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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비사성(卑沙城)을 찾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22. 11. 26. 15:13

윤여동설 고구려 비사성(卑沙城)을 찾았다 최초주장

 

[고대의 요동이었던 지금의 북경 동쪽 1천여리에 위치했던 고구려와 백제의 위치는 발해 북쪽]

 

[당 태종 고구려 침공시 출발지였던 정주와 고대의 요동이었던 지금의 북경]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구려 보장왕 3(A.D.644) 11월 조를 보면,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칠 때 육군은 이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을 삼아 보·기병 6만으로 편성해 요동(필자주 : 고대의 요동은 현재의 북경 일원을 말한다)으로 향하게 하고,

  수군은 장량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43천명의 군사와 전함 5백 척으로 내주(필자주 : 현 산동반도 래주시를 말한다)를 출발하여 평양(필자주 : 하북성 승덕시를 말한다)으로 향하게 하고,

  당 태종 본인은 정주(定州, 필자주 : 북경 서남쪽 하북성 보정시의 정주시를 말한다)에 이르러 직접 이끄는 군사들을 전시체제로 바꾸어, 고구려 정벌 길에 나서 동북쪽으로 진군하여 요동(遼東)을 향해 진군하게 된다.

  그리하여 6454월 수군을 이끄는 "장량은 동래(산동반도)로부터 수군을 이끌고 바다(필자주 : 발해를 말한다)를 건너 패수(필자주 : 지금의 난하를 말한다)를 타고 올라가 고구려의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하게 되는데, 성의 사면이 험준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다만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었으며. 5월에 이르러 성이 함락되어 남녀 8천명이 여기에서 몰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張亮帥舟師 自東萊渡海 襲卑沙城 城四面懸絶 惟西門可上.....五月城陷男女八千口沒焉]"

 

  그런데 이 비사성(卑沙城)의 지형적 특성을 보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원년(A.D.392) 조에, “10월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절벽이고(四面峭絶), 해수로 둘러져 있어(海水環繞) 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공격한 지 20일 만에야 함락시킬 수 있었다(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絶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乃拔)라고 기록되어 있는 백제 관미성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찾고보니 비사성과 관미성은 다른 성이었고, 이 비사성은 고구려와 백제가 심하게 다투었던  수곡성(水谷城) 관련 기록과 일치했다.   

 

[난하 강변의 비사성 추정지 : 지금의 난하가 고대의 패수였고, 비사성은 바로 이 패수 동쪽 강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나라 수군은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비사성(卑沙城)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던 성일까?

  위 비사성(卑沙城)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사면이 험준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城四面懸絶) 오직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惟西門可上)라고 되어 있는데, 필자가 찾아낸 위 그림을 보면, 성의 사면은 험준한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으로는 옛 패수(浿水)였던 지금의 난하가 흐르고 있으며, 강쪽에서 성으로 올라가는 길이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오직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라고 기록했을 것인데, 기록과 지형이 정확히 일치한다.

 

  따라서 필자가 찾은 이곳이 바로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 고구려의 비사성(卑沙城) 일 것이다.

  위치는  지금의 발해 북쪽 난하 반가구수고 북쪽, 승덕현 남쪽,  난하와 유하가 합류하는 지점 동쪽 흥륭현 왕가장(王家庄) 일원으로서, 좌표는 동경 118도13분09초 북위 40도36분08초이다.

  

  또 사서의 기록들을 종합해서 판단해 보면, 이곳은  옛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으로도 비정되는 곳이다. 

  옛 수곡성(水谷城)이 후세에 비사성(卑沙城)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비사성과 수곡성은 같은 성의 다른 이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비사성이 지금의 요동반도 끝인 대련에 있다고 하는 주장은 순 엉터리이다. 지금의 요동반도는 고대의 왜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