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백제 관미성(關彌城)은 발해 북쪽 대륙 강화(江華)에 있었다 - 최초주장
백제 관미성(關彌城)의 위치는 아직 풀지 못한 우리 역사의 천년 수수께끼인데, 우리가 그 관미성을 확실하게 찾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원년(A.D.392) 조를 보면, “10월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절벽이고(四面峭絶), 해수로 둘러져 있어(海水環繞) 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공격한 지 20일 만에야 함락시킬 수 있었다(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絶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乃拔)”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 8년(A.D.392) 조를 보면, “가을7월 고구려왕 담덕(광개토왕)이 군사 4만을 거느리고 와서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석현성(石峴城) 등 10여개 성을 함락 시켰다. 왕이 담덕이 군사지휘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항전하지 못하여 한수(漢水) 북쪽의 부락들을 많이 빼앗겼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여 관미성(關彌城), 석현성(石峴城) 등 10여개 성을 빼앗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또 백제본기 아신왕 2년(A.D.393) 조를 보면, "가을8월 왕이 진무에게 말하기를, ‘관미성(關彌城)은 우리나라(백제) 북쪽 변경의 요충인데 그것이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어 있다. 이를 내가 통분하게 여기는 바이다. 그대도 애를 써서 설욕해야 할 것이다’ 하고는 군사 1만을 주어 고구려의 남쪽변경을 쳤다. 진무가 병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석현(石峴城) 등 5개성을 회복하고 나아가 관미성(關彌城)을 포위했더니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둘러막고 굳게 지켰다. 진무가 군량 수송이 계속될 수 없다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 아신왕이 고구려에게 빼앗긴 관미성(關彌城) 등을 다시 탈환하기 위하여 군사를 출전시켰으나 석현성(石峴城)을 비롯한 일부 성만 탈환하고, 백제의 북쪽 변경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었던 관미성(關彌城) 탈환에는 실패했음을 알게 하는데, 아신왕은 이에 그치지 않고 2년 후인 395년 8월에 이르러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나 고구려 광개토왕이 직접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패수(浿水) 전투에서 군사 8천의 희생자를 내며 패전하게 되어 실패하게 되고, 또 11월에 이르러 다시 패수(浿水) 전투에서의 패전을 보복하려고 몸소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려 했으나 날씨가 추워져 철군하게 되어 또 다시 실패한다.
그러자 고구려 광개토왕은 이러한 백제 아신왕의 도전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지, 호태왕비문 영락6년 병신년 조를 보면, 396년에 이르러 광개토왕이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하여 도읍인 한성(漢城)을 포위하게 되고, 결국 아신왕이 무릎 꿇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종(노객)이 되어 따르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항복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보면 이때 호태왕은 평양성(필자주 :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에서 군사들을 배에 싣고 패수를 타고 내려와 신속하게 군사들을 이동시켜 백제 북쪽의 여러 성들을 함락시키며 진군하여 백제의 도읍인 한성(漢城)을 포위함으로써 아신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필자는 지금까지 강화의 삼랑성(三郎城)이 곧 백제의 관미성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었는데, 이는 규원사화 단군기에, “단군이 이미 제후를 봉한 후 천하가 밝아지고 고요하더니 10년 만에 남이의 환란이 일어났다. 갑비고차(甲比古次, 필자주 : 대륙 강화도를 말하는 것이다)는 이미 남이(南夷)인의 땅이었다. 그리하여 부여(夫餘)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평정하게 하였다. 후에 부소(夫蘇)와 부우(夫虞)를 더 보내 갑비고차에 성을 쌓게 하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지키게 하였다. 이곳이 지금 강화도의 삼랑성(三郞城)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마리산(마니산)에는 참성단(塹城壇)이 있으니 이것이 곧 단군이 단을 만들고 하늘에 제사지내던 두악(頭嶽)이다......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은 북쪽으로 사냥가면 태백산(太白山)이었고, 남쪽으로 가면 두악이었다.
