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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 최초의 소경(小京) 아시촌(阿尸村)의 위치를 찾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23. 3. 18. 11:39

윤여동설 신라 최초의 소경(小京) 아시촌(阿尸村)의 위치를 찾았다 - 최초주장

 

[옛 음즙벌국(音汁伐國)이었으며, 신라 아시촌(阿尸村) 소경(小京)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요녕성 부신시(阜新市) 청하문구(淸河門區)]

 

[신라 아시촌(阿尸村) 소경(小京)으로 비정되는 부신 청하문(淸河門) 부근의 지형]

 

 

  신라 최초의 소경(小京) 아시촌(阿尸村)은 과연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15(A.D.514) 조를 보면, “봄정월에 소경(小京)을 아시촌(阿尸村)에 설치하였다.

가을7월에 6부와 남쪽지방 백성들을 옮겨 그곳을 채웠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를 알 수 있는데, 이 아시촌(阿尸村)은 신라 최초의 소경(小京) 설치 장소였다.

 

아시촌(阿尸村 : 언덕아, 주검시, 마을촌)의 의미를 주검언덕동네로 본다면 혹시 옛날 공동묘지 부근에 있던 동네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

 

  그런데 이 아시촌(阿尸村) 소경에 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로서, 그 위치라든가, 언제까지 존속했는지, 후세 어떻게 변화 되었는지 등에 대하여 더 이상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역사연구자들이 그 위치를 찾아보려 노력하고 있으나 워낙 단서가 없다보니 추정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그런데 신라 지증왕의 주요 업적을 보면,

  3(A.D.502) 순장 금지

  4(A.D.503) 신라에 처음으로 왕호 제도 도입

  5(A.D.504) 상복법 제정 공포 시행

  6(A.D.505) 실직주(悉直州) 설치[필자주 : 실직은 삼척의 옛 이름이다]

10(A.D.509) 서울에 동시(東市 : 동쪽시장) 설치

13(A.D.512) 우산국 귀순[우산국은 명주(하슬라) 정동쪽에 위치한 울릉도]

15(A.D.514)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 설치 등이다.

 

  신라 지증왕은 옛날부터 관습적으로 행해지던 제도라 하더라도 불합리하다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혁신하였고,

  실직(필자주 : 삼척의 옛 이름)을 주()로 승격시키고 이사부로 군주(軍主)를 임명함으로써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며,

  우산국(울릉도)을 겁주어 스스로 귀순하여 오도록 유도함으로써 강역을 넓혔고,

  아시촌(阿尸村) 소경을 설치했다.

  이를 보면, 지증왕은 주로 서라벌(徐羅伐)의 동북쪽 방향으로 강역을 넓혔던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신라 최초의 소경 아시촌(阿尸村) 역시 신라 서라벌(徐羅伐)의 동북쪽인 실직(悉直) 부근에 설치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신라의 천년 도읍지 서라벌(徐羅伐)이 한반도의 경주가 아니라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로 밝혀졌으므로, 명주(하슬라)는 내몽골 통요시 고륜기(庫倫旗), 실직(悉直)은 요녕성 부신(阜新), 소문(召文國)은 금주시(錦州市) 의현(義縣) 일원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필자는 신라 최초의 소경 아시촌(阿尸村)은 지금의 요녕성 부신(阜新) 서남쪽에 위치한 청하문(淸河門) 부근으로 비정하고 있고, 이곳이 곧 옛 음즙벌국(音汁伐國)이었을 것이다.

  이는 497년에 북쪽 말갈과 고구려의 침공에 대한 방어를 전담하다시피했던 요충지 니하(泥河)의 우산성(牛山城)을 고구려에게 빼앗겨버렸기 때문에, 새로이 북쪽 방어선을 구축하고 지휘할 필요성이 있어 소경을 아시촌(阿尸村)에 설치했을 것이다.

  따라서 아시촌소경 (阿尸村小京)으로 비정되는 이곳 청하문(淸河門)의 위치는 옛 실직국(悉直國 : 삼척)소문국(召文國 : 의성, 지금의 의현)의 중간 지역에 위치했던 옛 음즙벌국(音汁伐國)으로서 강물로 빙 둘러싸여 있고, 들이 넓으며, 서북쪽으로부터 침공해 올 수 있는 말갈과 고구려의 침공을 방어하고 지휘할 수 있는 요충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신라 지증왕은 바로 이곳에 소경(小京)을 설치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하여 지금까지 그 위치를 알 수 없었던 신라 아시촌(阿尸村) 소경(小京)을 찾은 것이다.

 

  필자는 우리의 대륙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우리 상고사와 고대사를 정확히 밝힐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고, 고려로부터 그 이전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사를 한반도에서 찾는 한 영원히 밝힐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인식의 전환을 이루지 못하면, 우리의 고대사는 영원히 미로를 헤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