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최리의 낙랑국(樂浪國)이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은 순엉터리 거짓말 - 최초주장
[지금의 발해 북쪽 중국 북경 부근은 우리의 대륙 옛 환인환국, 환웅단국, 고조선(왕검조선), 삼한, 삼국, 고려 땅이었다]
요즈음 여유시간이 있을 때 유튜브를 즐겨 찾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주로 시사관련 내용과 우리 역사 관련 유튜브를 뒤적인다.
시사관련 유튜브는 세상 소식을 빠르게 알기 위함이고,
우리 역사관련 유튜브는 혹시나 참신하고 새로운 주장이 있을까 싶어서인데, 필자가 보기에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쓰레기 수준의 것들로 꽉차 있었다. 참고할 만한 것들이 별로 없었다.
유튜버 본인들은 자신의 주장이 우리 역사의 참 진실이라고 생각해서 그러한 방송을 하겠지만, 우리 역사를 바르게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하게 왜곡시키고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꽤나 유명한 학자 중에도 한사군(漢四郡)의 낙랑군(樂浪郡)은 대륙 하북성에 위치했었고, 최리의 낙랑국(樂浪國)은 한반도 평양(平壤)에 위치했었다는 어이없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 낙랑군(樂浪郡)과 낙랑국(樂浪國)을 분리하여 설명하려는 것은, 고조선(古朝鮮)이 위만이나 한(漢) 무제에게 나라 전체를 빼앗겼던 것이 아니라 강역의 서쪽 일부에 지나지 않는 조그만 땅을 한 때 빼앗겼던 것 뿐이라고 주장하기 위함으로 생각된다. 일종의 애국심, 자존심의 발로라고 생각되지만, 그렇게 셜명할 경우 우리 역사의 진실은 영원히 밝힐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 거짓말이니까. 거짓으로 우리 역사를 설명하려 한다면 지금도 역사 왜곡에 혈안이 되어 있는 중국이나 일본과 다를게 하나도 없다.
필자는 환국, 단국, 고조선으로부터 고려까지는 대륙역사였고, 이성계의 조선부터가 한반도 역사였다고 인식하고 있다.
다만 백제는 대륙에서 근초고왕과 무광왕(武廣王)이 왕위다툼을 벌였고, 패한 무광왕이 365년경 대륙을 떠나 한반도 익산 금마로 와서 반도백제를 세웠고, 후일 대륙백제를 흡수 통합했으며, 한반도 경주와 김해는 우리의 신라나 가야가 아니라 왕망의 신(新)나라 건국에 적극 참여했던 투후 김일제의 후손들이 후한 광무제에게 쫓겨 한반도 남부로 도망쳐 와서 세운 흉노족왕국이었다고 보고 있고, 따라서 경주, 김해의 커다란 고총들은 흉노족왕국의 왕릉으로서, 그리하여 그곳을 발굴하면 유목민족인 흉노의 문화유물들이 출토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사서의 기록들에는,
옛날 준왕(準王)의 고조선(古朝鮮)을,
연나라 사람 위만이 빼앗아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되었다고 하였고,
[필자주 : 이때 부여와 삼한(마한, 진한, 변한)은 위만에게 빼앗기지 않았고, 내내 원수지간이었다. 따라서 옛 고조선의 북쪽 땅 일부를 위만에게 빼앗겼던 것이지 그 서쪽 부여와 남쪽 삼한지역은 건재하고 있었고, 후일 이 부여와 삼한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되었다]
그 위만조선을 한(漢) 무제가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한사군(漢四郡) 즉 낙랑군(樂浪郡), 진번군(眞番郡), 임둔군(臨屯郡), 현토군(玄菟郡, 초기현토군)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즉 낙랑군은 옛 고조선 땅으로서 조선현(朝鮮縣, 필자주 : 평양 왕검성)에 치소를 두었다 하고,
진번군은 옛 진번국 땅으로서 잡현(霅縣, 필자주 : 우수주, 춘주)에 치소를 두었다 하고,
임둔군은 옛 임둔국 땅으로서 동이현(東暆縣, 필자주 : 하슬라, 명주)에 치소를 두었다 하며,
현토군(초기현토군)은 옥저국 땅으로서 옥저성(沃沮城, 필자주 : 함주, 원산 부근)에 치소를 두었다 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의 현장인 최리의 낙랑국(樂浪國)에 관한 기사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조에, 『“15년 임진(A.D.32) 여름 4월 왕의 아들 호동(好童)이 옥저(沃沮)에 놀러갔더니 낙랑왕 최리(崔理)가 나와 순행하다가 호동을 보고는 “그대의 용모를 보니 보통사람이 아니다. 그대가 북국 신왕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함께 자기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자기의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다.
