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진한6부가 알려주는 신라의 진짜 강역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거서간 조를 보면,
“앞서 조선(고조선)의 유민들이 산곡에 나뉘어 살아 6촌(六村)을 이루었는데,
1왈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이오,
2왈 돌산고허촌(突山高壚村)이오,
3왈 자산진지촌(觜山珍支村, 혹운 干珍村)이오,
4왈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이오,
5왈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이오,
6왈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이니 이것이 진한6부(辰韓六部)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9년(A.D.3) 조를 보면,
“봄에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이어 사성(賜姓) 하였다.
양산부(楊山部)를 급량부(及梁部)로 고치고 성을 이씨(李氏)로 하고,
고허부(高墟部)는 사량부(沙梁部)로 고치고 성을 최씨(崔氏)로 하고,
대수부(大樹部)는 점량부(漸梁部 일운 牟梁)로 고치고 성은 손씨(孫氏)로 하고,
간진부(干珍部)는 본피부(本彼部)로 고치고 성은 정씨(鄭氏)로 하고,
가리부(加利部)는 한기부(漢祇部)로 고치고 성은 배씨(裵氏)로 하고,
명활부(明活部)는 습비부(習比部)로 고치고 성은 설씨(薛氏)로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조를 보면,
“옛날 진한(辰韓) 땅에는 여섯 촌(村)이 있었다.
1왈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이니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은 알평(謁平)이니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嵓峰)에 내려 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유리왕) 9년에 부(部)를 두어 급량부(及梁部)라 했다. 고려 태조 천복5년 경자(A.D.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 동산(東山), 피상(彼上) 등 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2왈 돌산고허촌(突山高壚村)이니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 ?~?)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沙梁部)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여 구량벌(仇梁伐), 마등오(麻等烏), 도북(道北), 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속한다.
3왈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인데, 촌장은 구예마(俱禮馬이다. 처음에 이산(伊山, 皆比山이라고도 한다)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는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여기에 속한다.
4왈 자산진지촌(觜山珍支村)인데, 촌장은 지백호(智伯虎)로서 처음에 화산(花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본피부(本彼部)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한다. 시파 등 동남촌(東南村)이 여기에 속한다.
최치원은 바로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은 황룡사(皇龍寺) 남쪽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 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최후의 옛 집임이 분명하다.
5왈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지금의 금강산 백율사 북쪽 산이다)인데, 촌장은 지타(祗沱 혹운 只他)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한기부(漢岐部) 또는 한기부(韓岐部) 배씨(裵氏)의 조상이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 하는데, 상서지(上西知), 하서지(下西知), 내아(乃兒) 등 북촌(北村)이 여기에 속한다.
6왈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인데, 촌장은 호진(虎珍)이다. 처음에 금강산(金剛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라고 하는데, 물이촌(勿伊村), 잉구미촌(仍仇弥村), 궐곡(闕谷, 혹운 葛谷)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속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삼국사기에는, 고허부(高墟部)는 사량부(沙梁部)로 고치고 성을 최씨(崔氏)로 하고,
간진부(干珍部)는 본피부(本彼部)로 고치고 성은 정씨(鄭氏)로 하였다고 하였는데,
삼국유사에는, 2왈 돌산고허촌(突山高壚村)이니 촌장은 소벌도리(소벌도리(蘇伐都利, ?~?))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沙梁部)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여 구량벌(仇梁伐), 마등오(麻等烏), 도북(道北), 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속한다.
4왈 자산진지촌(觜山珍支村)인데, 촌장은 지백호(智伯虎)로서 처음에 화산(花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본피부(本彼部)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한다. 시파 등 동남촌(東南村)이 여기에 속한다.
최치원은 바로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은 황룡사(皇龍寺) 남쪽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 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최후의 옛 집임이 분명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두 기록을 비교해 보면, 고허부(사량부)와 간진부(본피부)의 시조가 바꾸어져 기록되어 있다.
어느 기록이 옳은지 확실하게 알 수 없어 지금 많은 역사연구자들이 황당해 하고 있다.
이를 정리해 배치해 보면 아래와 같다.
북촌(금산가리촌, 한기부)
(배씨)
동북촌(명활산고야촌, 습비부)
(설씨)
서촌(무산대수촌, 점량부) 서라벌 동촌(알천양산촌 급량부)
(손씨) [금성] (이씨)
동남촌(자산진지촌, 본피부)
(정씨)
남촌(돌산고허촌, 사량부)
(최씨)
그런데 이와 똑같은 지형을 가진 곳은 한반도 경주(慶州)가 아니라, 발해 북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이다.
앞서 필자는 금관가야의 건국지 구지봉(龜旨峯)과 금관성(金官城)이 발해 북쪽 요녕성 호로도시 흥성시(興城市)에 있다고 밝혔고,
백제의 건국지 한산부아악(漢山負兒嶽)이 발해 북쪽 하북성 당산시 천안시 건창영진(建昌營鎭)에 있다고 하였고, 백제의 북한산이 지금의 진황도 도산(都山)이라고 했는데,
바로 그 발해 북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에 진한 6부(6촌) 기록과 똑같은 지형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신라의 천년 도읍지 서라벌(徐羅伐)이 틀림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라는 한반도 경주가 아닌 지금의 발해 북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를 중심으로 가야,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강역을 넓혀갔고, 천년 왕조를 이루었던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라는 영원히 찾을 수 없다.
발해 북쪽에서 천년 왕조를 이루었던 신라를 한반도 경주에서 찾으려 한다면 어찌 그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으랴.
한민족이여
제발 정신 차려라.
그리고 역사의 눈을 떠라.
우리의 대륙 옛 땅이 허물어져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