여 바쳤다.

(거란) 태종(太宗)은 이를 승격시켜 남경(南京)으로 삼았고, 또한 연경(燕京)이라고 하였다.

 

성은 방 36리이고 높이는 3()이며 문의 너비[衡廣]15척이다.

적루(敵樓)와 전로(戰櫓)를 갖추었다.

8개의 문이 있는데, 동쪽 문은 안동(安東)과 영춘(迎春)이라 하고, 남쪽 문은 개양(開陽)과 단봉(丹鳯)이라고 하며, 서쪽 문은 현서(顯西)와 청진(清晉)이라고 하고, 북쪽 문은 통천(通天)과 공진(拱辰)이라고 한다.

대내(大内)가 서남쪽 귀퉁이에 있다. 황성(皇城)의 안쪽에는 경종(景宗)과 성종(聖宗)의 어용전(御容殿)2개 있는데 동쪽에 있는 것은 선화(宣和)라 하고 남쪽에 있는 것은 대내(大内)라고 한다. 내문(内門)을 선교(宣教)라고 하였지만 원화(元和)로 고쳤으며, 외문(外門) 3개는 남단(南端)과 좌액(左掖)과 우액(右掖)이라고한다. 좌액(左掖)은 만춘(萬春)이라고 고쳤고, 우액(右掖)은 천추(千秋)라고 고쳤다. 문에는 루각(樓閣)이 있고, 구장(毬場)이 그 남쪽에 있으며, 동쪽은 영평관(永平館)이라고 한다.

황성(皇城)의 서쪽 문을 현서(顯西)라고 하는데 설치한 후로 열지 않았다.

(황성의) 북쪽 문은 자북(子北)이라고 한다. 서성(西城)의 산꼭대기[]에는 량전(涼殿)이 있고 동북쪽 귀퉁이에는 연각루(燕角樓)가 있다.

방시(坊市)와 해사(廨舍)와 사관(寺觀) 등은 모두 책에 기록하지 않는다[蓋不勝書].

그 밖의 것으로는 거용관(居庸)과 송정관(松亭)과 유림관(榆林)이 있고, 고북구(古北口)가 있으며 상건하(桑乾河)와 고량하(髙梁河)와 석자하(石子河)와 대안산(大安山)과 연산(燕山)이 있다. (연산)의 한 복판에는 옥으로 된 언덕[瑶嶼]이 있다.[필자주 : 연경은 백옥산지인 북경 방산 대석와진(大石窝镇) 부근에 위치했었을 것이다. 거마하(拒馬河) 중류변]

()는 유도(幽都)라 하고, ()은 노룡(盧龍)이라고 하는데 개태(開泰) 원년에 군액(軍額)을 감소시켰다. 관할하는 주가 6개이고 현은 11개이다.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 북경시(北京市)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본래 조선(朝鮮)의 땅이었다. ()나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감옥에서 풀어주자 (기자는) 조선으로 갔고, (무왕은) 이로 인해 그를 봉해 주었다. (기자는)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만들어 베푸니, (백성들이) 예의를 숭상하고 농사와 누에치기로 부유해져 바깥 문을 닫지 않아도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40여세를 전하여 연()나라가 진번(眞番) 조선(朝鮮)을 복속시키고 처음으로 관리를 두고 요새를 설치하였다.

()나라 때 요동의 바깥 요새에 속하였다.

()나라 초기에 연나라 사람 만(滿)이 옛 공지에서 왕이 되었다.

무제(武帝) 원봉(元封) 3(기원전 108)에 조선을 평정하여 진번,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도(玄菟) 4()을 설치하였다.

후한(後漢) 때에 청주(靑州)와 유주(幽州)에 출입하였다.

요동군과 현도군은 연혁이 일정하지 않았다.

 

한나라 말기에 공손도(公孫度)가 점거하여 아들 공손강(公孫康)을 거쳐 손자 공손연(公孫淵)은 스스로 연왕(燕王)을 자칭하고 소원(紹漢)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나라가 멸망시켰다. ()나라가 고려(高麗 ; 고구려)를 함락시켰고, 나중에는 모용수(慕容垂)에게 귀속하였다. 아들 보()는 고구려 왕 안(; 광개토왕)을 평주목(平州牧)에 임명하여 거주케 하였다. 원위(元魏 ; 북위) 태무제(太武帝)가 그들이 거주하는 평양성(平壤城)에 사신을 보냈으니, ()나라 동경(東京)이 바로 이곳이다. ()나라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지만, 나중에 발해(渤海)의 대씨(大氏)가 차지하였다. 대씨는 처음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후(武后 ; 측천무후) 만세통천(萬歲通天) 년간에 거란(契丹) 이진충(李盡忠)이 핍박을 받자 걸걸중상(乞乞仲象)이 요수(遼水)를 건너 스스로 지키니 무후가 진국공(震國公)에 봉하였다. 아들 대조영(大祚榮)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진왕(震王)이라 자칭하였다. 발해 북쪽을 영역을 병합하니 영토가 사방 오천리나 되고, 병사가 수십만이나 되었다. 중종(中宗)이 도읍한 곳에 홀한주(忽汗州)라는 명칭을 내려주고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책봉하였다. 12대 지나 대이진(大彝震) 때에 참람되게 연호를 고치고, 궁궐을 본따서 짓고, 5() 15() 62()를 두었으니 요동에서 가장 번성한 나라가 되었다.

