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구려 비사성(卑沙城)을 찾았다 – 최초주장
[고대의 요동이었던 지금의 북경 동쪽 1천여리에 위치했던 고구려와 백제의 위치는 발해 북쪽]
[당 태종 고구려 침공시 출발지였던 정주와 고대의 요동이었던 지금의 북경]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구려 보장왕 3년(A.D.644) 11월 조를 보면,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칠 때 육군은 이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을 삼아 보·기병 6만으로 편성해 요동(필자주 : 고대의 요동은 현재의 북경 일원을 말한다)으로 향하게 하고,
수군은 장량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4만3천명의 군사와 전함 5백 척으로 내주(필자주 : 현 산동반도 래주시를 말한다)를 출발하여 평양(필자주 : 하북성 승덕시를 말한다)으로 향하게 하고,
당 태종 본인은 정주(定州, 필자주 : 북경 서남쪽 하북성 보정시의 정주시를 말한다)에 이르러 직접 이끄는 군사들을 전시체제로 바꾸어, 고구려 정벌 길에 나서 동북쪽으로 진군하여 요동(遼東)을 향해 진군하게 된다.
그리하여 645년 4월 수군을 이끄는 "장량은 동래(산동반도)로부터 수군을 이끌고 바다(필자주 : 발해를 말한다)를 건너 패수(필자주 : 지금의 난하를 말한다)를 타고 올라가 고구려의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하게 되는데, 성의 사면이 험준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다만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었으며. 5월에 이르러 성이 함락되어 남녀 8천명이 여기에서 몰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張亮帥舟師 自東萊渡海 襲卑沙城 城四面懸絶 惟西門可上.....五月城陷男女八千口沒焉]"
그런데 이 비사성(卑沙城)의 지형적 특성을 보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원년(A.D.392) 조에, “10월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절벽이고(四面峭絶), 해수로 둘러져 있어(海水環繞) 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공격한 지 20일 만에야 함락시킬 수 있었다(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絶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乃拔)”라고 기록되어 있는 백제 관미성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찾고보니 비사성과 관미성은 다른 성이었다.
[난하 강변의 비사성 추정지 : 지금의 난하가 고대의 패수였고, 비사성은 바로 이 패수 동쪽 강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나라 수군은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만 했다. 좌표는 동경118도13분09초 북위40도36분08초 일원이다]
그렇다면 비사성(卑沙城)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던 성일까?
위 비사성(卑沙城)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사면이 험준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城四面懸絶) 오직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惟西門可上)”라고 되어 있는데, 필자가 찾아낸 위 그림을 보면, 성의 사면은 험준한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으로는 옛 패수(浿水)였던 지금의 난하가 흐르고 있으며, 강쪽에서 성으로 올라가는 길이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오직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라고 기록했을 것인데, 기록과 지형이 정확히 일치한다.
따라서 필자가 찾은 이곳이 바로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 고구려의 비사성(卑沙城) 일 것이다.
위치는 지금의 발해 북쪽 난하 반가구수고 북쪽, 승덕현 남쪽, 난하와 유하가 합류하는 지점 동쪽 흥륭현 왕가장(王家庄) 일원으로서, 좌표는 동경 118도13분09초 북위 40도36분08초이다.
☆ 고구려의 비사성이 지금의 요동반도 끝인 대련에 있다고 하는 주장은 순 엉터리이다.
지금의 요동반도는 고대의 왜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