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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가야산 정상부 소머리 형상이 알려주는 가야(伽倻)의 진짜 강역 – 최초주장

윤여동 2023. 7. 15. 14:40

윤여동설 가야산 정상부 소머리 형상이 알려주는 가야(伽倻)의 진짜 강역 최초주장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은둔했던 가야산(伽倻山) 찾기

 

[발해 북쪽 요녕성 호로도시 대홍라산 정상부의 소머리 형상]

 

[대홍라산 정상의 소머리 형상 확대]

 

[대홍라산 천연사 : 옛 가야산 해인사로 추정되는 절이다]

 

  가야의 강역 내에는 가야산(伽倻山, 伽耶山)이라는 산이 있었고, 이 가야산 정상부에 소머리 형상이 있어 우두산(牛頭山)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특히 이 가야산은 신라말 고운 최치원 선생이 어지러운 속세를 떠나 바로 이 가야산 해인사(海印寺)로 들어가 은둔하다가 생을 마감한 곳이기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해인사가 있는 지금 경남 합천의 가야산이 바로 그 가야산이라고 인식하고 있을 것인데, 이상하게도 한반도 합천 가야산의 산 정상에는 소머리 형상은 커녕 비슷한 형상도 보이지 않는다. 매우 이상한 일이다.

  천년의 세월이 흘러 무너져 내렸거나 땅속으로 들어가 버렸을까?

 

  그런데 중국 사서들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함께 요동(遼東) 동쪽 1천여리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필자가 고생고생 끝에 찾아낸 고대의 요동(遼東)은 바로 지금의 북경(北京) 일원을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요동(遼東)은 요하 동쪽을 말하는 것이지만, 낙양 동북 3,600리에 위치했던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북경 일원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는 곧 중국 사서들과 삼국사기 기록 속 우리의 고구려와 백제가 바로 지금의 북경 동쪽 1천여리에 도읍하고 그 부근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백제의 동쪽, 고구려의 동남쪽에 위치했었다는 신라는 어디에 위치해야 하며, 신라의 남쪽에 위치했던 가야는 또 어디에 위치했었을까?

  당연히 이 모두는 지금의 발해 북쪽 대륙에 위치했을 것이다.

  우리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동예와 맥, 옥저, 동부여, 말갈 등이 모두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발해 북쪽, 서북쪽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산 정상부에 소머리 형상이 있다는 가야산을 찾을 차례다.

  지금 발해 북쪽 요녕성 호로도시에 대홍라산(大虹螺山, 해발 900m)이라는 꽤나 높고, 경치가 좋은 산이 있는데, 산 정상부에 위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소머리 형상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고, 그 서남쪽 골짜기에는 지금 천연사(天然寺)라는 절도 있다.

  이 호로도시의 대홍라산(大虹螺山)이 진짜 가야산(伽倻山)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지금 발해 북쪽의 요녕성 호로도시 일원이 가야의 진짜 강역이었던 것이고, 천연사(天然寺)라는 절도 가야산의 서쪽에 위치했었다는 옛 해인사(海印寺)의 흔적일 것이다.

 

가야 건국설화 속 구지봉(龜旨峯), 금관성(金官城), 망산도(望山島) 찾기

 

[발해 북쪽 요녕성 흥성시에서 찾은 구지봉, 금관성, 망산도]

 

[요녕성 흥성 수산(首山) : 가야 수로왕 탄생설화가 숨 쉬는 구지봉. 산의 형상이 마치 거북모양을 닮았다]

 

[요녕성 흥성시 흥성고성(興城古城) : 금관가야의 왕성 금관성(金官城) 추정지]

 

 

  지금의 발해 북쪽 중국 요녕성 호로도시 흥성시(興城市)에는 국가삼림공원(國家森林公園)으로 지정되어 있는 수산(首山, 해발 약300m)이라는 산이 있는데, 산의 형상이 마치 거북 모양이고, 수산의 서남쪽에 흥성고성(興城古城, 규모 : 가로, 세로 각 약850m))이라는 옛 성이 있다.