홀한주는 바로 옛 평양성으로, 중경현덕부 (中京顯德府)라고도 한다.(?)[매봉 안 : 후대에 첨삭된 잘못된 기록이다]

 

요나라 태조(太祖 ; 야율아보기)가 나라를 세우고 발해를 공격하여 홀한성(忽汗城,발해 상경용천부)을 함락하고 발해의 왕 대인선(大諲譔)을 사로잡았다. (발해를) 동단왕국(東丹王國)으로 삼고 태자 도욕(圖欲)을 인황왕(人皇王)으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신책(神冊) 4(919) 요양(遼陽)의 옛 성을 수리하고, 발해와 지나인으로 동평군(東平郡)을 만들어 방어주(防禦州)로 삼았다. 천현(天顯) 3(928) 동단국 사람을 옮겨 거처하게 하고 남경(南京)으로 승격시켰다. 성의 이름은 천복(天福)이라 하는데 높이가 3(9m)이며 망루가 있으며 너비가 30리나 된다. 8개의 문이 있는데, 동쪽은 영양(迎陽), 동남은 소양(韶陽), 남쪽은 용원(龍原), 서남은 현덕, 서쪽은 대순(大順), 서북은 대요(大遼), 북쪽은 회원(懷遠), 동북은 안원(安遠)이다. 궁성(宮城)은 동북쪽 모퉁이에 있는데 높이가 3길이며 망루가 있으며 남쪽으로 3개의 문이 있어 누각처럼 장관이다. 사방 모퉁이에 각루가 있는데 (각 각루) 사이는 2리나 된다. 궁성 담장 북쪽으로는 양국황제(讓國皇帝)의 어용전(御容殿)이 있다. 대내(大內)에는 전각이 두 채가 있고 후궁전은 두지 않았다. 오직 내성사(內省使)의 부관(副官)과 판관(判官)이 지켰다. 대동란국(大東丹國)이 새로 세운 남경의 비명(碑銘)은 궁문의 남쪽에 있다.

 

외성(外城)을 한성(漢城)이라고도 하는데, 남시(南市)와 북시(北市)로 나뉘며 중간에는 간루(看樓)가 있다. (사람들이) 아침에는 남시에 모이며 저녁에는 북시에 모인다. 길 서쪽에는 금덕사(金德寺), 대비사(大悲寺), 부마사(駙馬寺)가 있는데, (이곳에는) 철 깃대도 있다. 또 조두타사(趙頭陀寺), 유수아(留守衙), 호부사(戶部司), 군순원(軍巡院) 등이 있다. 귀화영(歸化營)의 군인 천여명이 황하와 삭주에서 망명하였는데, 모두 이곳에 본적을 두었다. 동쪽으로 북오로호극(北烏魯虎克: 北烏爾呼赫)까지 400, 남쪽으로 해변의 철산(鐵山)까지 860, 서쪽으로 망평현(望平縣) 해구(海口)까지 360, 북쪽으로 읍루현(挹婁縣)과 범하(范河)까지 270리이다. , , 남쪽 3면이 바다를 싸고 있다.

 

요하(遼河)는 동북쪽 산어귀로 나아가 범하(范河)가 되고, 서남쪽으로 흘러 대구(大口)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동량하(東梁河)는 동쪽산에서 서쪽으로 흘러 혼하(渾河)와 합하여 소구(小口)가 되어 요하와 만나 바다로 들어가니, 태자하(太子河)라고 하며 또한 대량수(大梁水)라고도 한다. 혼하는 동량하와 범하 사이에 있다. 사하(沙河)는 동남산에서 서북쪽으로 흘러 개주(蓋州)를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또 포하(蒲河), 청하(淸河), 패수(浿水)가 있다. 패수는 니하(泥河) 또는 한우력(蓒芋濼)이라고도 하는데, 강에 한우초가 많기 때문이다.

 

주필산(駐蹕山)은 당나라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그 정상에서 몇일을 머무르며 돌에 공을 새겼던 곳이다. 속칭은 수산(手山)이다. 산정상의 평평한 돌 위에 손바닥 모양의 무늬가 있어, 여기서 샘이 솟는데, 마르지 않는다. 또 명왕산(明王山), 백석산(白石山)이 있다. 백석산은 횡산(橫山)이라고도 한다. 천현 13(938)에 남경을 동경(東京)으로 고쳤는데, ()는 요양이라고 하였다. 호구 수는 40,604호이며, ()()()() 87개를 관할하였다. 9()을 통할하였다.

 

서경대동부(西京大同府) : 산서성 대동시(大同市) 부근

 

서경대동부는 도당(陶唐)씨의 기주(冀州) 지역이다.

()는 나누어서 병주(并州)로 하였고,

()에서는 다시 되돌려 기주(冀州)에 속하게 하였다.

() 직방(職方)에서 기록하기를, 정북쪽이 병주라고 하였다.