☆ 최리의 낙랑국은 전한, 왕망의 신, 후한으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최리가 한사군의 낙랑군 땅 일부(옥저지역?)를 차지하고 스스로 국호를 낙랑국이라 하였다가 고구려 대무신왕에 의해 멸망했던 것이지, 낙랑군과 낙랑국의 위치가 대륙과 한반도로 서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었다.
그 후에 호동이 본국에 돌아와서 가만히 사람을 보내어 최씨의 딸에게 말하기를 “네가 너의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을 부숴버릴 수 있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너를 맞아들일 것이요,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너를 맞아들이지 못할 것이다”하였다.
옛날부터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 만일 적병이 쳐들어오게 되면 저절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부숴버리게 한 것이었다.
이때 최씨 여자가 예리한 칼을 가지고 가만히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을 부숴 버리고 호동에게 알려 주었다.
호동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樂浪國)을 습격 하였다.
최리는 북과 나팔이 소리를 내지 않으므로 방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우리 군사들이 성 밑까지 이르러서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숴진 것을 알고 드디어 자기의 딸을 죽인 연후에 나와서 항복하였다.[혹자는 말하기를 낙랑을 쳐서 없애기 위하여 미리 혼인하기를 청하여 그의 딸을 데려다가 며느리를 삼은 다음 그녀를 본국에 돌려 보내서 그 병기를 파괴하게 하였다고도 한다]
겨울 11월 왕의 아들 호동이 자살하였다.
호동은 왕의 둘째 왕비인 갈사왕 손녀의 소생이었다. 그의 얼굴이 아름답고 곱게 생겨서 왕이 몹시 귀여워하였기 때문에 호동이라고 불렀다.
맏왕비는 호동이 종통을 빼앗아 태자가 될까봐 왕에게 참소하기를
“호동은 나에게 무례하게 대하고, 겁탈하려고 하였다.”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당신은 호동이 다른 사람의 소생이라서 미워하는 것인가?” 하였다.
맏왕후는 왕이 자기의 말을 믿지 않음을 알고는 장차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청하옵건대 왕께서 비밀리에 지켜 보십시오.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저 자신이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하였다.
이때에는 왕이 호동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에게 죄를 주려고 하였다.
누군가가 호동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왜 자신의 결백을 밝히지 않는가?” 하니 호동이 말하기를 “내가 만일 나의 결백을 밝힌다면 그것은 어머니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고, 왕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어찌 효성이라 하겠는가?” 하고는 곧 칼을 품고 엎어져 죽었다.
겨울 12월 왕의 아들 해우(解憂 : 5대 모본왕)를 태자로 봉하였다.
한(漢)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한(漢) 나라 광무제가 왕호를 회복시키니 이때가 입무(立武: 建武) 8년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고구려의 도읍은 국내성(國內城)이었다
[필자주 :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은 북경 북쪽 하북성 적성현 후성진이고, 두번째 도읍 국내성은 북경 북쪽 연경구 영녕진을 말한다]
그런데 호동왕자가 옥저(沃沮)에 놀러 갔다고 하였으며, 그곳에서 낙랑국왕(樂浪國王) 최리를 만났다고 하였으니 고구려 국내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옥저도 있었고, 낙랑국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최리의 낙랑국이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면, 고구려 국내성, 옥저, 진번, 동예도 한반도 평양을 중심으로 그 부근에 위치했다고 해야하고 한사군도 한반도 평양을 중심으로 위치했었다고 해야 앞뒤가 맞는다.
