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신라왕들의 키(신장)는 과연 얼마쯤 되었을까? - 최초공개
삼국유사 기이제1 제4대 탈해왕 조를 보면, “탈해왕은 재위 23년인 건초4년 기묘년(A.D.79)에 죽어 소천구(疏川丘) 가운데에 장사지냈다.
그런데 뒤에 신(神)이 명하기를, ‘내뼈를 땅에 묻지 마라’고 하였다. 그 두골(頭骨)의 둘레는 3척2촌(73.6cm), 신골(身骨)의 길이는 9척7촌(223cm)이나되었는데, 치아는 하나로 연결되었고, 뼈마디는 모두 통뼈였다. 이것은 이른바 천하에 둘도 없는 역사(力士)의 골격이었다. 그리하여 뼈를 갈아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모셔 두었다.
그랬더니 신이 또 나타나 말하기를 ‘내 뼈를 동악에 안치해 달라’하였다. 그리하여 그곳에 봉안케 되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탈해가 죽은 뒤 문무왕 때인 조로2년 경진년(A.D.680) 3월 15일 신유일 밤에 왕이 꿈을 꾸었는데, 매우 화가 난 모습을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내가 탈해이다.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도록 하라’ 하였으므로 왕은 그 말에 따랐고,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제사를 끊이지 않고 지내니 이를 동악신(東岳神)이라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탈해왕의 신장이 무려 9척7촌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9척7촌이라면 223cm에 해당하는 길이이다.[필자주 : 고대의 1척(一尺)은 지금의 약 23cm에 해당한다] 신라 탈해왕은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키가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공자(孔子)의 신장(키)도 9척6촌(九尺六村)이었다고 한다. 환산해보면 220.8cm가 되는데, 옛날에 220cm 정도의 키였다면 공자는 가히 거인이었다고 할만하다. 공자는 옛 거인족의 후손인 것일까?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 조를 보면, “왕은 나면서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신체가 장대하였으며, 의지가 굳세고 식견이 명철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기이제1 천사옥대(天賜玉帶) 조를 보면, “제26대 백정왕의 시호는 진평대왕이오 성은 김씨이다. 대건 11년 기해(A.D,579) 8월에 즉위했다. 신장이 11척이나 되었다. 내제석궁[천주사라고도 하는데, 왕이 창건한 것이다]에 거둥하여 섬돌을 밟자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진평왕의 키가 11척이나 되는 거구였음을 알 수 있는데, 11척은 253cm에 해당하는 길이이다. 기록상 신라왕들 중에서 가장 키가 컸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지금도 키가 253cm라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당시 신라 사람들은 왕을 거인이라 불렀을 것이고, 거인왕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밖에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신라왕들의 키(신장)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는데, 보통 사람에 비하여 현격하게 컸기 때문에 특이한 사항이라 하여 기록해 전했을 것이다.
8대 아달라이사금은 신장이 7척(161cm)(삼국사기)
18대 실성이사금은 신장이 7척5촌(172.5cm(삼국사기)
22대 지증왕에 대하여는 신장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특이하게도 음경의 길이가 1척5촌(34.5cm)이었다[삼국유사 지철로왕조]고 기록되어 있으니 역시 키가 컸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음경이 이 정도 길이였다면 말의 그것과 비교될 수 있는 크기이다. 그리하여 배필을 구할 수 없어 온 나라를 뒤져 간신히 찾았다고 한다.
23대 법흥왕은 신장이 7척(161cm)(삼국사기)
28대 진덕여왕은 신장이 7척(161cm)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여자라고 하더라도 키가 161cm 정도라면 그리 크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인데, 삼국사기에는 진덕여왕의 풍모에 대하여 자질풍려(姿質豐麗) 즉 몸매가 풍만하고 고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진덕여왕은 약간 통통하고 늘씬한 키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것은 옛날 사람들의 평균 키가 6척(약138cm) 내외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에 비해보면, 진덕여왕에 대하여 키가 7척이나 되고, 아름다웠다고 기록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