전국시대에는 조()에 속하였고, 무령왕(武靈王, 재위 BC325 ~ BC295)은 처음으로 운중군(雲中郡)을 설치하였다.

()은 대왕국(代王國)에 속하게 하였다가 후에 평성현(平城縣)으로 삼았다.

()에서는 신흥군(新興郡)에 속했다.

()에서는 이에 안문(鴈門)에 속하게 하였다.

유곤(劉琨, AD270 ~ AD317월석越石)이 표를 올리니 의로(猗盧)를 봉하여 대왕(代王)에 봉하였고 평성(平城)에 도읍하였다.

원위(元魏)의 도무제(道武帝, 재위 AD386 ~ AD409, 탁발규拓跋珪)는 이곳에 드디어 도읍을 건설하였다.

효문제(孝文帝, 재위 AD471 ~ AD499, 원굉元宏)는 사주목(司州牧)으로 고쳐 대주(代州)를 설치하고 책임자를 임명하고, 도읍을 낙양[洛邑]으로 옮겨 만년(萬年)이라고 고쳤으며 또한 항주(恒州)를 설치하였다.

북제[高齊]의 문선제(文宣帝)는 항주를 폐하고 지금은 동성(東城)이라고 부르는 항안진(恒安鎮)으로 삼았는데, 얼마 안 되어 다시 항주(恒州)라고 하였다.

북주(北周)는 다시 항안진(恒安鎮)으로 하였다가 삭주(朔州)라고 고쳤다.

()는 이에 진()을 설치하였다.

() 무덕(武徳) 4년에 북항주(北恒州)를 설치하였다가 7년에 폐하였다.

정관(貞觀) 14년에 운중(雲中) 정양현(定襄縣)을 이곳으로 옮겼다.

영순(永淳) 원년에 묵철(黙啜)이 백성들이 근심 되므로 삭주(朔州)로 옮겼다. 개원(開元) 18년에 운중주(雲中州)을 설치하였다.

천보(天寶) 원년에 운중군(雲中郡)으로 고쳤다.

건원(乾元) 원년에 운주(雲州)라고 하였다.

건부(乾符) 3년에 대동군(大同軍) 절도사(節度使) 이국창(李國昌)의 아들 극용(克用)이 운중(雲中) 수착사(守捉使)가 되어 대동방어사(大同防禦使, 단문초段文楚)를 죽이고 주()에 의지하였다는 것이 들려왔다.

희종(僖宗)은 극용(克用)을 용서하고 국창(國昌)을 대동군방어사(大同軍防禦使)로 삼는다고 하였으나 명을 따르지 않았다.

광명(廣明) 원년에 이탁(李琢)이 이국창을 공격하였는데 이국창의 군대가 패하여 아들 극용과 같이 북쪽 땅으로 도망갔다.

황소(黄巢)가 경사(京師)로 쳐들어오자 대북군(代北軍)을 일으키라고 조서를 내리니 곧이어 국창(國昌)을 용서하고 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극용(克用)3,5000의 기병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경사를 거두어들이는데 공로가 제일이었으므로 이국창을 농서군왕(隴西郡王)으로 봉하였다. 이국창이 죽자 극용이 운남(雲南, 운주)를 취하였으나 이미 이익이 없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으므로 겸손한 말과 후한 예의로 태조(太祖)와 더불어 운주(雲州)의 동성(東城)에 모여서 병사를 모집하여 양()을 칠것을 모의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극용의 아들인 존욱(存朂)이 양()을 멸하니 이가 후당() 장종(莊宗)이다. 동광(同光) 3년 다시 운주(雲州)를 대동군절도사(大同軍節度使)로 삼았다.

후진()의 고조(高祖, 석경당)는 후당(後唐)과 정권을 교체하는데 있어서, 거란이 원조가 있고 공을 세웠으므로 산전(山前)과 대북(代北)을 나누어 뇌물로 주었다. 대동(大同)은 내속하였고 그리하여 서경을 건설하였다.

적루(敵樓)와 붕로(棚櫓)를 갖추었다. 넓이[廣袤]20리이다.

동쪽문은 영춘(迎春)이라 하고 남쪽문은 조양(朝陽)이라 하고 서쪽문은 정서(定西)라 하고 북쪽문은 공극(拱極)이라고 한다.

원위(元魏)의 궁굴과 담장이 성의 북면을 차지하고 있고 두 대궐이 아직도 남아있다. ()가 이미 도읍을 건설하여 매우 중요한 요충지로 사용하고 있어 친히 왕이 이 땅을 얻어 다스리지 않음이 없었다.

청녕(清寧) 8년에 화엄사(華嚴寺)를 짓고 여러 제왕들의 석상과 동상을 봉안하였다. 또한 천왕사(天王寺)와 유수사아(留守司衙)가 있는데, 남쪽은 서성(西省)이고 북문의 동쪽은 대동부(大同府)이며, 북문의 서쪽은 대동역(大同驛)이다.

처음에는 대동군절도(大同軍節度)였다가 중희(重熙) 13년에 서경(西京)으로 승격되었고 부를 대동이라고 하였다. 다스리는 주는 2개이고 현은 7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