갑비고차(甲比古次)는 바닷가에 있어 배를 타고 가기가 쉬워서 남쪽으로 행차할 때는 반드시 단소(참성단)에서 제사지냈다. 특히 그곳은 육지와 떨어져 있어 조용하고, 산악이 정결하며, 맑은 하늘과 바다가 보이므로, 고요하고 깊고 밝으며 깨끗한 기운은 사람들에게 신의 오르내림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백제의 아신왕도 이러한 삼랑성의 역사성과 요충성을 인식하고 그 성을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고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삼랑성(三郎城)의 위치는 지금까지 그 위치가 전해오고 있어 삼랑성이 곧 관미성이었다면 어떤 형태로든 그러한 사실이 기록되어 전해졌을 터인데, 삼랑성을 관미성으로 바꾸어 부른 적이 있다는 기록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고, 관미성의 구체적인 위치가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도 매우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기도 강화도호부 건치연혁을 보면, “본래 고구려의 혈구군(穴口郡, 일운 갑비고차라고도 한다)인데, 신라 경덕왕이 해구(海口)로 바꾸었고, 원성왕이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했는데,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강화)으로 바꾸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옛 고조선 때의 갑비고차(甲比古次), 고구려 때의 혈구(穴口), 신라 때의 해구(海口), 고려 때의 강화(江華), 강도(江都)가 모두 강화도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산천 조를 보면, “고려산(高麗山)은 강화도호부의 서쪽 5리에 위치해 있는 진산”이라 했고,
고적 조를 보면, “고궁성(古宮城)이 송악리에 있는데, 도호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고려 고종 때 흙으로 쌓은 내, 외성이 있는데, 외성은 둘레가 37,076척이고, 내성은 둘레가 3,874척이다” “고려산성(高麗山城)이 있는데, 흙으로 쌓았고(토축) 둘레가 19,372척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이 고궁성, 고려산성 일원이 옛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이 아니었나 싶은 것이다.
강화에는 옛날 고조선의 단군왕검께서 부소, 부우, 부여 세 아들을 보내 쌓았다는 삼랑성(三郎城)이 강화도호부의 남쪽 32리에 위치한 전등산(傳燈山)에 있고, 또 강화도호부의 남쪽 35리에 위치한 마니산(摩尼山) 정상에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냈다는 참성단(塹城壇)이 있어 필자는 지금까지 이 삼랑성이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이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다시피 강화가 다시 중요하게 부각된 시기는,
고려 때 몽골의 침공을 받고 강화로 천도했던 강도(江都) 시기 즉 1232-1270년 사이 시기라 할 수 있고,
그 후 삼별초(三別抄)의 대몽항쟁 중심지가 되기도 했기 때문에, 바로 이 시기 쯤에 백제 관미성(關彌城)이라는 원래의 이름은 잊혀지게 되었고, 강도(江都), 강화(江華)로 고정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즉 강화도호부 부근이 옛 관미성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대륙 강화로 비정되는 하북성 당산시 천서현의 관할구역]
그런데 진짜 문제는 고려(高麗)로부터 그 이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와 마한, 진한, 변한, 고조선(왕검조선) 등이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가 아니라 발해 북쪽 대륙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백제의 관미성도, 고려의 강화도 모두 지금의 발해 북쪽 대륙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된다.
그러므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강화(옛 갑비고차, 혈구, 해구)도 한반도의 강화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천서현(遷西縣)에 위치한 난하(灤河, 패수이다) 중 대흑정수고(大黑汀水庫) 동쪽 동수욕촌(東水峪村) 일원을 말하는 것인데, 위 그림에서 보듯 깍아지른 듯한 산의 능선을 따라 성을 쌓았기 때문에 관미성의 사면이 절벽이라고 기록했던 것이라 여겨지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난하(灤河)가 흐르고 동쪽과 북쪽으로 장하(長河)와 난하가 흐르기 때문에 관미성이 해수(海水)로 둘러져 있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그런데 새로 찾은 대륙 관미성의 위치를 놓고 생각해보면, 왜 백제 아신왕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고구려에 빼앗긴 이 관미성을 기어코 되찾으려 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관미성으로부터 당시 백제의 도읍인 한성(漢城)까지는 군사들이 빨리 행군해 가면 2-3일 정도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안보상 매우 불안했을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인데,
아신왕의 염려대로 백제는 결국 고구려 광개토왕의 침공을 받아 도읍인 한성(漢城)이 포위되고, 아신왕은 광개토왕 앞에 나아가 무릎 꿇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노객이 되어 따르겠습니다”라고 맹세하는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