그런데 한사군(漢四郡)이 한반도가 아닌 대륙의 하북성에 위치했었다고 주장해 놓고서는, 최리의 낙랑국(樂浪國)은 한반도 평양(平壤)에 있었다고 주장하면, 호동왕자가 출발했을 국내성은 어디였으며, 놀러갔던 옥저는 또 어디를 말하며, 호동왕자는 대륙 하북성에서 한반도 평양부근까지 놀러왔었고, 한반도 평양에서 낙랑공주를 만났다는 말인가?
대륙 하북성 낙랑군, 한반도 평양 낙랑국설은 이토록 말도 안되는 한심한 주장인 것인데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그 주장이 진실인양 강의하는 것을 보면 참 기가 막힌다.
☆ 어느 사람은 창려의 갈석산(碣石山)이 중국과 고구려의 경계였다고 인식하기도 하고, 진황도 노룡을 평주(平州)라고 주장하기도 하던데, 진짜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의 낭아산이고, 진황도 노룡은 대륙백제의 웅진이었다.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의 상황인식이 이러한 정도하니 어찌 우리의 대륙역사를 밝힐 수 있으랴.
그들은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600리에 위치했던 고대의 요동(遼東)이 지금의 북경(北京)을 말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으니, 요동(遼東) 동쪽 1천여리에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가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서의 기록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으며,
고대의 10리가 지금의 2.3km에 해당한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으며,
요수(遼水)가 지금의 영정하(永定河)이고, 패수(浿水)가 지금의 난하(灤河)라는 것도 모른다.
[필자주 : 개중에는 난하를 패수라 하면서도 또 왕검성, 평양성은 한반도 평양이라고도 하고 있으니 원........ㅋ]
그들은 옛 불함산(不咸山), 태백산(太白山), 장백산(長白山)이 지금의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인 것을 꿈속에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고,
고조선의 첫도읍 아사달(阿斯達)과 장당경(당장경)이 내몽골 적봉시 영성현(寧城縣) 부근임을 모르는 것이고,
낙랑군(樂浪郡)의 치소였던 조선현(朝鮮縣)이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이고, 왕검성(王儉城)이 피서산장(열하행궁)인 것을 감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숙신(肅愼), 말갈(靺鞨)이 지금의 내몽골 서랍목륜하(시라무렌하) 부근에 위치했던 것을 알 턱이 없고,
초기 현토군(玄菟郡)이 설치되었던 옥저(沃沮)가 지금의 내몽골 적봉 일원에 위치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리 없으며, ,
임둔군(臨屯郡)이 설치되었던 동예가 지금의 내몽골 통요시(通遼市) 혹은 고륜기(庫倫旗) 일원 임을 모르고 있는 것이고,
진번군(眞番郡)이 우하량 선사 유적지가 있는 지금의 요녕성 능원(凌源) 일원을 말한다는 것을 알 턱이 없는 것이다.
