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동부여(東扶餘) 해부루왕이 금와(金蛙)를 발견했던 곤연(鯤淵)은 지금의 어디일까?
삼국사기 권제13 고구려본기 제1 시조 추모왕 조를 보면, “이에 앞서 부여왕(필자주 : 동부여이다)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산천에 기도하여 아들 낳기를 바랐더니 어느 날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 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큰 돌을 들어보니 황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 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신 것이로다’ 하고는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였다. 그가 성장하매 태자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동부여의 건국시조인 해부루왕이 나이 늦도록 아들이 없자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하였는데, 어느 날 곤연(鯤淵)이라는 호수가에 이르렀을 때 왕이 탄 말이 큰 바위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눈물을 흘리자 이상하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 큰 돌을 들어보았더니 그 밑에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러자 해부루왕은 이를 천지신명이 자신에게 아들을 점지해 주신 것이라 여기고는, 데려와 양자로 삼았고,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였으며, 후일 태자로 삼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후일에 이르러 이 금와는 실제로 해부루왕의 뒤를 이어 동부여 2대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생뚱맞게 금와 이야기를 삽입한 것은 김부식이 주몽의 출생년도를 잘못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삼국사기에 동부여 금와왕이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柳花)를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만났다는 것은 오기로서, 우발수에서 유화를 만났던 사람은 해부루왕이었다.
☆ 해부루가 동부여를 세우고 왕위에 오른 때는 기원전 86년 을미년이었고, 주몽의 출생년도는 기원전 79년 임인년이었으며, 금와의 출생년도는 기원전 77년 갑진년이었다. 실제로는 주몽이 금와보다 두 살이 더 많았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오늘은 곤연(鯤淵)이 과연 지금의 어디쯤에 위치했던 호수였는지를 찾아보려 한다.
동부여(東扶餘)는 한반도 압록강 북쪽에 위치했던 나라가 아니라 지금의 내몽골 석림호특시(錫林浩特市) 정람기(正藍旗) 부근에 위치했던 나라였다.[필자주 :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 원(元) 상도성터가 옛 창해군 예국의 도읍성이었던 예성(濊城)이었을 것이다]
앞서 부여(扶餘, 夫餘)는 단군왕검이 나라 서쪽의 땅을 막내아들인 부여(扶餘, 夫餘)에게 봉했던 영지로서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그 땅을 다스렸다.
그런데 고조선 말기인 기원전 239년에 이르자 해모수(解慕漱)가 그 땅을 차지하고 주변의 부족들을 통합한 후 기원전 232년에 이르러 부여(北扶餘)의 왕위에 오르게 되고, 그 후손으로 이어간다.
그런데 기원전 195년에 이르러 고조선의 준왕이 도읍인 왕검성(王儉城)을 위만(衛滿)에게 빼앗기고(필자주 : 이를 위만조선이라 한다), 남쪽의 마한(馬韓)으로 도망쳐 와서 다시 한왕(韓王)에 오르게 되는데(필자주 : 이를 삼한이라 한다), 기원전 108년에 이르자 한(前漢) 무제가 장수들을 보내 위만조선(衛滿朝鮮)을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게 된다.
☆ 고조선의 왕검성(王儉城)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을 말한다.
그러자 부여의 후예인 부여두막루(필자주 : 졸본부여의 건국시조 동명왕의 이름이다)가 졸본(卒本)에 도읍하고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라, 기원전 87년에 북부여를 병합해버리자 그 땅을 빼앗긴 북부여의 해부루가 유민들을 이끌고 동북쪽 창해군 예(濊)의 땅으로 옮겨가서 그 땅을 빼앗아 차지하고는 동부여를 건국하게 된다.
그리하여 남쪽에는 북부여를 병합한 졸본부여, 북쪽에는 해부루가 새로 세운 동부여가 위치하게 된다.
그런데 기원전 58년에 이르러 동부여에서 태어나 자란 해모수의 후예인 해주몽(해추모)이 동부여에서 어떠한 큰 사건에 연루되어 잡히면 죽게 될 상황에 이르자,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부여로 도망쳐 갔는데, 졸본부여왕이 주몽을 만나보고는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둘째공주를 주어 부마(사위)로 삼게 되고, 얼마 후 졸본부여왕이 죽자 그 왕위를 주몽이 이어받게 되는데, 이 졸본부여는 후일 고구려로 거듭나게 된다.
그리하여 남쪽의 졸본에는 고구려가 위치하게 되고, 북쪽에는 옛 창해군 예(濊)의 땅에 세워진 해부루의 동부여(東扶餘)가 위치하게 되어 고구려와 동부여는 오랜 동안 경쟁하다가 결국에는 서기 494년 고구려 문자왕 3년에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동부여는 580년 왕조가 이때에 이르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면 동부여 왕조의 초기에 해부루왕이 산천에 기도하기 위하여 갔던 곤연(鯤淵)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바이칼일까?
후룬호(호륜호)일까?
부이르호일까?
아니면 달리호(달리약이호)일까?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위 : 바이칼호]
[위 : 후룬호]
[위 : 부이르호]
[위 : 내몽골 석림호특(錫林浩特)의 동남쪽에 위치한 적봉시 극십극등기(克什克腾旗)의 달리약이호(達里逽尒湖) : 필자는 이 달리약이(達里逽尒) 호수가 동부여 해부루왕(解夫婁王)이 가서 금와(金蛙)를 발견했던 옛 곤연(鯤淵)이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