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졸본(卒本), 국내성(國內城), 환도성(丸都城), 평양성(平壤城)이 알려주는 고구려의 진짜강역 – 최초주장
[고구려 건국지 졸본인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 풍광]
[고구려 국내성인 북경 북쪽 연경 영녕진 영녕고성]
[고구려 환도성인 북경 회유 발해진]
[고구려 평양성인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이다.
고구려는 졸본부여를 이은 나라였다.
그런데 해씨(解氏)인 졸본부여 추모왕(주몽왕)의 딸이 구려(句麗)로 시집을 가게 되어 졸본부여와 구려는 통합을 이루게 된다.
그리하여 2대 유리왕 때 구려지역에 위치한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추모왕(주몽왕)의 직계혈손인 5대 모본왕이 폭정을 일삼게 되어 시해 당하게 되자, 대신들은 모본왕의 태자가 아닌 구려(句麗)로 시집간 추모왕의 딸의 후예인 고궁(高宮)을 왕위에 올리는데, 이가 곧 고구려 6대 태조대왕(太祖大王)이다. 따라서 실제 고구려는 이때부터 고구려(高句麗)라는 국호를 사용했을 것인데, 이는 “고씨(高氏)의 구려(句麗)”라는 의미일 것이고, 이후 고구려의 왕들은 모두 고씨(高氏)였다.
따라서 고구려는 추모왕의 직계혈손인 해씨(解氏)와 외손인 고씨(高氏) 두 성씨로서 왕위가 이어졌던 것이다.
후한서와 삼국지에 “고구려에는 다섯부족이 있는데, 소노부(삼국지에는 연노부라 했다),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이다. 본래는 소노부에서 왕이 되었으나 점점 미약해진 뒤에는 계루부에서 왕위를 대신하였다”는 기록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그랬다가 10대 산상왕 때 환도성((丸都城)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11대 동천왕 때 위(조위)나라 관구검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자 급히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는 것인데, 삼국사기에는 “평양(平壤)은 본시 선인 왕검(王儉)이 살던 곳인데. 혹은 왕의 도읍이라 하여 왕검(王儉)이라 한다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의 평양성이 곧 옛 고조선(왕검조선)의 도읍 왕검성(王儉城)이었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북사 고구려전을 보면,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平壤城)으로서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서가 6리로서 산의 굴곡을 따라 성곽을 쌓았고, 남쪽으로는 패수(浿水)에 닿았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위만조선 조를 보면, “왕검(王儉, 왕검성)”을 설명하면서, “이기(李寄)는 땅이름이라 했고, 신찬은 왕검성(王儉城)이 낙랑군(樂浪郡)의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고 했다”라고 하여 왕검성이 패수의 동쪽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따라서 평양성(왕검성)은 패수의 동쪽 또는 패수의 북쪽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 많은 역사학자들은 한반도 북한의 평양 또는 압록강 북쪽에 평양성이 위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연구에 의하여,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에 있는 피서산장(열하행궁)으로 밝혀졌고, 패수(浿水)는 발해 북쪽 지금의 난하(灤河)로 밝혀졌다.
[패수의 동쪽 또는 패수의 북쪽에 위치했다고 사서의 기록에 나타나는 고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곳의 피서산장(열하행궁) 자리가 옛왕검성, 평양성이었던 곳으로서 사서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삼국사기 권제37 잡지 제6 지리4 고구려 조를 보면, “고구려가 처음에는 중국 북쪽 땅에 살았으나 점점 동쪽의 패수(浿水) 옆으로 옮겨왔다(高句麗始居中國北地 則漸東遷于浿水之側”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졸본(필자주 : 지금의 하북성 적성현 후성진)에서 국내로,
다시 국내(필자주 : 지금의 북경시 연경구 영녕진)에서 환도성으로,
또 다시 환도성(필자주 : 지금의 북경시 회유구 발해진)에서 평양성(필자주 :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으로 천도한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대의 요동(遼東)은 지금의 북경을 말하는 것으로서 중국 사서들에 “고구려와 백제는 함께 요동 동쪽 1천여리에 위치한다”고 한 것은 바로 고구려가 평양에 도읍했을 때와 백제가 웅진에 도읍했을 때를 말한 것으로서,
고대의 요수(遼水)는 지금의 북경 서쪽 영정하(永定河)를 말하는 것이고,
압록강(鴨淥江)은 지금의 백하, 밀운수고를 말하는 것이며,
살수(薩水)는 지금의 조하(潮河, 북경 동북쪽 고북구를 지나는 강)를 말하는 것이며,
패수(浿水)는 지금의 난하(灤河)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 고조선(왕검조선)의 왕검성(王儉城)은 옛 패수(浿水)였던 발해 북쪽 지금의 난하(灤河) 부근에서 찾아야 했던 것인데,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를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전혀 엉뚱한 곳을 평양성, 왕검성이라 주장하며, 사서의 기록들을 억지로 대입하여 해석하고 있었으니, 어찌 고조선(왕검조선)의 진짜 왕검성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며, 고구려의 평양성, 고려의 서경을 찾을 수 있었으랴. 그리고 졸본, 국내성, 환도성도 마찬가지이다.
언제쯤이나 되어야 우리 고구려의 진짜 졸본, 진짜 국내성, 진짜 환도성, 진짜 평양성과 고조선(왕검조선)의 진짜 왕검성을 찾을 수 있으려나.
필자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대륙 역사를 하루아침에 명쾌하게 밝힐 수 있으련만.............................ㅉㅉ