또한 신라의 천년 도읍지 서라벌(徐羅伐)이 한반도 경주가 아니라 지금의 발해 북쪽 북경 동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임을 모르는 것이고,
백제의 웅진(熊津)이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盧龍)이고, 마지막 도읍 사비(泗沘)가 하북성 당산시 난주(灤州) 난현 임을 모르는 것이며,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봉안기]
☆ 한반도에는 4세기 중반에 무광왕(武廣王)이 익산 금마에 세운 반도백제가 있었다. 무광왕, 모도왕(牟都王) 등이 바로 반도백제의 왕들이었고, 한반도 익산 쌍릉은 대륙백제의 무왕 능이 아니라 바로 반도백제의 왕릉일 것이다. 그리고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봉안기에 언급되고 있는 사탁왕후(필자주 : 좌평 사탁적덕의 딸이라고 하였다)의 남편이었던 백제왕은 반도백제의 남제왕(男弟王)으로 추정되는데, 이 남제왕은 모도왕의 장손자로서 대륙백제 동성왕, 무령왕의 장형이었다. 동성왕은 반도백제 모도왕의 아들이었던 곤지의 둘째아들이었고, 무령왕은 곤지의 여섯째 아들로서 남제왕, 동성왕과는 이복형제 사이였다.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卒本)이 북경 북쪽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임을 꿈속에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이고,
국내성(國內城)이 지금의 북경 팔달령장성 넘어 연경현 영녕진(永寧鎭)이고, 환도성(丸都城)이 북경 북쪽 회유 발해진(渤海鎭) 임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반도 경주(慶州)나 김해(金海)가 대륙에서 왕망의 신(新) 나라가 후한(後漢) 광무제에게 멸망당하자, 대륙에서 도망쳐 한반도 남부로 도망쳐 온 흉노족인 투후 김일제의 후손들이 세웠던 흉노족왕국의 도읍이었음을 꿈에도 생각해 본적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도 진짜 임나(任那)를 찾고 싶거든, 애꿎게 한반도 남부를 임나(任那)라고 억지 주장하지 말고, 지금의 발해(渤海) 북쪽 하북성 진황도(秦皇島)로 가라.
그곳이 바로 진짜 임나였고, 지금의 요동반도(遼東半島)에 고대의 왜국(倭國)이 위치하고 있었으니까......................
상황이 이러한데 우리의 강단사학자라는 사람들은 도대체 우리 역사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바르게 알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다. ㅋ
[아래 사서의 기록이 좀 길지만 꼭 읽어 보십시오.
고대의 요동(遼東)을 지금의 북경, 고구려 평양성(고조선 왕검성)을 하북성 승덕시, 고구려 요수를 영정하, 압록강을 백하 밀운수고, 살수를 조하 고북구, 패수를 난하에 맞추고 읽어보시면, 한반도 평양에 최리의 낙랑국이 위치하고 있었다는 반도 식민사관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 사기 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 제55
조선왕 만(위만)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
연(燕)나라가 강성할 때 진번과 조선을 공략하여 귀속시키고 관리를 두고 요새를 쌓았었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 시켰을 때 조선은 요동(遼東)의 외곽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흥기하자 그곳이 멀고 수비하기가 어렵다하여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로 정하여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연나라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위만)도 1천여 명의 무리와 함께 상투(추결)를 틀고, 만이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요새를 넘어 달아나 패수를 건너 망명하여 진나라의 빈땅인 상하장에서 살았다.
점차 진번․조선과 만이 그리고 연나라, 제나라에서 망명해온 자들을 모아서 왕이 되고 왕험(王險 : 王儉)에 도읍 하였다.
한나라 혜제와 여후 때에 이르러 천하가 처음으로 평정되자 요동태수는 만을 외신으로 삼고 약정을 체결하였는데 “만은 외신이 되어 요새너머의 만이들을 통솔하되 변경에서 약탈하지 못하게 하고, 여러 만이의 군장들이 천자를 만나기 위하여 입조하고자 할 때 그를 막아서는 아니된다” 하였다. 이를 듣고 천자도 허락하였다.
이런 연고로 만은 병사와 재물로써 부근의 소읍을 쳐 항복 시켰다.
진번(眞番), 임둔(臨屯)도 모두 복속하여 왔으므로 땅이 사방 수천 리에 이르렀다.
(위만의) 왕위가 아들에게 전해지고 손자인 우거에 이르렀는데, 한나라 사람들이 많이 망명해 갔고, 또 조선왕(우거)은 한(漢) 나라에 입조하지도 않았으며, 진번과 이웃한 여러 나라가 천자를 알현하고 글을 올리려 하였으나 길을 막고 통과시키지 않았다.
원봉 2년(B.C.109) 한나라는 섭하를 보내어 (조선의) 우거를 회유하였으나 끝까지 수긍하지 않고, 조서를 받들지 않았다.