  그런데 찾고보니 지금의 흥성 수산(首山)은 가야 수로왕 탄생설화 속 구지봉(龜旨峯)이었고, 흥성고성(興城古城)은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왕성이었던 금관성(金官城)이었다.

  그리고 지금 흥성시 동남쪽의 국화도(菊花島)는 옛날 수로왕이 신하들로 하여금 허황옥이 타고 오는 배를 기다리게 했다는 망산도(望山島)였다.

 

6가야의 강역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보면, 가야의 강역에 대하여,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방향이 약간 비틀어져 기록되어 있지만, 가야의 강역이 동쪽은 황산강까지, 서쪽은 지리산까지, 북쪽은 가야산까지, 남쪽은 바다에 닿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에서 알아보았다시피 북쪽의 가야산은 지금의 요녕성 호로도시에 있는 대홍라산(大虹螺山)을 말하는 것이고, 황산강은 발해 금주만(錦州灣)으로 흘러드는 지금의 칠리하(七里河)를 말하는 것으로 비정되고, 지리산은 지금의 진황도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을 말하는 것이며, 창해는 지금의 발해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 발해 북쪽 진황도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碣石山)은 역사서에 언급되는 갈석산이 아니라 우리의 지리산(방장산)이었고, 산동성 태산(泰山)은 우리 탐라의 한라산(漢拏山)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십승지 가야산 만수동(萬壽洞) 찾기

 

   

  가야산에는 예로부터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하나인 만수동(萬壽洞)이 있다고 전해오는데, 정감록에는합천 가야산 만수동(萬壽洞)은 그 둘레가 200리나 되어 영원히 몸을 보전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곳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오래도록 살아갈 수 있는 곳이라 하고 있다.

  가야산 만수동은 심심산골이 아니라 둘레가 무려 200리나 되는 매우 넓은 곳임을 알 수 있는데, 우리는 이미 정감록에서 말하는 가야산(伽倻山)이 한반도의 합천 가야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 발해 북쪽 지금의 요녕성 호로도시에 있는 대홍라산(大虹螺山) 임을 알고 있다.

  지금의 요녕성 대홍라산(大虹螺山) 남쪽은 호로도시(葫蘆島市)이고, 그 부근은 매우 넓은 평원지역이다. 가야산 만수동이 둘레가 200리나 된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말하는 것이라 판단된다.

  따라서 정감록에서 말하는 가야산 남쪽 만수동(萬壽洞)은 지금의 요녕성 호로도시 일원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지금 역사학자들 간에는 한반도 남부에 가야가 있었느니, 임나가 있었느니, 없었느니 하면서 격론이 벌어지고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양쪽 모두 참 한심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우리 고대사의 실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엉뚱하게도 한반도 남쪽에서 가야와 임나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는 고조선도 없었고, 삼한(마한, 진한, 변한)도 없었다.

  그리고 고구려도 없었고, 신라도 없었으며, 가야도 없었고, 동예도 없었으며, 옥저도 없었다.

 

한반도 남부에는 후한 광무제에게 쫓긴 흉노족들이 도망쳐 와서 세운 흉노족왕국이 있었고, 대륙백제 13대 근초고왕과 대륙에서 왕위다툼을 벌였다가 패한 12대 계왕의 아들 무광왕(武廣王, 필자주 : 관세음응험기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 무광왕을 말한다)이 한반도로 건너와 세운 반도백제가 있었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우리의 가야는 한반도 남부에 없었다.

  가야는 원래 지금의 발해 북쪽 요녕성 호로도시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고,

  고대의 왜국은 발해 동쪽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임나국은 하북성 진황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였다.

  사실이 이러하므로 한반도에서는 천년을 찾아도 가야와 임나는 찾을 수 없고, 신라도 찾을 수 없다.

  한반도에 존재한 적도 없는 가야와 임나 그리고 신라를 어찌 한반도 남부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 이렇게 물증을 제시해도 믿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면...........일반인들에게야 그냥 그대로 지금까지 알던대로 알고 살아라 할 수  있겠지만,  역사학자들까지도 이해를 하지 못한다던지, 또는 억지로 이해하려 하지 않으려 한다던지, 아예 연구해볼 가치도 없다고 치부해 버린다면 이는 매우 곤란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