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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수곡성(水谷城)의 진짜 위치를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 2022. 11. 19. 17:50

윤여동설 고구려 수곡성(水谷城)의 진짜 위치를 찾았다 최초공개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은 고구려와 백제가 장기간에 걸쳐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펼쳤던 성이다.

  이는 수곡성(水谷城)이 두 나라 간의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 성이라는 의미와 같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39(A.D.369) 조를 보면, “가을 9월 군사 2만으로 남쪽의 백제를 쳤는데, 치양(雉壤)에서 싸우다가 패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4(A.D.369) 조를 보면, “가을9월 고구려왕 사유(필자주 : 고구려 16대 고국원왕)가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진을 치고 군사를 나누어 약탈하므로 왕이 태자(필자주 : 백제 13대 근초고왕의 아들로서 후일의 14대 근구수왕을 말한다)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급히 공격하여 깨뜨리고 5천여명을 죽였으며, 노획한 물품은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것인데,

 

 

[수곡성과 그  북쪽에 위치한 치양 추정지]

 

[치양(雉壤) 추정지 : 치양(雉壤)이란 꿩 모양의 형태를 갖춘 땅이라는 의미이다]

 

 

 

  근구수왕 원년(A,D.375) 조를 보면 당시 태자였던 수(扶餘須: 근구수왕의 태자시절 이름)는 반걸양(半乞壤, 필자 주 : 앞에서는 치양에서 싸웠다고 하였는데, 여기 근구수왕 조에서는 반걸양이라 하였으니 치양과 반걸양은 같은 곳의 다른 이름이거나 인접한 곳에 위치한 장소로 보이며, 수곡성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닐 것이다)에 이르러 고구려군과 싸워 이기고, 도망치는 고구려군을 추격하여 수곡성(水谷城) 서북쪽까지 이르렀는데, 장수 막고해가 知足不辱 知止不殆(지족불욕 지지불태)” 즉 만족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라고 하면서 더 이상의 진격은 위험하니 여기서 만족하고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여 태자가 그를 옳게 여기고 더 이상 진군하지 않았다는 기록 속의 장소가 바로 수곡성(水谷城) 부근으로서 그로부터 6년 후인 근초고왕 30년(A.D.375)에 이르러 고구려 소수림왕에게 도로 빼앗기게 된다.

 

  그리하여 이후 고구려와 백제는 이 수곡성(水谷城) 부근에서 수많은 전투를 하게 되고, 진사왕 8년인 392년에 이르러서는 고구려 광개토왕이 군사 4만으로 백제를 침공하여 석현성 등 10개성과 관미성을 함락 시키게 된다.

  그러자 진사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아신왕은 393년에 진무를 보내 빼앗긴 10개성과 관미성을 탈환하려 했으나 석현성 등 5개성은 탈환했으나 그 외 5개성과 관미성은 탈환에 실패하게 된다.

  그리하여 아신왕은 394년에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여 수곡성(水谷城) 아래에서 싸웠으나 패하게 되고, 395년에 또 다시 진무를 보내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으나 광개토대왕이 직접 이끈 고구려군에게 패수(浿水) 전투에서 대패하게 되자 아신왕은 다시 패수전투에서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청목령(靑木嶺)까지 갔으나 때마침 큰 눈이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된다.

 

  그런데 호태왕비문(광개토대왕능비문)을 보면, 광개토대왕이 서기 396년 병신년에 백제를 쳐서 도읍인 한성(漢城)을 포위함으로써 아신왕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노객이 되어 복종하겠습니다”라는 맹세를 하게하고 58개성과 7백개촌을 빼앗고 백제의 장수와 왕의 동생(필자주 : 내신좌평 부여홍을 말하는 듯하다)과 대신 10명을 볼모로 잡아 개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백제가 고구려에게 많은 땅을 빼앗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자 아신왕은 다음 해인 397년에는 왜국(倭國)과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를 왜국에 볼모로 보내게 되는데, 이는 왜국의 군사력을 빌려 고구려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고, 아신왕은 그 후에도 온갖 방법으로 잃어버린 땅을 되찾으려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4059월에 죽고 말았고, 그 후 백제는 다시는 수곡성(水谷城)까지 진출하지 못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1대 문자왕 12년(A.D.503) 조를 보면, "겨울11월 백제가 달솔 우영으로 하여금 군사5천을 거느리고 와서 수곡성을 침공하여왔다"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백제는 무령왕 초기로서 별성과는 거두지 못했던 듯하다.  

 

  고구려와 백제가 이렇듯 대를 이어가며 심하게 다투었던 이 수곡성(水谷城)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던 성일까?

  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신계현(新溪縣) 건치연혁 조를 보면,

  “본래 고려의 신은현(新恩縣)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계현이 곧 고려 때의 신은현임을 알 수 있고,

  고적 조를 보면, “협계폐현(俠溪廢縣)이 고을(신계현, 신은현) 남쪽 30리에 있는데, 본래는 고구려의 수곡성현(水谷城縣)으로서 매차홀(買且忽)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신은현(신계현 : 신은현과 협계현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신계현이라 이름지었다 한다)의 남쪽 30리에 위치한 협계폐현(俠溪廢縣)이 곧 옛 수곡성(水谷城)이었음을 알게 하는데, 고려의 신은현(新恩縣)1019년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 개경(開京)에서 (서쪽으로) 1백리 떨어진 신은현(新恩縣)까지 왔다가 군량이 떨어져 퇴각할 때, 귀주(龜州)에서 강감찬 장군에게 10만군사가 거의 몰살당했다고 하는 귀주대첩(龜州大捷) 기록에 언급되는 지명이다.

 

지금의 북경(北京)은 고대의 요동(遼東)이었고, 그 동북쪽 고북구(古北口)를 지나는 강은 지금의 조하(潮河)인데, 이 강이 바로 옛 고구려의 살수(薩水)로서 고북구 부근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살수대첩(薩水大捷)의 현장이었고, 또한 고려 때의 귀주(龜州)로서 귀주대첩(龜州大捷)의 현장이기도 한 곳이다. 이것이 우리 고대사의 진실인데, 우리는 엉뚱하게도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그 살수대첩과 귀주대첩의 현장을 찾고 있었으니.........

 

  그런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간에 그 수곡성(水谷城)을 놓고 심한 공방전을 펼친 것으로 보아 이 수곡성은 고구려와 백제의 중간지역으로서 요충지 중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었음에 틀림없고, 水谷城(수곡성)이라는 이름으로 보아 계곡 진 강가에 위치하고 있는 성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고려의 도읍 개경(開京)이 한반도 황해도의 개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관성현(관성만족자치현)이라는데 있고, 고려의 서경은 옛 고구려 평양성으로서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承德市)이며, 고려의 귀주(龜州)는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구(古北口) 부근이라는데 있다.

   따라서 신은현 남쪽 30리 지점에 위치했었다는 수곡성(水谷城 : 협계현, 협계폐현)은 지금의 난하(옛 패수)와 유하가 합류하는 반가구수고 북쪽 유하구촌 부근에 위치한 성으로 판단된다.

  좌표는 동경 118도13분09초 북위40도36분08초이다. 

 

☆ 옛날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를 침공할 때 거란군은 지금의 조하를 타고 내려와 고북구를 지나 밀운수고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흥륭과 응수영자광을 지나 유하를 따라 행군했던 듯하다. 그런데 지금의 난하와 유하가 합류되는 유하구 부근까지 왔을 때 식량이 떨어져 왔던 길을 되짚어 퇴각하다가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구장성 부근인 귀주에서 박살이 나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