섭하는 돌아올 때 국경인 패수에 이르자 사람을 시켜 전송 나온 조선의 비왕장을 죽이고 즉시 강을 건너 요새로 돌아와서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천자는 그것을 잘한 것으로 여겨 나무라지 않고, 섭하를 요동동부도위에 임명하였다.
조선이 섭하를 원망하여 군사를 갑자기 발동시켜 섭하를 죽여버리자 천자는 죄수들을 모아 조선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 해 가을 누선장군 양복을 보내 병력 5만으로 제나라에서 발해에 배를 띄우게 하고, 좌장군 순체에게는 요동(遼東)을 출발하게 하여 우거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우거가 군사들을 발동시켜 험준한 곳에서 막았다.
좌장군(순체)의 졸정인 다(多)가 요동병사들을 이끌고 멋대로 선제 공격했다가 패하고, 흩어져 도망해 왔으므로 잡아 군법에 의하여 참수하였다.
누선장군(양복)이 제나라 군사 7천명을 이끌고 먼저 왕험(왕검)에 이르렀는데, 성을 수비하고 있던 우거가 누선장군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곧 성을 나와 공격하였다.
누선장군의 군사들은 패하고 흩어져 도망하였다.
무리를 잃은 양복장군은 10여일 간 산 속에 숨어 있으면서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모아 군대를 다시 편성하였다.
좌장군은 패수 서쪽에서 조선을 공격하였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천자는 두 장군의 전세가 불리하자, 위산을 사자로 보내어 군사의 위용으로 우거를 회유하도록 하였다.
우거는 사자를 보자 머리 숙여 사과하고 “항복을 하고 싶었지만 두 장군이 죽일지도 몰라 두려웠다. 이제 신임표인 부절을 보았으니 항복을 청한다”고 하였다.
우거는 태자를 입조시켜 사죄하고, 말 5천 필을 헌납하며, 군량을 공급하겠다고 하였다.
태자가 무장한 1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패수를 건너려고 하였는데, 사자 위산과 좌장군은 혹시 변란이 있을까 의심하여, 태자에게 “이미 항복을 하였으니 수행하는 군사들에게 무기는 버리라고 명하시오” 하였다.
태자 역시 사자와 좌장군이 자기를 죽일까 의심하여 패수를 건너지 않고 되돌아가 버렸다.
위산이 돌아와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위산을 주살 하였다.
좌장군은 패수 강가에 배치된 조선군을 격파하고 앞으로 나아가 성(왕검성) 아래에 도착하여 성의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누선장군 역시 합류하여 성의 남쪽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우거가 성을 굳게 지켜 수개월이 되어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좌장군(순체)은 원래 시중이었고, 연(燕 : 현 산서성 북쪽 내몽고자치구부근)과 대(代 : 현 산서성 북부 대현부근)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군사들이 독하고 날랬으며 교만스러웠다.
누선장군(양복)은 제나라(현 산동반도부근) 병졸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 우거와의 전투에서 이미 여러 번 패하여 병졸들을 많이 잃었으므로 병졸들은 겁을 먹고 있었다.
그리하여 누선장군 양복은 우거왕을 포위하고는 있었으나 항상 화친하기를 원하였고, 좌장군은 빨리 공격하려고 하였다.
조선의 대신들은 은밀하게 첩자를 보내 상황을 탐지하고는 사람을 누선장군 양복에게 보내 항복을 약속하였으나 말만 오갈 뿐 확실히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좌장군 순체는 누선장군과 함께 여러 차례 조선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누선장군은 조선이 약속한 항복을 빨리 받아낼 욕심으로 순체와 만나지도 않았다.
좌장군 역시 조선에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조선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누선장군에게 만 마음이 쏠려 있었다.
이렇게 두 장군의 마음은 일치하지 못하였다.
좌장군은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누선장군이 앞서 군사를 잃은 죄가 있어 이제 조선과 사사로이 친선을 맺어 항복하지 못하게 하고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인가 의심스러웠지만 발설하지는 않았다.
