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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진5군(秦五郡)과 한4군(漢四郡)의 진짜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 2023. 1. 27. 13:23

윤여동설 5(秦五郡)과 한4(漢四郡)의 진짜 위치 최초주장

 

 

[후한서에는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600리에 요동군이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낙양에서 북경까지의 고속도로 거리가 약 800km이다. 옛 거리단위인 10리를 2.3km로 환산하면 3,478리가 된다. 따라서 고대의 요동군(遼東郡)이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연5(燕五郡), 5(秦五郡)은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상곡군(上谷郡), 요서군(遼西郡), 요동군(遼東郡)을 말하고,

  한4(漢四郡)은 낙랑군(樂浪郡), 진번군(眞番郡), 임둔군(臨屯郡), 현토군(玄菟郡)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후한서에는 낙양으로부터 각 군()까지의 거리를 아래와 같이 기록해 놓았다.

 

어양군(漁陽郡)           : 낙양 동북 2,000

우북평군(右北平郡)    : 낙양 동북 2,300

상곡군(上谷郡)           : 낙양 동북 3,200

요서군(遼西郡)           : 낙양 동북 3,300

요동군(遼東郡)           : 낙양 동북 3,600

현토군(玄菟郡)           : 낙양 동북 4,000

낙랑군(樂浪郡)           : 낙양 동북 5,000

 

  그리고 중국 사서들에는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에 대하여 "요동동쪽 1천여리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에 대하여는 한() 나라 때의 낙랑군(樂浪郡)이었고, 장안(서안)에서 5천여리 혹은 51백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군()들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던 것일까?

 

고대의 10리는 지금처럼 4km가 아니라 2.3km에 해당한다고 한다.

 

  위 그림을 보시면 확 느낌이 올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역사사기꾼들에게 속고 있었으나, 속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참고]

진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진개(秦開, ?~?)는 중국 전국시대 연나라()의 장군이다. 동호(東胡)와 고조선(古朝鮮)을 정벌하여 많은 영토를 획득하여 "현명한 장수(賢將)"라 칭해졌다.

진개의 정확한 활동시기는 알기 어렵다. 다만 사기흉노열전에서는 진개가 조 무령왕이 운중(雲中) · 안문(雁門) · () 등의 3군을 설치한 후에 활동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략 무령왕이 재위 26(기원전 300)에 운중을 차지한 이후의 일에 해당되고, 또한 그의 손자인 진무양(秦舞陽)의 활동시기가 기원전 227년인 것을 보면 대략 기원전 3세기 초의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생애

其後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東胡, 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 開之孫也. 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距胡. 當是時, 冠帶戰國七, 而三國邊於匈奴.

그 후 연에는 현명한 장수인 진개가 있었다. 동호에 인질이 되었는데, 호는 그를 깊이 신뢰했다. [연으로] 돌아오고 동호를 격파하니 [동호는] 천여리나 물러갔다. 형가와 함께 진나라의 왕을 찌르러 갔던 진무양이라는 자가, 진개의 손자이다. 연은 다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에서 양평까지 쌓았고,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을 두어 동호를 방비했다. 당시 의관과 속대를 하던 전국 일곱 나라 중 세 곳이 흉노와 맞닿았다. 한서》〈흉노전

 

동호 정벌

진개는 본래 호(, 북방 이민족)에 인질로 보내져서 그 곳의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이후 연나라로 돌아간 진개는 군대를 거느리고 동호(東胡)를 습격하여 패주시켰는데, 당시에 동호는 1천리나 물러갔다. 이후 연나라는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르는 지역에 장성을 쌓고 상곡(上谷) · 어양(漁陽) · 우북평(右北平) · 요서(遼西) · 요동(遼東) 등에 군을 설치하여 호(, 북방 이민족)의 공격을 방어했다.

 

조선 침공

조선(朝鮮)의 왕과 연나라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자, 연나라에서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방(西方)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당시에 진개는 2천리에 이르는 땅을 취하였고, 조선과 연나라는 만번한(滿番汗)을 경계로 삼았다. 이 일로 인하여 조선은 이전에 비해 크게 쇠약해졌다고 한다. 이후 진개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유산

진개의 손자는 진무양으로, 진 시황제 암살을 꾀하였던 연태자 단()과 자객 형가를 도왔던 사람이다. 진무양의 행적은 사기자객열전에 상세히 묘사되며, 형가와 함께 연나라의 사신으로 위장하여 진 시황제를 암살하려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