천자가 말하기를 “두 장군이 진격하지 못하므로 위산을 우거에게 사자로 보내어 회유하였었다. 우거가 항복하고 태자를 한나라에 보내기로 했었는데 사자인 위산이 자기가 결정하지 못하고 좌장군과 잘못 상의하여 항복 약속을 그르치고 말았다.
지금 두 장군이 성을 포위하고는 있으나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해결되기는 틀렸다.” 하고는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내어 일을 마치도록 하고, 편의에 따라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공손수가 도착하자 좌장군 순체가 말하기를 “조선이 오래 전에 항복했을텐데 아직 까지 항복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고는 누선장군이 만나지도 않는다는 것과 또 자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모두 말하였다.
“지금과 같은 사태를 빨리 처리하지 않는다면 커다란 해가 있을까 걱정되고, 누선장군과 조선이 연합하여 나의 군대를 공격하여 큰 해를 입히는 일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공손수 역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여 부절로서 좌장군의 군영에서 작전회의를 한다고 누선장군을 소환하여 그가 오자 좌장군 휘하에 명하여 누선장군을 즉시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 다음 누선장군의 병력을 좌장군의 휘하에 병합하고 이를 천자에게 보고하였다. 천자는 공손수를 처형해 버렸다.
좌장군은 병합된 군사로서 조선을 급히 공격하였다.
조선의 재상 노인과 한음, 이계의 재상 삼과 장군 왕겹 등이 모의하기를 “처음에 우리는 누선장군에게 항복하려고 했었는데. 누선장군은 지금 갇혀있고 좌장군이 혼자 양쪽 군사를 거느리고 있어 우리가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것이니 전투상황이 매우 급하고 공포스럽다. 왕(우거왕)은 항복하는 것에 대하여 긍정적이지 못하다” 하고는 한음과 왕겹, 노인은 도망하여 한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 3년(B.C.108) 여름에 이계의 재상 삼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한나라에 투항하여 왔다.
그러나 왕검성은 아직도 함락되지 않고, 우거의 대신인 성이(成已)가 한나라군를 다시 공격하였다.
좌장군 순체는 항복한 우거의 아들 장(위장)과 재상 노인의 아들 최로 하여금 백성들을 회유하여 성이를 죽이도록 함으로써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는 4군으로 만들었다.
삼을 홰청후에, 한음을 적저후에, 왕겹을 평주후에, 장을 기후(幾候)에 봉하였다.
최는 그 아버지가 죽었고 또 공이 있다고 하여 온양후로 봉하였다.
좌장군은 소환되어 공을 다투고 서로 시기 질투하고 모략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어 목이 잘려 저자거리에 매달렸다.
누선장군 역시 열구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좌장군을 기다려야 했는데도 기다리지 않고, 멋대로 먼저 공격하여 많은 병사를 잃었다는 죄목으로 응당 처형되어야 했으나 속죄금을 물고 서민으로 강등되고 말았다.
☆ 삼국지권30위서30오환선비동이전제30동옥저(東沃沮)전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는데, 대해(큰바다)가에 산다.
그 지형이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다. (땅이) 천리쯤이다.
북쪽은 읍루와 부여, 남쪽은 예, 맥과 접했다.
백성이 5천 호이다.
대군왕은 없고, 읍락에는 세습하는 우두머리(長帥)가 각각 있다.
언어는 (고)구려와 대개 같지만 때때로 조금씩은 다르다.
한(漢) 나라 초에 연나라의 망명객인 위만이 조선의 왕이 될 때 옥저(沃沮)를 모두 복속시켰다.
한 무제 원봉 2년(B.C.109 : 원봉3년이 옳다) 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를 죽이고, 그 땅을 나누어 네 군으로 만들었는데, 옥저성(沃沮城)을 현토군(玄菟郡)으로 하였다.[필자주 : 옥저는 동옥저, 남옥저, 북옥저가 있었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는데, 지금 소위 현토의 옛 부(府)라는 곳이 바로 그 곳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 나라는 그 땅이 넓고, 멀어 단단대령(單單大嶺)의 동쪽을 나누어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하고, 치소를 불내성(不耐城)에 두어 별도로 대령의 동쪽 일곱 개 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이때 옥저 역시 모두 현이 되었다.
(후한) 건무 6년(A.D.30) 변경의 군을 줄일 때, 도위도 폐지하고, 그 후 모두 현의 거수(渠帥)로서 현후를 삼으니 불내(不耐), 화려(華麗), 옥저(沃沮) 등의 여러 현이 모두 후국(侯國)이 되었다.
이적(夷狄)들이 서로 침공하고 싸웠으나, 오직 불내예후(不耐濊侯) 만이 지금에 이를 때까지 공조(功曹), 주부(主簿) 등의 여러 부서를 존치시켰는데, 모두 예인이 차지하였다.
옥저의 여러 읍락 거수들은 모두 스스로를 삼로(三老)라 칭하는데, 이는 옛 현이었을 때의 제도이다.
(동옥저는) 나라가 작고, 큰 나라 사이에 끼어 있어 마침내 (고)구려의 신하가 되었다.
(고)구려가 다시 대인을 사자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또 대가(大加)로 하여금 조세로서 담비가죽, 포, 생선, 소금, 해산물 등을 거두어 천리나 져 나르게 하고, 또 동옥저의 미인을 보내게 하여 비첩으로 삼았는데, 그들을 노복처럼 대우하였다.
(동옥저의) 토질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이 잘 자라며, 밭에 씨를 뿌리면 농사가 잘 된다.
사람들의 성질은 정직하며, 강건하고, 용감하다.
소나 말이 적고, 창을 잘 다루어 보병전을 잘한다.
음식, 거처, 의복, 예절은 (고)구려와 비슷하다.
위략에는 그 나라의 혼인풍습은 여자의 나이가 열 살이 되기 전에 약혼하고, 신랑집에서는 그 여자아이를 맞아들여 장성할 때까지 길러 아내로 삼는다. (여자가) 성인이 되면 다시 친정 집으로 돌아가게 한다.
여자의 친정에서는 돈을 요구하는데, (신랑집에서는) 돈을 지불한 후 다시 신랑집으로 돌아온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장사를 지낼 때에는 큰 나무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장이나 되며, 한쪽을 열어 놓아 입구를 만든다.
새로 사람이 죽으면 모두 가매장을 하는데, 시신이 묻힐 만큼만 묻었다가 가죽과 살이 다 썩은 다음 뼈만 추려 곽 안에 안치한다. 온 집안 식구를 모두 한 곽 속에 넣어 두는데, 죽은 사람의 숫자대로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나무로서 모양을 새긴다. 또 질그릇 솥에 쌀을 담아 곽의 입구 곁에 걸어둔다.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할 때, (고)구려의 왕 궁(宮: 위궁의 오기로서 고구려 동천왕을 말하는 것이다)이 옥저로 달아났으므로 (관구검이) 군대를 진격시켜 공격하고, 옥저의 읍락을 모두 파괴하고, 3천여 명의 목을 베거나 포로로 잡으니 궁(위궁)이 북옥저로 달아났다.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婁) 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와는 8백여 리 떨어져 있다.
그들의 풍속은 남, 북이 모두 동일하며, 읍루와 접해있다.
읍루는 배를 타고 다니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여름철에는 깊은 산골짜기의 바위굴에서 살면서 수비하고, 겨울철에 어름이 얼어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내려와 촌락에서 생활한다.
왕기가 별도로 군사를 보내 궁(위궁)을 추격하여 동쪽 경계의 끝까지 갔을 때, 그곳의 노인에게 “바다의 동쪽에 사람이 살지 않는가?” 하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수십 일을 바람 부는 대로 표류하여 동쪽으로 흘러가서 한 섬에 도착하였는데, 그 섬 위에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았고, 그들의 풍속은 해마다 7월에 동녀(童女)를 구하여 바다에 던진다”고 했으며,
또 말하기를 그 나라가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모두 여자뿐이고, 남자가 없다고 했다.
또 말하기를 “어느 사람이 바다 가운데에 떠 있는 베옷 입은 사람을 건졌는데, 그 입은 옷이 마치 중국 사람의 옷과 같았고, 양 소매 길이가 3장(丈)이었다.
또 난파되어 해안으로 밀려온 배 한 척이 있었는데, 그 배에 있는 사람의 목부분에 또 얼굴이 있었다. 살아 있었으나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고 하였다.
그 지역은 모두 옥저의 동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다고 했다.
☆ 삼국지권30위서30오환선비동이전제30예(濊 : 東濊)전
예(東濊)는 남쪽으로는 진한,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았다.
지금 조선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백성이 2만 호이다.
옛날 기자가 조선에서 팔조의 가르침(八條之敎)을 만들어 가르치니, 문을 닫지 않아도 백성들이 도둑질하지 않았다.
그 후 40여 대를 지나 조선후 준(準)이 왕을 참칭하였다.
(진나라 말기에) 진승 등이 일어나 천하가 진(秦)나라에 반기를 드니,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의 백성 수만 명이 조선으로 피난하였다.
연나라 사람 위만이 추결(상투)과 호복(胡服)을 입고 다시 조선으로 와서 왕이 되었다.
한 무제가 조선을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네 군(한사군)으로 하였다.
이후부터 호족(胡族)과 한족(漢族)을 점점 구별하게 되었다.
대군장이 없고, 한(漢) 대 이래로 관직으로 후, 읍군, 삼로가 있어 하호(下戶)를 통치했다.
옛날부터 그 나라의 노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들이) 고구려와 동종이다”라고 한다.
그 사람들의 성질은 우직하며, 욕심이 적고, 염치가 있어 구걸하지 않는다.
언어와 법속은 대개 (고)구려와 같지만 의복은 다름이 있다.
남녀가 모두 곡령(曲領)을 만들어 입는데, 남자는 넓이가 여러 치 되는 은화(銀花)를 옷에 꿰매어 장식한다.
단단대령의 서쪽은 낙랑에 속했으며, (단단대)령의 동쪽 일곱 개 현은 (낙랑동부)도위가 통치하는데, 그 백성이 모두 예인(濊人)이다.
뒤에 도위를 폐지하고 거수(渠帥)로서 현후로 삼았다.
지금의 불내예(不耐濊)는 모두 그 종족이다.
한(漢)나라 말에는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그 풍속에 산천을 중요시하며, 산과 냇물을 각 부락의 경계로 하여 서로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동성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
꺼리는 것이 많아서 질병으로 사람이 죽으면 옛 집을 버리고 새로운 곳에 집을 지어 산다.
마포가 있고, 양잠을 하여 비단을 짤 수 있다.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해의 풍년과 흉년을 예측한다.
주옥(珠玉)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해마다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 마시며, 노래부르고, 춤추는데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신으로 섬겨 제사지낸다.
부락을 함부로 침범하는 사람에게는 벌을 면책하기 위하여 생구와 소, 말을 부과하는데, 이를 책화(責禍)라 한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죽음으로 그 죄를 갚게 한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적다.
길이가 3장(丈)이나 되는 창을 만들어 혹은 여러 사람이 함께 잡고 사용하기도 하는데, 보병전에 능하다.
낙랑 단궁(檀弓)이 그 지방에서 만들어진다.
바다에서는 반어(班魚)의 껍질이 산출되며, 땅은 기름지고 무늬 있는 표범이 많다. 또 과하마(果下馬)가 나는데, 후한의 환제 때 헌상하였다.
정시 6년(A.D.245)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단단대)령 동쪽의 예가 (고)구려에 복속되자 군사를 일으켜 정벌했는데, 불내후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정시 8년(A.D.247) (위나라의) 대궐에 와서 조공하므로 불내예왕(不耐濊王)으로 봉했다. (불내예왕은) 백성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계절마다 군에 와서 조알하였다.
두 군(낙랑과 대방)에 전쟁이 있어 조세를 부과하면, 사람을 시켜 공급하여 주었다. (군의) 백성과 똑같이 대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